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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Apr 28. 2022

글 쓰는 딸들 프로젝트 - 2

시몬 드 보부아르, <아주 편안한 죽음>


*이 시리즈는 소피 카르캥의 <글 쓰는 딸들> 에서 착안하였습니다. 그녀의 글에서 다루고 있는 매혹적인 세 작가의 작품을 읽고 독후감이면서 에세이이기도 한, 그녀들의 이야기이면서 모든 어머니와 딸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 글을 써보았습니다.


오늘 저녁 프랑수아즈는 시몬에게 <신데렐라>를 읽어줄 참이다. 자매 사이의 불화는 얼버무리고 아버지의 죽음은 건너뛰면서 '착한 신데렐라'의 미덕을 강조할 것이다. 신데렐라는 결코 화를 내는 법이 없고,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도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법이 없다고. "보렴, 시몬, 신데렐라는 얼마나 착하고 헌신적이니. 신데렐라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자랐거든. . . . ."

-소피 카르캥, <글 쓰는 딸들> 중, '시몬 드 보부아르와 프랑수아즈.'


상상해보라. '자기만의 성'을 지을 수 있을만큼 똑똑한 어머니에게서 그 성쯤은 쉽게 무화시켜버릴 만큼 똑똑한 딸이 태어난다면. 딸은 어릴 때 어머니의 뿌듯함이나 자랑거리였다. 분명히 어머니가 지은 성의 '일부'였다. 하지만 딸은 커갈수록 어머니가 지은 성은 불합리하고, 불편하며, 무엇보다 자기와는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 똑똑한 딸은 어머니에게 어떤 의미일까? 어머니의 성을 숭배하지 않는 딸도 어머니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나? 그런 적이 있던가?


보부아르의 어머니 프랑수아즈는 종교와 관습, 계획과 윤리로 무장한 성을 지었다. 그녀는 육체가 지니는 감각마저 부정한다. "하루 두차례 기도를 올리고, 매주 일요일 저녁 미사에 참석하는" 생활. 한치의 오차도 변화도 예외도 없는 매일매일이 보부아르를 옭죈다. 그녀는 학교에서 그녀의 운명을 바꿔 줄 친구들을 만나면서 자신의 삶이 결코 괜찮지 않다는 걸 인지한다. 좋은 가문이라는 허울뿐인 명성에 기대서 살아왔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몰락해서 소용없어진 현실. 어머니는 그 현실마저 부정하고 있지 않은가. 보부아르가 보기에 어머니는 두 가지밖에 몰랐다. 어떤 규칙의 끊없는 반복, 그리고 어떤 현실에 대한 지치지 않는 부정. 보부아르는 숨이 막힌다.


"집 안의 모든 문을 열어놓고 감시"하는 어머니, 심지어 "문학 영역"에서도 검열을 행해 읽어서는 안되는 책을 정하는 어머니. 프랑수아즈는 "딸들을 질투 섞인 눈으로 지켜본다. 딸들이 자신의 품에서 벗어나는 게 싫다. 달리 말하면 결국 딸들의 성장을 지켜보지 않은 것이다." <글 쓰는 딸들>의 저자 소피 카르캥은 말한다. "투명성을 강요한다는 건, 아이에게서 그만의 비밀공간과 내밀한 영역을 빼앗는다는 건 얼마나 큰 폭력인가."


그럴 때 딸은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그다지 많지 않은, 불공평한 선택지들에 대해서. 어머니의 성에 살면서 그 성이 아름답고 훌륭하다고 감탄한다면, 나는 어머니의 사랑 혹은 인정을 받겠지, 하지만 '나'는 점점 옅어질거야. 반대로 그 성에서 빠져나와 어머니의 성이 불합리하다고, 나와는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나는 어머니의 사랑과 인정으로부터 멀어지겠지. 하지만 '나'는 점점 더 '내'가 될 거야. 어떤 시행착오와 혼란을 겪더라도, 그 모든 건 '나의' 경험이 될 거야.


보부아르는 똑똑하기만 한 게 아니라 용감했다. 그녀의 용기란 자신에게 솔직한 것이었다. 싫은 것을 싫다고 말하는 일, 좋은 것을 좋다고 말하는 일이 보부아르에게는 목숨처럼 느껴졌다. 그런 딸이라면 선택지는 하나다. 보부아르는 엄마의 성을 거절한다. 상냥하지도, 부드럽지도 않게. 교회에 가길 거부하고, 원하는 옷을 입고, 읽고 싶은 책을 읽는다. 어머니는 더는 자신의 딸을 '내 품 안의' 작고 소중한 자랑이라 여기지 않는다. "너 말이다. 나는 네가 무섭단다." 어머니는 병상에 누워 딸에게 마침내 고백한다. 딸은 아픈 어머니를 위해 미소를 띤 채로, 마음 속으로 대답한다. '네, 엄마, 저는 그 사실을 열다섯 살때부터 알고 있었답니다. 그나저나, 아프신 덕분에 자아를 내리 누르던 '가식적인' 말과 감정들로부터 벗어나셨네요. 축하드려요.'




자신이 읽을 책까지 정해주려는 어머니의 품을 떠나 보부아르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은 '글쓰기'였다. 그녀는 아주 어릴 때부터 글쓰기에 재능을 보였다. 누가 제대로 가르쳐준 적도 없는 어려운 책들을 읽었고,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그녀의 어머니는 대부분의 부모라면 칭찬해마지않을 이런 상황에서도 기뻐하지 않는다. 그건 그녀가 "예기치 못한 놀라움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계획과 통제를 벗어난 것은 달갑지 않다." 보부아르는 프랑수아즈의 굳어진 얼굴을 보며 자신의 기쁨 마저 감춘다.


하지만 소용 없었다. 보부아르는 지능마저 뛰어난 영재였고, 그런 재능은 쉬이 감춰지지 않는 법이다. 나는 글을 써야 해. 엄마 몰래 창밖으로 파리의 거리와 사람들을 구경하던 소녀. 소녀는 그 사람들에 대해, 그들이 걸어가는 그 길과 그 길을 만든 사회에 대해 무한한 궁금증을 품는다. 한계가 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어머니가 "당치 않은 짓"이라고 말한 그녀의 그런 상상들은 철학을 만나 만개할 터였다.


그리고 이런 그녀의 비상을 좀 더 앞당겨 준 존재가 바로 사르트르였다. 둘의 사랑과 우정은 누군가가 방해한다고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르트르를 통해 보부아르는 때때로 용기를 얻었고,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고 믿을 수 있었다. 그들의 관계란 "지극히 친밀하되 서로에게 침투하려 들지 않으며, 따라서 상대방을 구속하는 일도 없"었다. 그런데 나는 보부아르와 프랑수아즈의 관계를 통해 보부아르가 사르트르와 맺은 관계의 일면을 읽는다. 보부아르가 생의 마지막까지 자유를 추구하고 동시에 실천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결국 그녀를 억압한 어머니였을 것이다. 이 아이러니. 뒤라스와 마리 도나디외가 그랬듯이 잘못된 어머니가 반드시 잘못된 딸을 기르지는 않는다는 역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 보부아르는 뒤라스와는 좀 다른 방식으로, 아니, 어쩌면 아주 많이 다른 방식으로 글 쓰는 딸이 될 것이다.


 


청소년기 이후로 어머니와 늘 소원한채로 지냈던 보부아르는 이제 어른이 되었다. 자유로운 연애, 자유로운 사상, 자유로운 글쓰기. 그녀는 자신을 억압하려는 모든 것에 저항한다.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자유로운 인간이 되어가는 중일까. 보부아르는 자신이 사랑한 도시 로마를 여행하던 어느 날 어머니가 욕실에서 넘어져 병원에 실려 가 있고, 상태가 좋지 않다는 연락을 받는다. 그녀는 어떻게 했을까?


보부아르는 망설임 없이 로마에서 파리의 병원으로 달려간다. 그후 어머니가 돌아가시기까지 보부아르는 자신의 일상을 모두 내려놓고 어머니를 간호하기로 결정한다. 이런 결정은 보부아르에게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헌신에 대해 이렇게 말해오지 않았는가. "소위 헌신이라는 것의 대부분은 그러므로 출발에서부터 그 의도와 모순된다. 실제에 있어서 헌신이라고 하는 것은 압제이다. 그러나 압제적인 헌신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런 딸은 지금 "남편을 위해,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스스로를 돌보지 않음으로써 스스로를 잊었던", "헌신의 위대함을 믿으면서도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에 대한 자신만의 견해와 억제할 수 없는 욕망 역시 지니고 있어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 걸 견디지 못"한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어머니는 딸의 헌신을 평생토록 요구하고 바라왔다. "적어도 난 이기적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남을 위해 살았거든." 동시에 그 요구와 바람을 스스로 견디지 못해서 괴로워했다. 딸은 그런 어머니로부터 달아나는 것만이 자신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라 믿어왔다. 그런 두 사람이 좁은 병실에 단둘이 마주해야 한다.


어머니의 갑작스런 발병과 죽음, 그리고 그 시간의 기록인 <아주 편안한 죽음>은 얼핏 평생 동안 평행선을 걸었던 모녀의 '눈물 나는' 화해의 이야기를 기대하게 한다. 다분히 신파적이지만 언제나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그런 이야기. 하지만 나는 보부아르의 한치의 양보도 없는 냉철한 글들을 읽으며, 어쩌면 보부아르와 프랑수아즈에게 화해란 무의미한 것,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우려하는 중이었다. 어머니에게 자신이 지은 성은 자신의 존재 이유이자, 목숨이었고, 딸에게는 그런 어머니의 성을 벗어나고 그 성을 비판하는 일이 자신의 존재 이유이자, 목숨이었다면 그 두 사람에게 화해란 없는 게 아닌가. 불가능한 게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말하자면 '누구 하나 죽어야 끝이 나는 관계'인 셈이다. 엇? 그런데 지금 보부아르는 어머니의 병실에 와 있다. 그녀의 어머니는 노쇠했고, 심지어 상처를 입었다. 어쩌면 그녀들 사이에서도 변화가 가능할까?




내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두 모녀는 어쩌면 생애 마지막일 상황에서도 서로에 대한 긴장의 끈을 쉬이 놓지 않는다. 가령 이런 장면. 프랑수아즈에게 육체와 욕망이란 줄곧 '금기'의 대상이었다. 언급해서는 안 되는 것, 그것을 따라서도, 그것에 매혹되어서도 안 되는 것. 하지만 병원에서 보부아르가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마구 만지고 마음대로 다루는 전문가들의 손길에 내맡겨진, 의지할 데라곤 하나 없는 가련한 몸뚱이"로써의 어머니였다. 보부아르는 고백한다. "엄마가 자신의 몸을 드러내 보이는 걸 태평스럽게 승낙했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더 불쾌하게 했다"고. 하지만 이 명석한 딸은 곧바로 이렇게 덧붙인다. "엄마가 평생 동안 자신을 짓눌러 왔던 금지 사항이나 지시 사항을 벗어던졌다는 점에 있어서는 엄마를 높이 평가"한다고. 그렇대두. 보부아르의 글은 차갑다.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와 처음으로 화해하는 순간조차 이렇듯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묘사한다.


보부아르의 냉철한 분석은 계속 이어진다. "육체적 쾌락을 누릴 수도, 허영심을 만족시킬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지루함과 수치심을 안겨 주는 힘든 일에 얽매여 살아가던 이 자존심 강하고 고집 센 여인은 체념하는 데 있어서는 소질이 없었다. 분노를 터뜨리지 않을 때의 엄마는 마음속 웅얼거림을 시끄러운 소리로 잠재우려는 듯이 쉬지 않고 노래했으며 농담을 하거나 수다를 떨었다." 상대의 폐부를 찌르는 예리한 눈빛. 그건 보부아르가 그토록 거부했던, '모든 문이 열린 방'에서 어떤 비밀도 없어야 했던 유년의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그 눈빛이다. 그녀는 숨막히는 집착과 감시를 벗어나기 위해 그보다 더 정교하고 날카로운 눈을 가지게 된 걸까.


그 눈빛에 찔린 것 같다가도 나는 이내 이런 문장들에서는 뭉클해지고 만다. "내게는 권리가 있다. 우리를 짜증나게 했던 이 말은 사실 엄마에게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걸 증명해 보이는 말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엄마의 욕망이 그 자체로는 인정받지 못해 왔다는 걸 보여주는 말인 셈이었다." 보부아르는 어머니에게, 아니, 어쩌면 자신의 '처음'에 다가가고 있다. 어머니가 지은 성의 겉모습만이 아니라 왜 그런 성을 지을 수밖에 없었는지에 가까워진다. 이런 걸 두고 우리는 '이해'라고 부른다. 상대가 견고하게 쌓아올린 어떤 벽 너머를 들여다보는 일. 혹은 그 벽이 말랑해지거나 투명해져서 내가 그 속을 조금 엿보게 되는 일. 보부아르는 평생에 걸쳐 서로를 부정했던 어머니와 이제 막, 이해를 나누려는 참이다.


어머니의 병세는 나날이 위중해진다. 걸을 수도, 먹을 수도 없게 된 엄마는 자신이 지었던 성으로부터, 혹은 자신이 믿고 의지했던 것들로부터 점차 놓여난다. 그녀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지만, 이제는 신부의 방문을 거절하고, 그녀는 타인의 시선을 유난히 신경쓰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귀찮은 타인들의 귀찮은 잔소리를 거절한다. 보부아르는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격려'하지만, 동시에 어머니가 내던진 원칙과 규칙, 규율과 계획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다. 자신 역시, 저것들과 싸워왔고 지금도 싸우고 있지 않은가. 보부아르는 그 모든 것의 허망함을 알아보는 대신, 어머니가 그것들로부터 벗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집중한다. 이 집중은 어쩌면 보부아르가 평생에 걸쳐 쌓아온 존중과 존경의 상징일 것이다. 그녀는 어머니의 변화를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성실하게 공부한다. 그 일이 설령 자신을 괴롭혀왔던 것들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과정을 지켜봐야 하는 일이라고 해도 그녀는 거부하지 않는다. 그렇게 그녀는 끝내 이해하지 못했던, 동시에 용서하지 못했던 자신과 화해하는 길에 나선다. 보부아르는 어머니의 죽음을 겪으며, 그녀의 곁을 지키고 애도하며, 더 깊은 자기 자신에 이른다. 어머니와 자신이 서로를 껴안는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이제 보부아르는 어머니를 가로 막고 있던 장막의 실체를 더 명확히 깨닫는다. 그 장막 뒤에 서 있던 힘 없는 여인을 알아본다.


"예전에 엄마는 관례적으로 했던 교양 있는 말이나 판에 박힌 행동 들로 자신이 진짜로 느끼고 있는 바를 감추곤 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한 표현과 행동의 부재가 엄마에게 남긴 냉담함의 정도에 비추어 그녀가 진짜로 느끼고 있는 감정이 얼마나 뜨거울지 가늠해 보았다."




참 이상하지. 나는 보부아르의 글을 읽으며 내내 아팠다. 보부아르의 시선은 비단 타인만을 향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 시선에 제일 먼저, 가장 많이 찔리는 것은 자신이었을 테다. 보부아르를 지배했던 유년 시절의 검열과 감시, 윤리적/종교적 억압의 시선들 속에서 그녀가 사회의 모든 금기에 저항하는 철학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가슴이 시렸다. 정신적으로 억압당하는 영혼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자신이 가장 사랑해마지 않는 사람에게 자신의 정신을 지배당하는 일에 대해. 보부아르는 훗날 이야기했다. 자신이 어머니에게 저항하고 일상의 사소한 것들을 거부하고 반대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시 말해 "그런 자잘한 승리에서 용기를 얻은 덕분에 나는 규칙, 의례, 관습을 극복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을 수 있었다."고.


또한 나는 이런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 것이 단지 그녀가 철학자로 평생을 살아왔거나, 엄격한 어머니로부터 교육받았기 때문은 아니리라는 것. 보부아르는 너무나 뜨거워서 이만큼 차가워야만 스스로를 표현해낼 수 있었으리라. 그녀의 생을 끌고 간 새로운 시도들,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적 제도와 사회 시스템을 향한 서늘한 고백은 사실 그녀가 얼마나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를 반증한다. 그녀 자신이,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가 말했듯이 그들은 "삶을 사랑해서" 차갑기로 결정했고, 그렇게 살았다. 그들의 방식이 정작 자신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고 해도, 그들은 약해지지 않았다.


그녀의 이런 특징들은 뒤라스와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발현되는데, 그녀가 뒤라스와 그다지 좋은 관계가 아니었고, 실제로 뒤라스는 사르트르와 그녀를 '싫어'한다고 공공연히 언급했던 것이다. 내 생각에 두 사람은 서로를 좋아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서로에게 끌린다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뒤라스에게 보부아르는 너무 차가운 사람이었을테고, 보부아르에게 뒤라스는 너무 뜨거운 사람이었을테다. 혹은 그 반대이거나. 물론 서로 다른 성향의 사람들이 서로를 더 편안하게 느끼는 경우도 있지만, 둘은 아니었다.


"<태평양을 막는 제방>을 읽었을 때 시몬은 명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다른 작품들은. . . . . 뒤라스의 다른 작품들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사실은 역겨울 정도로 싫었다. 나머지 작품들에서는 자기만족의 냄새가 피어올랐다. 그런 자기만족이 모더니티의 한 유형이라지만 시몬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여자는 자기가 천재인 줄 아는 걸까?" 하지만 보부아르에게 뒤라스는 적어도 자신이 닿고 싶었던 그곳 - 적어도 어머니와의 관계에 대해서라면 한 번도 시도해본 적 없는 뜨거운 열정 - 에 먼저 닿은 사람이었다. "시몬은, 내심 동의하기는 싫었지만, <태평양을 막는 제방>이 어머니를 형상화한 아주 뛰어난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그 작품 속의 어머니는 자부심 강하고 거만하고 열정에 차 있다. 아이를 학대하고 동시에 사랑한다. 아마 뒤라스도 어머니 밑에서 힘든 유년을 보냈으리라고 시몬은 생각했다. 그들 두 딸은 각자의 어머니로 인해, 각자의 방식으로 고통스러워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워했다는 지점에서 나는 흥미를 느낀다. 그들은 물론 각자의 어머니로 인해 고통스러웠지만, 그 고통의 방식도, 그 고통에 맞서는 방식도 완전히 달랐다. 뒤라스에 대해 자기만족이나 자아도취에 빠진 사람이라고 느끼는 보부아르. 실제로 그녀의 글에서 '자기만족'의 흔적을 찾기란 어렵다. 보부아르의 글에서 느껴지는 그녀는 '닿아야 하는 이상'만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그 이유를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의 관계 속에서 어렴풋이 짐작해보는 것이다.


보부아르는 어머니의 죽음 이전까지 어머니와 한번도 뜨거운 열정을 공유하지 못했다. 삶에서 일어나는 아주 사소하고 기쁜 일부터, 거대하고 중요한 결정에 이르기까지. 보부아르는 어머니의 동의도, 반대도 거절했다. 또한 그녀는 어머니로부터 받았던 억압과 감시의 눈초리에 대해 적극적으로 이야기한 적도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생각했을 것이다. "아직 그 상처에서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니지 않은가?" 자기가 생각하는 어떤 이상, 어떤 가치들 때문에 보부아르는 상처를 돌파하는 대신, 상처를 입히지도 받지도 않는 인간을 꿈꾼 건 아닐지. 그녀의 꿈은 그녀 안의 뜨거운 열정이 진정한 사랑으로 실현되고, "모든 이의 삶이 완전히 자유로운 것."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는 곳이 달라져야 한다. 그것은 누구도 누구를 억압하거나 착취하지 않는 세상이라는 원대한 꿈이었다.


자신조차 살 수 없이 좁고 불편했던 어머니의 성을 나와서 수많은 사람, 혹은 '모든 사람'이 살 수 있는 성을 짓고자 했던 그녀. 그녀는 억압된 욕망들과 비뚤어진 윤리를, 실효성이 사라져버린 도덕성의 흔적들을 되살리고자 했다. 어쩌면 보부아르는 자신의 욕망을 욕망하지 못하는 어머니(혹은 자신)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원하지 않는 것들 주변만 맴도는 어머니(혹은 자신)을, 용서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녀는 '나(만)의' 자유를 넘어섬으로써, 어쩌면 어머니 조차도 자신이 만든 자유 안에서 살기를 꿈꾸지 않았을까. 그곳에서라면, 세상에서 거부당한 욕망과 존재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보부아르는 글쓰기를 통해 나와 타인, 남성과 여성, 정신과 육체, 삶과 죽음 등 서구 사회가 오랫동안 대립적인 위계질서 속에 위치시켜 왔던 요소들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이들을 상호적 관계 속에 재정립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했다."


그녀는 어떻게 믿을 수 있었을까. 그 모든 냉랭한 것들을 자신의 뜨거운 마음으로 녹여 새로운 것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그녀가 지은 성에서 우리는 여전히 뛰논다. 그 성 안에서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부서진 성을 수리한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가 지은 성 안에서다. 아주 멀리 걸어가더라도 다시 그 성의 어느 벽과 만난다. 어머니가 지은 성을 떠나는 게 유일한 목표였던 이 똑똑한 딸은 이제 모두의 '어머니', '언니'가 되어 지금까지도 살아 있다.


"때때로 우리는 타인의 도움 없이 우리의 존재를 완성하려 한다. 나는 들판을 걸어간다. 풀을 꺾고, 발로 돌을 차고, 언덕에 오른다. 이 모든 것을 아무런 증인 없이 한다. 그러나 누구라도 평생 이러한 고독에만 만족할 수는 없다. 산책을 끝내자마자 나는 친구들에게 그 산책 이야기를 하고 싶어진다."


나는 그녀의 냉철한 글들 사이에서 뜨거운 열정을 본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는 못다한 사랑을 느낀다. 그녀가 다듬어 놓은 길을 걸으면서는 아픈 상처를 쓰다듬는다. 뜨겁고도 차가웠던 사람. 똑똑하고 동시에 바보같았던 사람. 그리고 나는 언제나 그런 사람에게 배운다.




*""안의 문장은 아래의 책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소피 카르캥, 임미경 옮김, <글 쓰는 딸들>, 창비

시몬 드 보부아르, 강초롱 옮김,  <아주 편안한 죽음>, 을유

시몬 드 보부아르, 박정자 옮김, <모든 사람은 혼자다>, 꾸리에

시몬 드 보부아르, 함정임 옮김,  <작별의 의식>, 현암사

시몬드 보부아르, 이송이 옮김, <레 망다랭 1>, 현암사

장영은,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 민음사

타니아 슐리, 남기철 옮김, <글쓰는 여자의 공간>, 이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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