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여명>
*이 시리즈는 소피 카르캥의 <글 쓰는 딸들> 에서 착안하였습니다. 그녀의 글에서 다루고 있는 매혹적인 세 작가의 작품을 읽고 독후감이면서 에세이이기도 한, 그녀들의 이야기이면서 모든 어머니와 딸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 글을 써보았습니다.
"시도는 딸의 침묵 앞에서 식물의 침묵과 맞닥뜨릴 때처럼 무력하다. 사고작용이 멈춰버릴 정도다. 그처럼 지적인 어머니, 선인장꽃의 개화를 기다릴 수 있을 만큼 인내심 강한 이 어머니가 딸의 침묵 앞에서는 자기통제력을 잃는다. 딸을 대하는 시도를 보면 서툰 정원사가 물을 주고 또 주는 바람에 결국 화초가 물에 잠기는 모습이 떠오른다. 어머니와 아이, 특히 어머니와 딸의 관계는 한 존재와 다른 한 존재의 관계이다. 즉 어머니와 딸의 사랑도 연인의 사랑과 다를 바 없다. 요구한다고 얻어지는 사랑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우선 상대방을 향해 서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 . . . 그러고는 기다려야 한다."
-소피 카르캥, <글 쓰는 딸들> 중, '콜레트와 시도.'
화면 속의 여자가 무대 위에서 춤을 춘다. 빙글빙글 돌고 풀썩 주저앉고 망설임 없이 다리를 벌리고 가슴을 드러낸다. 어떤 이는 환호하고 어떤 이는 욕설을 퍼붓는다. 때때로 무대 위로 먹다 만 음식들을 던지는 무례한 이도 있다. 하지만 무대 위의 여자는 멈추지 않는다. 막이 내릴 때까지 자신의 공연을 해낸다. 화면이 바뀌고 어느새 무대 위에서 춤추던 그 여자는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자기 앞에 놓인 종이에 빼곡하게 뭔가를 써내려가는 그녀. 가끔씩 허공을 응시하는 그녀의 눈빛이 타오르는 불길 같다가, 금새 아무 것도 없는 허공 같기도 하다. 그러다가 뭔가 생각난듯 다시 종이 앞으로 돌진하는 그녀. 그 모습은 영락 없는 작가다. 그녀는 배우인걸까? 작가인걸까? 아니면 둘 다일까?
화면 속의 그녀, 키이라 나이틀리는 지금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를 연기하는 중이다. 나는 생 소뵈르 출신의 초라한 행색을 한 긴 머리 소녀가 작가가 되고, 배우가 되고, 아내에서 자기 자신이 되는 과정을 지켜본다. 콜레트는 말 그대로 '영화 같은' 삶을 살았다. 세 번의 결혼, 남편에게 착취 당하는 유령 작가의 삶, 이혼과 몰락, 배우의 삶, 다시 작가로의 복귀까지. 그녀의 글처럼 그녀의 삶 역시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는 한 편의 드라마고, 소설이고, 영화였다. 그런 그녀의 삶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이라면 물론, 첫 번째 남편 '윌리'와의 결혼 생활과 이혼일 것이다. 콜레트를 자신의 '유령 작가'로 만들어 착취했던 남자. 그녀의 천재성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한 번도 그녀의 존재는 인정하지 않았던 사람. 하지만 그녀의 자전적 소설인 <여명>에서 만난 그녀,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는 나에게 더 드라마틱한 장면을 보여주었다. 콜레트는 윌리에게서 벗어나기 전에, 아니 그를 만나기도 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콜레트의 어머니 시도는 앞서 소개한 두 명의 어머니들과는 달랐다. 그녀는 딸을 착취하고 폭력을 일삼거나, 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옭아매지 않았다. 그녀는 언뜻 (그런 게 있다면 말이지만)완벽한 어머니처럼 보인다. 여러 사랑스러운 애칭으로 딸을 부르는 어머니, 딸에게 '새벽'의 공기와 느낌을 알려주고 싶어하는 어머니, 세상을 관찰하는 눈을 가르쳐주는 어머니, 그리고 무엇보다, 딸의 재능을 알아보고 응원해주는 어머니. 게다가 시도는 콜레트가 여러 차례 인정하는 것처럼, 어쩌면 콜레트보다도 더 '작가의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하지만 시도는 자신은 작가가 아닌 어머니가 되기로 결정했고, 대신 자신의 다음 세대인 딸이 작가가 되기를 염원한다. "한송이의 꽃이 시들어야 다른 꽃송이가 피어난다. 이것이 시도의 신조다."
"그렇다면 어머니가 보여준 이 새벽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새벽은 무한히 다시 태어나는 자연, 새로운 시작의 영원한 순환이라는 것이다."
이런 시도에게서 태어난 콜레트는 윤택하지는 않아도 편안하고 풍족한 유년 시절을 보냈을 거라 기대하게 된다. 그럼 그렇지. 꼭 고통스러운 유년을 보내야만 '글 쓰는 딸'이 되는 건 아니라고! 그런데 이야기는 전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흐른다. 콜레트는 어머니가 불편하고 어렵다. '벗어나고 싶다.' 이거 왜 이래. 이거이거, 내 예상과는 너무 다르잖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실은 아무 일도 없었다. 시도는 여전히 딸의 내면을 꿰뚫어 볼 수 있고, 그래서 딸에게 가장 필요한 말을 건넬 수 있는 어머니이고, 여전히, 콜레트를 여러 가지 애칭으로 부른다. 달라진 건 콜레트였다. 언제나 그렇듯, 딸은 자란다. 아이는 어른이 되고, 소녀는 여자가 된다. 시도는 대부분의 진실을 알아볼 줄 아는 눈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깨닫지 못한다. 언제나 나의 '미네 셰리'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매일 아침 자신에게 그 작고 보드라운 볼을 부비며 지난 밤의 '꿈 얘기'를 들려줄 귀여운 딸이기를.
하지만 콜레트는 자아가 형성될수록 어머니가 어렵다. 시도는 콜레트의 모든 것을 어쩌면 콜레트 자신보다도 잘 알고 있으니까. 어머니의 기대를 충족시키고 싶어서 지어내던 꿈 얘기도 싫고, 자신보다 먼저 자신의 선택을 예견하고 준비하는 어머니가 싫다. 콜레트는 어머니를 떠나고 싶다. 어머니를 사랑해서 어머니를 떠나고 싶은 그녀다.
"어머니와의 융합 속에서 성장한 딸이 청소년기에 이르러 독립을 모색할 때 어머니와의 관계를 벗어나려면 생살을 잘라내는 것과 동일한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교육이란 은혜를 베풀고 그것에 감사하는 일과는 상관이 없다. 아이들은 필연적으로 배은망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도의 과도한 사랑에 지친 콜레트가 시도를 떠나게 해줄 구세주로 느낀 그 남자, 윌리는 하지만 시도의 또 다른 이름과 다름 없었다. 콜레트는 아직 자신의 영토를 회복하지 못한 채였고, 그럴 때 사랑은 언제나 족쇄나 올가미가 되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너는 좀 더 자라야 해. 너는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해." 콜레트는 몰랐지만, 윌리는 시도가 못다한 열정의 한 부분을 - 그렇다, 어쩌면 글쓰기를 - 콜레트에게 각인시킨 사람이었다. 콜레트는 윌리를 통해, 자신이 벗어나야 하는 곳이 비단 시도라는 이름의 작은 왕국이 아니라 자신을 이런저런 잣대들로 평가하고 움츠러들게 만드는 세상 전부였음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의 끝에는 시도와의 화해 역시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윌리와의 결혼 생활은 많이 알려진 것처럼, 감금과 다름 없는 생활과 창작에 대한 압박, 그리고 그렇게 탄생한 '클로딘' 시리즈를 마치 윌리의 작품인 것처럼 빼앗긴 채로 유령처럼 살아가는 나날들로 요약할 수도 있겠다. 사람을 조종하고 이용하는데 탁월(?)했던 윌리에게 순수한 영혼의 콜레트는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그는 모든 영광과 명성을 독차지하고도 콜레트에게 죄의식조차 가지지 않았으니까. 콜레트는 갇힌 채로 글을 쓰고, 마치 윌리의 장식품이나 소장품처럼 파리의 살롱들에 따라다닐 뿐이었다.
향수에 시달리는 콜레트. 여전히 콜레트의 모든 걸 알고 싶고, 알고 있다는 듯 어머니는 매일 편지를 보내오지만, 콜레트는 어머니에게 자신의 불행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한 마디라도, 아니 편지에 쉼표 하나라도 방심했다가는 어머니가 금새 자신의 삶을 통째로 지휘하려 들 것이기 때문이다. 콜레트는 윌리로부터도, 시도로부터도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에게 어떤 힘도 없음을 알고 괴로워한다.
놀라운 건, 아마도 시도는 딸의 불행을 이미 직감하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것. 시도는 끊임없이 묻는다. 아무 일 없는 거냐고, 괜찮느냐고, 너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동시에 시도는 주문한다. '너의 글'을 쓰라고, '문학'을 해야 한다고. 온화하고 따뜻한 말들 속에 분명히 드러나는 시도의 의지는 콜레트를 자극한다. 콜레트는 인터뷰에서 여러 번, "내게는 문학적 재능이 없었고, 매일 내 일 앞에 더 조심스러워지고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지 점점 더 확신을 갖지 못하는 두려움을 느껴야만 마음이 놓인다."고 말했다. 그런 그녀가 글을 계속 쓸 수 있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시도와 윌리, 그러니까 콜레트가 가장 떠나고 싶었던 두 사람 덕분이었으니, 삶이란 참으로 다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콜레트에게 시도와 윌리로부터 떠날 수 있게 해 준 기회이자 선물은 그녀의 연인인 소피 마틸드 아델 드니즈 드 모르니였다. 그녀를 만나며 콜레트는 자기 마음 속에 홀로 간직했던, 늘 의심하고 시험하느라 바빴던 '자아'를 되찾는다. 자기 영혼의 영토를 회복한다. 그렇게 콜레트는 시도와도 윌리와도 작별한다. 윌리와의 이혼, 시도의 끊임없는 편지에 대해 응답하지 않는 것. 콜레트는 자유를 얻는다.
"시도는 마른 꽃이다. 경매로 팔린 생소뵈르의 집에서 모든 가구가 실려나갔던 것처럼 시도 역시 그를 채웠던 모든 것이 빠져나갔다. 딸은 그것이 싫다. 실체가 빠져나간 그 모든 껍데기, 비어버린 유년의 대체품들, 그 가짜 감각들이 싫다. 콜레트가 기억하고자 하는 것은 시도의 단 한가지 모습이다. 전능한 시도, 빛나는 시도, 새벽에 어린 딸을 데리고 숲으로 가는 시도 말이다. 그런 시도 말고 다른 여인, 여위고 병든 시도, 죽음이 갉아먹은 시도, 콜레트는 그런 모습의 시도를 원치 않는다."
서른 여덟에 콜레트를 낳은 시도는 어느새 늙고 병들었다. 죽을 일만 남은 시도는 콜레트가 자신을 아기처럼 보살펴주기를 원한다. 그럼 자신은 마치 딸처럼 콜레트 곁에서 머물고 싶다고 생각한다. 콜레트가 그런 시도를, 혹은 시도의 어머니가 되는 자신을 받아들일리가 없다. 콜레트는 거부한다. 콜레트에게 시도는 자신을 떠나게 했던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자신이 어머니를 떠났다는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울테니까.
콜레트의 자전적인 이야기와 특히 어머니 시도에 대한 회고가 담긴 소설 <여명>에서 콜레트는 말한다. "사랑하는 나의 선배여, 당신은 노쇠가 무엇인지 내게 가르쳐주지 않은 채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콜레트는 어머니 시도 앞에서는 의연하고 차분하게 그녀를 위로하는 딸이었지만, 속내로는 자신의 슬픔을 미처 다 헤아리지도 못하는 연약한 자아를 마주하게 된다. "참 신기해. 견딜 수 없이 슬픈 순간에도 눈물을 눌러 참고 멀쩡하게 '버틸' 수 있으니까. 그러다가 나중에 어떤 작은 신호, 다정한 신호가 창문 너머에서 오지. 이를테면 전날까지도 봉오리를 오므리고 있던 꽃이 활짝 핀 게 보이는 거야, 그러고 서랍에서 편지가 떨어지거든. 그렇게 해서 모든 게 무너져버려."
콜레트는 시도의 편지에 답하지 않는 것이 시도로부터 벗어난 것이라 믿었지만, 콜레트는 시도의 죽음 뒤에야 깨닫는다. 자신이 어머니를 떠올리지 않은 적은 살면서 한 순간도 없었음을. 그리고 이렇게 되뇌이는 것이다. "내 삶은 근사했어요. 그걸 좀 늦게 깨달았지만. . ." 딸들이 자신을 낳은 어머니와 완전하게 헤어질 수는 없음을, 그것은 죽음으로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조금 일찍 깨닫는다면 우리의 삶은 조금 더 나아질까. 어머니와 아무리 물리적/정서적으로 독립하고 분리되어 살아도, 살다보면 문득, 전혀 예기치 못한 순간에 그녀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머니 역시 딸은 자라서 여인이 되고, 자신과 닮았지만 완전히 다른 존재임을 가슴 깊이 깨닫는다면 우리의 삶은 조금 더 나아질까. 어머니는 보내주는 것으로, 딸은 헤어질 수 없음을 자각하는 것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한다면 우리는 편안해질 수 있을까.
"나 자신이 주위의 모든 것들보다 열등하다고 느낄 때, 보잘것없는 나 자신에 대해 위기감을 느낄 때, 근육은 팽팽함을 잃어버리고 욕망 또한 강렬함을 잃게 되었을 때, 고통조차 강도를 잃어 예리한 칼로 도려낸 듯한 아픔을 느끼지 못할 때, 나는 그러나 다시 일어나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이 편지를 쓴 여인의 딸이다. 이 편지, 그리고 아직 내가 간직하고 있는 수많은 다른 편지들을 쓴 여인의 딸이다.""
어머니 시도를 잃고 콜레트는 그녀를 자신의 소설 속에 되살려낸다. 답하지 못한 수백 수천 통의 편지들을 잊지 않았노라고. 매일 조금 더 당신과 닮아가는 내 모습을 확인하는 일이 나쁘지는 않다고. 하지만 당신과 내가 이제 만난다면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르겠다고. 아니, 나는 당신을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르겠다고.
애절한 답장과도 같은 소설을 읽으며 나는 세상의 모든 엄마와 딸들을 생각하는 것이다. 너무 가깝고 너무 먼 우리를, 너무 비슷하고 너무 다른 우리를, 가장 친절하고 가장 불친절한 우리를, 동지이면서 적인 우리를, 가장 사랑하고 가장 미워하는 우리를, 가장 많이 싸우고 가장 적게 화해하는 우리를, 그러면서도 그 화해하지 않음이 아무렇지 않은 우리를.
결혼을 한 후로, 가끔씩 내 나이 때의 엄마가 어떻게 살아왔었는지 회상해볼 때가 있다. 내가 두 살 때의 엄마를, 내가 다섯 살 때의 엄마를. 그리고 어느새 내가 기억하는 엄마보다도 나이 들어버린 나를, 그 어렸던 엄마를 떠올리다가 눈물이 조금 나고, 여전히 놀라고, 애틋해지는 것이다. 가끔 엄마에게 묻는다. 그때 무섭지 않았느냐고. 핏덩이가 둘이나 엄마에게 매달려 뭐든지 먹어치우고 뭐든지 배워서 흡수해버리는 게, 두렵지 않았느냐고. 엄마는 쑥스러운 얼굴로 답한다. 너무 어려서 무서운 줄도 몰랐노라고. 육십이 훌쩍 넘고 보니 그때 자신은 너무나 어렸다고. 그래서 늘 부끄럽고 쑥스럽다고. 잘한 게 아무 것도 없는 것 같다고.
콜레트와 시도는 가장 모범적인 어머니도 가장 좋은 어머니가 될 수는 없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얼마나 필연적인 일인가. 사랑이란 결국 대상에게로 향하는 것임을 이해한다면, 모범적이라거나 좋다는 가치 판단은 행하는 이가 아니라 받는 이에게 달린 일일 것이다. 그러니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운 의도와 목적으로 인내하고 공들여 해내는 사랑일지라도 그 가치를 받아들이는 이에게는 전혀 다른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사랑의 역설일 것이다. 그것이 부모와 자식 사이라면 더더욱, 서로의 사랑이 마주치지 못하고 마는 안타까운 일은 셀 수 없이 많다. 그러니 사랑하는 우리는, 사랑할수밖에 없는 우리는 언제나 영원히 약자다. 상대가 나의 의지를, 내 사랑의 가치를 알아봐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네가 아직 자식을 낳아보지 않아서 잘 모르는 거라고 말한대도 좋다. 나에게는 어머니와 딸의 관계 역시 결국 '보통의 인간 관계'처럼 보인다. 가장 모범적인 인간도 가장 좋은 인간이 될 수는 없음을 기억할 것.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해서, 삶을 사랑해서, '잘 하고' 싶어하지만, 잘 하는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다. 물론, 좋은 것이 되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모두에게 좋은 것도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고?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말자, 너무 좋으려고 하지 말자. 어떤 것의 격렬한 추구 뒤에는 꼭 그만큼의 배제와 소외가 기다리고 있음을 기억하자. 내가 배운 건 아직은 여기까지다. 어떤 추구 없이 살아가기. 할 수 있다면 계속해서 덜어내기. 그리고 꾸준히,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를, 이 삶을 살기.
*""안의 문장은 아래의 책에서 인용하였습니다.
소피 카르캥, 임미경 옮김, <글 쓰는 딸들>, 창비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윤진 옮김, <파리의 클로딘>, 민음사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송기정 옮김, <여명>, 문학동네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권예리 옮김, <순수와 비순수>, 1984BOOKS
장영은,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 민음사
타니아 슐리, 남기철 옮김, <글쓰는 여자의 공간>, 이봄
워시 웨스트모어랜드, 영화 <콜레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