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늦은 사춘기를 보냈다. 중학생이 되고도 한참이 지나서였는데, 나는 언어 내지는 말이라는 게 믿을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말은 아무리 다가가려해도 주어지지 않는 것이었고, 누군가에게 말은 차라리 주어지지 않았다면 좋았을 어떤 것이었다. 어떤 말은 너무 뜨겁고 어떤 말은 너무 뭉툭했다. 어떤 말은 선인장처럼 피할 수 없이 가시가 돋아있었고, 어떤 말은 물이 흐르는 개수대의 비누거품처럼 별 소용이 없었다. 그게 싫었다. 두렵고 불편했다. 언어가 공평하지 못하다는 걸 깨닫는 일이 나에게는 제법 큰 시련이었다. 나는 점점 적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후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말수가 적은, 조용한, 수줍음 많은, 아이가 되었다. 언어란, 혹은 말이란 뭘까.
나는 심적으로 힘들거나 아주 즐겁거나 어떤 일에 새롭게 도전할 때, 말하자면 삶의 다양한 국면마다 일기 쓰기를 새롭게 시작하곤 한다. 소원해졌던 일기 쓰기는 그렇게 매번 다른 이유로 업데이트 되는데, 요즘은 기억력에 도움을 주려고 일기를 좀 더 성실히 쓰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지난 하루를 글로 옮기기 위해 기억을 떠올리고 한 글자 한 글자 기록하다 보면 분명 내 하루가 좀 더 특별해지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샤워기를 고장내고, 필요한 물건 사는 걸 까먹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사소한 루틴을 지켰다는 것에 뿌듯해하는 하루. 맛 없는 식당, 불친절한 사람, 우연히 나눈 친절, 하늘과 구름 같은 것들이 내 일기장에 적힌다.
그럴 때 나는 언어는 공평하지 못하다는 걸 새삼 깨닫는 한편, 언어는 결코 삶을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인데, 나는 지금 이토록 사소하고 별 것 아닌 일상을 언어로 기록함으로써 좀 더 특별한 것으로 느끼고 있다는 사실에 혼란을 느낀다. 내 삶은 언어로 기록되기 이전에는 무의미하고 지루한 것이었나. 결국 단어들의 조합일 뿐인 문장으로 기록되어야 비로소 제 빛을 찾는 것이었나. 언어란 대체 뭘까, 혹은 말이란 대체 뭘까. 폴 오스터는 말한다. "언어는 경험이 아니다. 경험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수단이다."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그렇다면 언어의 경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에게 세상을 주었다가 빼앗아 간다. 단숨에." 이런 말은 어떤가. "인간의 타락은 죄나 위반, 부도덕한 행위의 문제가 아니다. 언어가 경험을 정복하는 것의 문제다. 즉, 세상이 말 속으로 떨어지는 것, 눈에서 입으로 내려가는 체험의 문제다. 그 거리는 8센티미터쯤 된다."*
전에는 기록하기 부끄러운 부분은 감추고 약간의 각색과 윤색을 더했다면, 그래서 가끔은 내 경험이 전혀 다른 것이 되기도 했다면, 지금의 일기는 최대한 사실에 근접하게 쓰려고 애쓴다. 그때 어땠지, 그때 그 사람이 어떤 얼굴이었지, 그때 바람이 어디서 어디로 불었더라, 이건 내 생각인가 사실인가, 내 기분인가 상대의 기분인가. 나는 마치 짧은 단편 영화를 계속해서 돌려보는 사람처럼, 나의 하루를 반복해서 떠올린다. 내 언어가 내 경험을 넘어서지 못하게 하려는 듯. 그것까지 참을 수는 없다는 듯. 내가 언어에 기대고 의지하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의 나약함일 뿐이라는 듯, 언어가 뭔가를 넘어서고 바꾸는 데 인색해진다.
그러다보면, 다시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그럴 거면 뭐하러 기록을 해? 시간과 품을 들여서 말을 고르고 문장을 이렇게 저렇게 바꾸는 수고를 왜 하냐고. 너의 언어가 어떤 것도 새롭게 만들어내지 못하고 어떤 것에도 빛을 비출 수 없다면, 너는 뭐하러 글을 써. 뭐하러 기록을 해. 그럴 거면 하루 종일 녹음기를 들고 다니거나 고프로를 달고 다니는 게 낫지 않겠어? 왜 굳이 글을 쓰느냔 말야. 너한테 기록이, 언어가, 글이 뭐길래. 그러면 다시 최초의 질문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언어란, 혹은 말이란 대체 뭘까. 하지만 진짜 곤란한 건 그 다음이다. 그렇게 '바꾸지 않으려' 애를 써도, 쓰는 순간 이미 뭔가가 바뀌어 있다는 것. 글이 뭔가를 넘어선 다음이라는 것, 글이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한다는 것.
이성복은 말했다. "언어는 삶 이상으로 고결할 수 없고, 삶 이하로 추악할 수도 없"다고. 그러니 언어 앞에서 "예쁜 척" 하지 말라고.** 언어(혹은) 말은 어느 순간, 자칫하면 존재를 넘어서려든다. 잠깐 느슨해지면 예쁜 척을 하려든다. 눈으로 보고 느낀 것은 단 8센티미터를 넘지 못하고 입으로 내려와 전혀 다른 것이 된다. 15센티미터를 넘지 못하고 손으로 내려와 온갖 고결한 척을 하려 든다. '참 잘했어요.'를 받기 위해 써내던 일기에서, 오늘의 내 일기가 얼마나 멀리 있나 생각해보면 답은 간단하다. 아, 그건 언어가 아니라 나의 부덕이고 나의 소심이다. 나의 비겁이고 나의 한계다. 언어 탓은 무슨. 그럼 질문을 바꿔 볼까. 나는, 혹은 내 언어는 뭘까. 나는 대체 왜 계속 쓰는 걸까.
뭔가를 거짓말로 지어내기도 싫고, 그렇다고 앵무새처럼 모든 것을 따라 쓰는 것도 싫은 나는, 나의 언어는 무엇을 위해 고민하고 무엇을 향해 걷나. 무엇을 위해 흔적을 남기나.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남기는 부스러기는 뭘까. 내 안에 더이상 갇혀 있지 못하고 떨어져 나온, 마치 나인 것처럼, 때로는 나 이상으로 나를 설명하려고 드는 이것은 다 뭘까. 왜 이러는 걸까.
글쓰기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돌아앉은 이의 뒷모습, 도망치는 이의 발걸음, 잘 알지도 못하는 이의 눈물자국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을 떠올리고 있자면 나는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내 힘이 닿는 데까지 기다릴 수만 있다면, 고개 돌린 당신의 얼굴을 보려고, 도망치던 당신이 쉬어가는 모습이라도 보려고, 눈물자국이 마르는 걸 보려고, 나는 쓴다. 쓰고 싶다. 할 수 있다면 최대한 진실에 가깝게 당신의 얼굴을, 당신의 발걸음을, 당신의 눈물자국을 글로 남기고 싶다.
하지만 나의 글이 아무리 당신을 그대로 묘사하려해도, 심지어 아주 단순하고 무미건조한 나의 하루를 기록하려해도, 글은 결국 뭔가를 뒤바꾸고, 어딘가를 비추고, 경계를 넘어선다. 그건 어쩌면 내 안의 뭔가가 드러난 것일지 모른다. 나는 그저 그걸 따라가는 거고. 그 뭔가가 좋은 것이기를 바라면서, 그 뒤바뀜이 마음에 드는 것이기를 바라면서, 그 마음이라는 게 괜찮은 것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알고 쓰는 게 아니고, 알아가고자해서 쓴다. 내 글은 언제나 진행중일 뿐이지, 결론에 닿을 수 없다. 그래서 늘 막막하고 두렵다. 내 안에서 뭔가 끔찍한 것이 튀어나오지 않을까, 한심하고 돼먹지 못한 것이 기어나오지 않을까, 그도 아니면 또 그 소리, 지긋지긋한 잔소리나 반복하지 않을까, 나는 매번 두렵다. 하지만 나는 다시, 알아가고 싶고, 기다리고 싶어서, 참지 못하고 쓴다.
이 글은 아흔아홉 번째 리뷰이고, 말하자면 나는 '쓰는 나'를 리뷰하는 중이다. 큰 이변이 없다면 다음 번 글은 100번째 리뷰가 될 것이다. 매주 한 편의 글을 공개했으니, 100주 동안 글을 쓴 셈이다. 돌아보면 매번 비슷한 비율로, 쓸 수 있어서 기쁘고 써야해서 괴로웠다. 다음에는 좀 달라지려나 기대해도 매번 비슷했다. 대부분은 기쁨보다 괴로움이 컸고, 아주 드물게는 기쁨이 우세했는데, 뭐, 기억할 만큼 인상적인 반전은 아니었다. 사람은 든 자리가 아니라 난 자리로 안다고 했던가. 글도 마찬가지인지, 며칠 안 써보면 알게 되었다. 글쓰기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글을 쓰지 않는 나는 별로다. 남들은 몰라도 나는 안다. 글 쓸때만큼 좋은 걸 상상할 줄도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릴 줄도 모르는 글 쓰지 않는 나는, 참 별로다.
그러니 어느 날 문득 내 안에서 끔찍하고 한심하고 돼먹지 못한, 심지어 매번 똑같은 잔소리가 기어나오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 제발 그러지 말자고 비는 마음으로 나는 읽고 쓰기를 반복한다. 그러니 이곳은 내 혼돈의 전시장일 수밖에. 조금이라도 나은 것을 상상해보려는 안간힘일 수밖에. 그 조각들을 함께 읽고 공감해주셔서, 나는 늘 쑥스럽고 부끄럽지만, 한편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행복했다. 100번의 클릭과 눈짓, 가끔은 정성스러운 댓글과 공감으로 나의 혼돈을 함께 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폴 오스터, 김석희, 민승남, 이종인, 황보석 옮김,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열린책들
**이성복, <불화하는 말들>, 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