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상희 Mar 17. 2022

당신은 어떻게 느끼나요?  

캐시 박 홍, <마이너 필링스>


로컬 인생이었다. (부모님의 기억과 사진첩 속의 사진들은) 어릴 때 부모님을 따라 국내 여행은 제법 다녔다고 말해주지만,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그 기억마저도 많지 않다. 중/고등학교 때는 공부하느라 바빴고, 대학에 입학한 후로는 학교에서 놀거나, 먹고 사느라 바빴다. 덕분에 내 삶은 국내 한정 '로컬 인생'이라고 부르기에 무방한 꼴을 갖추게 되었다. 이십 대 중반에 떠났던 첫 혼자 여행지는 경주였고, 불국사와 첨성대, 감포 바닷가와 첨성대 찜질방이 (서울을 떠나) 내가 계획하고 경험하는 첫번째 '외부'가 되었다. 외국에 나가 본 경험도 외국인을 만나 본 경험도 없었다.


그러던 내가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국외를 여행하게 되었는데, 그 명목은 신혼여행이었다. 첫 여행지는 런던이었고,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흑인 부부의 2층 집에서 일주일을 머무를 예정이었다. 저녁 늦게 공항에 내려 짐을 찾고 다시 버스와 기차를 타고 런던 외곽의 숙소에 도착하니 예상보다도 늦은 밤이 되었다. 모두 비슷비슷하게 생긴 집들 사이에서 주소 읽기까지 서툴러 동네를 몇 바퀴째 헤매던 우리는 부부에게 두어 번 전화를 했고, 친절한 주인 부부는 매번 귀찮은 내색 없이 받아주었다. 수능 끝나서 좋은 제일 큰 이유가 수학과 영어를 안해서라는데 격하게 동의하던 남편과 나의 형편 없는 영어 실력 덕분에 숙소에 도착한 시간은 그로부터도 한참이 지난 후였지만.


헐리우드 영화에서나 보던 키가 크고 얼굴이 작은 흑인 아저씨의 커다란 손을 맞잡고 악수를 했다. 아저씨의 안내로 집으로 들어서는데 저 복도 끝에서 한 여자가 반가운 목소리로 다가왔다. 주인 아주머니였다. 어둠 속에서 서서히 그녀의 얼굴이 나타났는데, 어둑한 복도와 아주머니의 피부색이 너무나 흡사해서 얼굴의 형태는 안보이고 눈과 이만 하얗게 보였다. 나를 향해 최대한의 환대를 표현하는 아주머니의 미소는 되려 나를 겁먹게 했다. 조명을 켜 놓은 듯 흰 눈동자와 커다란 이에 놀란 내 마음은 자꾸 불안해졌다. 마음을 가라앉히려 해도 잘 안 됐고, 결국 다음 날 저녁에 나는 위경련을 일으켰다. 우리가 머물기로 한 침실의 침대 위에는 부부가 접었을 게 분명한 서툰 모양의 '(수건으로 만든) 백조'와 웰컴 초콜릿까지 놓여있었지만, 내 긴장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겁먹은 것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생각해왔는데, 글을 쓰는 지금은 의문이 든다. 정말 그랬을까? 그게 가능할까? 나는 그 날 그들에게 상처를 줬던 건 아닐까?)


구토와 경련은 몇 시간 동안 이어졌고, 남편은 주인 부부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병원을 수소문했다. 이번에도, 친절한 부부는 한밤중에 나를 태우고 가장 가까운 종합병원 응급실로 데려가서 접수까지 해주었고, 괜찮다는 우리의 손사래에도 한 시간을 넘게 함께 대기실에서 기다려주었다. 게다가 에어비앤비의 호스트를 하기 위해 여행자를 대상으로 한 의료 보험까지 가입을 해두어서 나는 따로 병원비도 내지 않고 진료를 받았다. 먹은 것도 별로 없이 내내 토하느라 기진맥진해진 나는 아주머니를 두려워하고 자시고 할 여력도 없었는지, 주인 아주머니와 대기실 의자에 바싹 붙어 앉아있는 것도 모자라 아주머니의 어깨에 기대기 일보 직전이었다. 너무 아파서 아주머니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내 이런 간사한 심경의 변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주머니의 새처럼 좁은 턱과 커다란 눈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건 분명 나를 안쓰러워하는 눈, 따뜻한 눈이었다. 무섭지 않았다. 그녀는 드문 드문 괜찮냐고 물었고, 나는 그때마다 고맙다고 대답했다. 내가 세 번쯤 고맙다고 대답했을 때, 아주머니는 "나에게 이 친절을 되갚아주지 않아도 된다. 다만 도움이 필요한 다른 사람에게 되갚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몸을 회복한 나는 주인 부부와 제법 가까워졌다. 우리 부모님 세대쯤 되었던 부부는 하루 종일 런던 여기저기를 헤매고 다니다 돌아오는 우리와의 짧은 수다를 즐거워해주었다. 나는 문법에 맞지 않는 영어에 손짓발짓을 섞어서 우리의 하루를 설명했다. 그러면 부부는 우리가 알아 듣기 쉽도록 간단한 문장으로 천천히 감상을 들려주었고, 때로는 더 나은 차편이나 볼만한 장소들을 소개해주었다. "희, 너가 아프지 않아서 좋아." 그들은 나에게 여러 번 그렇게 말했다. 일주일 후 우리는 부부와 기념 사진을 여러 장 찍고 여러 번의 포옹을 하고 굿바이와 굿럭을, 건강과 즐거운 여정을 빌며 헤어졌다.


나는 바르셀로나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일주일의 시간을 돌아보며, 내가 처음 주인 부부를 만나 긴장하고 두려워했던 이유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그건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이전까지 나는 흑인을 직접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티브이로만 봐왔던 그들의 외모, 목소리, 제스쳐, 향기, 그 모든 것이 나에게는 낯선 것이었고, 그 낯섦이 주는 두려움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던 어떤 '편견'들과 만나서 엄청난 긴장감을 유발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물었다. 그 부부가 '백인'이었다면 내가 위경련까지 겪었을까? 흑인에 대한 고정관념과 선입견이 내 예상보다도 강했던 건 아닐까? 그후로 여행에서 만난 집주인들은 전부 백인이었고, 첫번째 숙소에서 워낙 강렬한 신고식을 치른 후라, 백인들을 만나면 내가 상대적으로 덜 긴장하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두번째 숙소부터는 여행이라는 것에, 외국의 문화와 외국인이라는 존재에 나름으로 적응을 하고 있었으니까.


런던에서의 경험은 잘 잊혀지지 않는다. 때때로 그 때의 감정이나 그 날의 생각들을 떠올리면 부끄러운 기분이 된다. 나는 고작 피부색 하나로도 위경련이 동반되는 사람이라는 것이, 다름에 대해 딱딱하고 경직된 사람이라는 것이 영 못마땅하다. 나에게 이런저런 핑계를 대줄 수도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핑계를 대주고 싶지 않다. 나는 저날의 경험을 통해 내가 '다수'에 속하는 사람인지, '소수'에 속하는 사람인지 늘 묻게 되었다. 나는 지금, 이 상황을 어떤 입장에서 경험하고 있나. 나도 모르는 새 다수 혹은 권력에 가까운 입장이 되어 그걸 휘두르고 있지는 않나. 반대로 나는 내가 소수에 속한다는 걸 인지하지도 못하고, 그러니 당연히 나를 지킬 줄도 모른 채로 살고 있지는 않나. 그런 질문들.




이민 2세대, 한국계 미국인인 그녀의 삶에 내가 이토록 여러 번, 이토록 강렬하게 공감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그 강렬한 공감대 앞에 우선 조심하는 마음이 되었다. 내가 어떤 선을 넘지는 않을까 고민한다. 그러니까, 그녀의 아픔을 내가 아는 나의 어떤 아픔과 견주면서, 몇 가지의 유사점만으로 마치 그녀와 나의 경험이 '동일'하기라도 한 것처럼 느낄까봐 조심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주, 그녀의 삶과 내 삶을 나란히 놓고 싶어하는 나를 경계하면서 이 책을 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으로 보기에는 '여성'이라는 것 말고는 삶의 궤적이 거의 겹치지 않는 두 사람(저자와 나)이 어딘가에서 '만난다'고 느껴졌다. 그건 우리가 이 책의 제목처럼 '마이너 필링스'를 경험해본 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드디어 원하던 뉴욕 생활을 하고 있었다. 신혼이었고 책 하나를 막 탈고한 참이었다. 우울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행복할 때마다 끔찍한 재난에 대한 두려움이 뒤따랐고, 그래서 재난이 닥치는 것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일부러 언짢아지도록 기분을 유도했다"는 그녀의 이야기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진다. 살면서 자신이 납작하게 눌리고, 없는 존재처럼 여겨지고, 혹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상처를 받아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그 경험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몸의 상처는 회복의 기간이 예상되지만, 마음이나 정신의 상처는 회복의 기간을 예상할 수 없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기간이 '영원'이라는 걸 모두가 알기 때문에 아무도 예상하지 않는다. 그건 모양과 종류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똑같이 오래 지속된다. 그래서 끝내 그 상처를 겪은 존재는 교묘하게 변형되고야 만다.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 행복할 때, 노력한 일을 성취했을 때, 완전히 기쁠 수 없다. 그녀의 말처럼 다음의 재난을, 다음의 불행을, 다음의 곤란을 미리 대비한다. 다시는 납작해지고 싶지 않은, 없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은, 상처조차 예측하고 싶어하는 간절한 우울함. 빌리지도 않은 빚을, 당연히 갚을 필요도 없는 이자까지 쳐서 갚아버리려는 마음.


나는 그녀처럼 '내가 나인 것이 불편'할 정도로 온통 '백색'인, 나 말고는 모두가 '하얀' 세상에 던져지지는 않았지만, 나 역시 나이를 먹어가면서 더 넓은 집단에 던져지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끊임 없이 다수에서 소수로, 다시 소수에서 다수로 옮겨지고 분류되는 경험을 해왔다. 때로는 내가 적극적으로 원해서 얻은 자리도 있었고, 때로는 나에게 부여된 여러 권리들이 부담스럽고 부당하다고 느끼기도 했다. 이때 다수와 소수란 단지 숫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소수의 사람들이 특권 의식을 가지고 사회적 자원들을 독점하는 현상 전반을 지칭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이 나타날 때 그들은 수적으로는 소수이지만, 그 권한이나 영향력에서는 마치 다수처럼 기능한다. 그럴 때 다수라는 말에는 더많은 기회, 더많은 권리, 더많은 자유가 포함된다. 그건 때로는 '몰라도 될' 영역, 이 책의 표현을 빌자면 '순수'라는 특권도 포함한다. 다수를 차지하는 이들에게 "순수는 하나의 특권이자 인지 장애, 즉 잘 보호된 무지의 상태이며, 일단 이것이 성인기까지 오래 이어지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로 굳어진다." 그뿐인가. 다수라는 말에는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특권도 부여되는데, 이 또한 아주 간단한 원리다. "뭔가 부당하다고 느끼면, 자기들이 부당함을 당한 것으로 느끼"면 된다.


저 말들이 과연 인종 차별의 문제에서만 통용되는 언어인가? 당신은 누군가가 아주 당연하게 더많은 기회를 얻는 것을, 더많은 권리를 행사하고 더많이 자유로운 것을, 그러면서도 원하지 않는 것은 거의 영원히 몰라도 된다고 당당히 말하는 것을, 본인의 수치심을 더 약한 누군가에게 간편하게 투사하는 것을 본 적이 없나? 나는 저 말들이 모두 너무나 이곳의, 지금의 문제와 연결되는 언어라고 느꼈고, 그래서 아팠다. 내가 얻어냈든, 주어졌든, 어쨌든 조금이라도 '다수'의 입장일 때 나에게는 저런 것들이 순식간에 주어졌었다. 가끔은 그것에 취하는 기분을 느꼈던 적도 있다. 내 성적이 조금 높다는 이유로, 내가 서울에 산다는 이유로, 내가 장애를 가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초고속 엘리베이터에 타고 아주 높은 층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많았다. 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내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내가 어리다는 이유로, 나는 눈깜짝할 새에 낙하산도 없이 자유낙하를 해야했다.


그 혼란이,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 모든 우울이 나 자신이 균질한 존재로 인식되기를 지나치게 바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그래서 내가 모두에게 균질한 존재로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문제는 계속되었는데, 알고 보니 그건 저 초고속 엘리베이터와 낙하산도 없는 고공 낙하의 문제였다. 단지 누군가는 나를 싫어하고 누군가는 나를 좋아하는 일이 아니라, 어떤 나는 아주 위에 있다가 어떤 나는 아주 아래에 있어야 하는 일, 이유 없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가 또 역시, 이유 없이 동정의 대상이 되는 일, 내가 사라졌다가 나타났다가 하는 일, 내가 아주 중요했다가 전혀 중요하지 않아지는 일이었다. 그게 내 개인의 문제가 아님을 자각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고, 내가 단지 높이 있거나 낮게 있는 것만이 아니라 그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건 더 오래 걸렸다. 그건 나 역시 누군가에게 내가 들은 차별의 언어를 되돌려줄지도 모른다는 것. 내가 사라지지 않는 것만큼이나, 다른 누군가를 사라지지 않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 마치 벌새처럼, 너무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은 높이의 허공에 가만히 떠 있기 위해서는 셀 수 없이 많은 날갯짓이 필요하다는 것.




저자는 '소수적 감정(minor feelings)'을 이렇게 설명한다. "본 것, 들은 것이 다 확실한데도, 내 현실을 남에게 폄하당하는 경험을 너무 여러 차례 겪다 보니 화자 스스로 자기 감각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이런 식의 감각 훼손이 피해망상, 수치심, 짜증, 우울이라는 소수적 감정을 초래한다. (중략) 또 소수적 감정은 우리가 까다롭게 굴려고 마음먹을 때 - 다시 말해 솔직하려고 마음먹을 때 - 배어나는 감정이라고 비난받는다. 소수적 감정이 마침내 표출되면 적대, 배은망덕, 시샘, 우울, 공격의 감정으로 해석되며, 백인들이 도가 지나치다고 여기는 인종화된 행태가 그런 정서를 일으키는 원인으로 간주된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구조적 차별은 그들이 착각하는 현실과 들어맞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보기에 우리의 감정은 과잉반응이다."


내가 화가 나는 게 맞는지, 내가 불쾌한 게 맞는지, 내가 싫다고 느끼는 게 맞는지 되묻는 일. 상대의 가해를 곱씹으며 내 감정과 감각에 내가 맞서는 일. 그리고 그 반복된 자기 검열과 의심이 끝내는 적대감이나 수치심, 짜증과 우울로 번져 나를 삼키는 일. 당신은 이런 말을 들을 때 어떻게 느끼는가. 참 답답하고 불편한 사람들의 웅얼거림으로 들리는가? 아니면 나도 겪어본 적 있다고, 살면서 한 번이라도 내가 나를 의심하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다고 공감하는가?


감정이나 감각은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언제나 이성 앞에 존재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이성적인 존재라고 착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감각의 동물일 뿐이다. 내가 나로 사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내 감정과 감각에 열려 있는 것이다. 감정과 감각을 존중하는 것이다. 오해하지 말자. 감정과 감각'대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 역시 감정과 감각을 억누르는 것만큼이나 비뚤어진 방식이다. '내 감정이나 감각이 이런데, 뭐 어쩌라고, 네가 감내해' 라는 건, '그래도 된다'고 배워온 특권층의 화법이 아닌가. 우리가 바라는 건 그런 것이 아니다. 내가 화가 나는 것이, 불쾌한 것이, 싫다고 느끼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임을 받아들이고 싶은 것이다. 자연스러운 감정과 감각의 발화에 자동적인 비난과 의심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 것. 감정과 감각은 의심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 화가 난다면 화가 나는 것, 불쾌하면 불쾌한 것, 싫다면 싫은 것은 누구의 확인이나 허락도 필요치 않은 완결된 선언이라는 것. 그 감정과 감각을 통해 내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할지를 나 스스로 결정하고 싶다는 것.


어떤 사회의 모습은 결국 그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모습 - 가치관이나 윤리 의식 - 을 닮아간다. 개인이 고통 받고 괴로워하는 일이 별 일 아닐 수 없는 이유다. 우리의 일상에 만연한 가스라이팅과 스토킹, 얼굴을 감춘 채 점점 극악해지는 범죄, 혐오와 배제를 부추기거나 외치는 사람들. 직장인의 절반 이상이 우울감과 자존감 저하를 경험하는 현실. 이런 현상은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의 아픔의 목소리를, 차별과 불평등을 용인하고 방관해 온 결과다. '네 아픔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언제나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는 태도로는 아픈 곳을 치유할 수 없다. 누군가의 아픔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나. 아픈 곳보다 더 중요한 곳이 있나. 우리는 시끄럽고 뜨겁게 앓고 있는 중이고, 아픈 것은 창피하거나 부끄러운 게 아니다. 하지만 아픈 곳을 외면하고 끝내 곪아서 터지게 만든다면 그건 창피하고 부끄러운 게 아닐까.


나는 덜 부끄럽고 싶어서 자주 나에게 묻는다. 이 아픔을 어떻게 느끼냐고, 이 아픔을 '누구의 것'이라고 느끼냐고. 그리고 그럴 때마다 런던에 사는 어느 흑인 부부를 떠올린다. 잔뜩 긴장한채로 자신의 집으로 신혼여행을 왔던, 결국 한밤중에 응급실에 실려가고 말았던 그 서툴고 딱딱한 여자를 그들은 기억할런지. 나는 응급실에서 당신이 내게 건넨 말도 잊지 않고 있다. 그날보다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있다면, 그건 당신의 편견 없는 친절과 그 말 덕분일 것이다. "당신이 받은 친절을, 그것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게 꼭 돌려주라"던 그 말 말이다. 그리고 정말로, 우리에게는 편견 없는 친절이 간절하다. 아픔과 반목을 넘어설 따뜻한 목소리가 간절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함께 계단을 오르는 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