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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희 Jul 28. 2022

두더지 사냥꾼이 두더지에게,

마크 헤이머, <두더지 잡기>


나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지만, 내가 자란 동네는 서울 외곽에 위치해서 개발이 많이 진행된 곳은 아니었다. 덕분에 나는 늘 자연에서 놀았다. 산과 계곡을 뛰어다니고(초등학교 자연 수업에서 가재를 잡아 오라는 과제가 있었을 정도),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좋아하실 만한 산 중턱의 약수터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놀이터였다. 오빠와 함께 소쿠리에 줄을 길게 매달아 참새를 잡겠다며 한나절을 벌판에 누워 참새를 기다리기도 했고(말이 되나, 참새가 우릴 잡겠다), 들장미 소녀 린처럼(죄송) 꽃을 따러 다니기도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조금만 방향을 틀면 동네 약수터로 향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때의 나에게는 '키즈 카페'나 'PC방'을 찾아다니지 않아도 언제나 놀 곳이 그득했다. 그렇다고 내가 자연과 아주 가까웠나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도 않았다. 나는 꽃의 이름도, 곤충이나 물고기, 동물들의 이름도 잘 몰랐고, 특히 벌레에 대해서라면 질색했으니까. 벌레들은 나를 좋아한다. 내 팔이나 다리를 물어서 피를 빠는 건 더 좋아하고. 자연은 나에게 그저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곳에 늘 있는 것이었다. 가끔은 재미있고 또 가끔은 징그러운 것이었다.


그런데도 내 안에는 막연히 자연은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아름답고 부드러운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푸른 나무와 숲을, 너른 산을, 맑다 못해 투명하게 흐르는 개울을 볼 때 내 마음이 좋았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머리가 크고 난 후에 본 자연의 얼굴은 내가 어릴 때 상상하던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자연은 가차 없는 것이기도 했고, 잔인한 것이기도 했다. 인간의 사정 따위는 봐주지 않는 폭우나 홍수를 볼 때, 먹고 먹히는 먹이 사슬을 볼 때, 꽃이 떨어지고 열매가 달리는 것을 볼 때 나는 서서히 두려운 마음을 품게 되었다. 나는 자연을 좋아하고 두려워한다.



"자연은 친절하지 않아

늙은 오소리는 이빨을 잃고 천천히 굶어 죽어 가는데

녀석이 축 늘어져 누워 몇 번의 마지막 숨을 쉬는 동안

쥐들은 오소리의 부드러운 부위를 조금씩 물어뜯지

나는 엉덩이에 기운이 다 빠진 채

헐벗은 나무 아래 얼어 죽어 있는

늙은 여우를 본 적이 있고

일어서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까마귀들에게 눈을 쪼인

갓 태어난 양을 본 적도 있어

근처에 쪼그리고 앉아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봤지

살이 광채를 잃고 난 후의

뼈를 본 적도 있네"



내가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연은 자연히 나에게서 먼 곳이 되었다. 학교는 나름으로 나에게 의미 있는 공간이었고 내가 좋아하는 공간이었지만, 자연과는 거리가 멀었다. 학교는 시멘트로 둘러싸인 닫힌 공간이었고 책상과 의자에 남아 있는 것은 나무의 흔적 정도였다. 그마저도 학년이 올라갈수록 합성수지와 스테인레스 스틸로 바뀌었다. 내가 느끼는 자연이라고는 학교 화단에 심어진 몇 송이의 꽃들과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버스를 기다리며 듣는 바람 소리, 여름의 매미 소리가 거의 전부였다. 그렇게 대학에 진학했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도 뒷산이 있었지만(학교에는 늘 뒷산이라는 게 있다), 대학생에게 등산은 너무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대부분의 스무 살은 산보다는 도시의 한가운데에 있기를 원한다.


그렇게 자연과 멀어졌다는 것도 잊은 채로 흘러 다니던 스무 살의 어느 날 우연히 보게 된 인터넷 사주 풀이였던가, 내 사주가 '농부의 사주'라며 해석하자면 하늘이 곧 내 집 지붕이요, 땅이 내 집 바닥이라고 했다. 이거 이거 '노숙자'라고 하면 미안하니까 돌려 말한 거 아니냐며, 스무 살 꽃다운 대학생한테 참 너무 한다고 툴툴거렸다. 말은 그랬지만 또 한편으로는 저 표현이 참 좋았다. 하늘과 땅이 모두 내 집이라면 나는 얼마나 자유로운 사람인가. 나는 하늘도 땅도 모두 내 집으로 삼는 삶을 상상해보았고, 그날 불쑥 나는 다시 자연이 좋았다. 하지만 돌아서면 나는 누구보다도 자연과는 거리가 먼 도시의 삶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나는 어떤 삶을 원하는 걸까. 그즈음의 나는 자주 궁금했지만, 묻지는 못한 채로 막막해하고 있었다. 궁금한 것에 대해 질문을 가지는 일은 얼마나 귀한가. 궁금하고 답답하지만, 막상 내가 무엇을 물어야 할지는 잘 모르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이십 대는 그런 나이가 아닐까.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그 삶에서 나는 어떤 일을 하면 좋겠는가. 그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걸, 내가 어떤 가치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인지, 어떤 것은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인지 물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많이 다치고 넘어진 뒤였다. 그 많은 상처를 통해 나는 어렴풋이 깨닫는 것이다. 나는 궁금했구나, 내가 이 별에 와서 무엇을 하는 중인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 인생을 관통하는 딜레마를 깨닫기도 한다. 나는 자유로운 것을 추구하지만 계획되지 않은 것을 두려워한다. 내 마음은 자유를 갈망하지만 내 몸은 정량화된 기계를 선호한다. 내가 수치화되고 계획된 것들에 만족할 때 내 마음에는 불만이 쌓이고 내가 '세부 사항' 같은 말을 놓아버리고, 그저 큰 흐름에 나를 맡기며 자유로워질 때 내 몸은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아, 이건 마치 외로움을 많이 타지만 혼자 있기를 즐겨하거나 내 마음을 나누고 싶지만 내 마음을 말하기는 싫은, 그러니까 두더지 사냥꾼이면서 두더지를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곤란한 일이 아닌가. 이것은 모순. 양립하기 힘든 일. 그래서 때때로 나를 괴롭히기도 하는 일.


내 안에 자리한 그런 모순을 깨닫는 순간 인간은 세상과 조금 화해하기도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이 얼마나 도달하기 어려운 것이었는지를 알게 되면서 마음이 넓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힘든 건 모두 다 남 탓 세상 탓인 줄 알았는데, 실은 내가 욕심이 많았던 거구나, 혹은 양립하기 어려운 길을 가려는 내 마음을 꼭 누군가에게 설득할 필요는 없는 거구나 알게 된다. 나를 밀어내기만 하는 것 같았던 누군가의 뒤통수와 세상의 뒷모습에서 내가 가진 것과 비슷한 슬픔을 알아보게 된다.


그런데도 여전히 내가 가진 딜레마는 해소되지 않는다. 나는 대체 뭘 어쩌고 싶은 걸까. 자유롭게 계획적이고 싶다고? 계획하되 자유롭게, 그 일이 능히 그렇게 되어가는 방향으로 계획하고 싶다고? 그래서 억지로 해치워버리는 느낌이 들지 않게 하고 싶다고?  그러니까 그건 네 손에 달린 일과 네 손에 달리지 않은 일이 정확히 반반 섞여 있는 거잖아. 정신 좀 차리자. 알면서 왜 그러니. 나는 왜 이렇게 생겨먹었을까. 이십 대 때 나에게 많이 물어봐주질 못해서 비뚤어진 건가.




이 책의 저자라면 나의 이런 딜레마를 이해해주지 않을까. 그는 어린 시절, 자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아버지를 떠나 노숙자로 살았다. 그는 걸을 수 없을 때까지 걸었고, 그런 다음에는 아무 데서나 쓰러져 잤다. 히피들과 어울리며 몇 주를 버티기도 했고, 죽지 않으려고 먼 친척을 찾아가 그들을 가까운 친척으로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사랑하는 이를 만나 "평생 일하고, 가족을 꾸리고, 집을 찾아내고 나니, 여느 노동자 계급 사람처럼" 느껴진다고 말할 만큼 안정적으로 살아왔다. 이제 나이 든 그는 자식들을 모두 출가시키고 사랑하는 아내와의 아늑한 노년을 맞이하는 중이다. 그렇다. 노숙자의 삶에서 평범한 노동자의 삶으로, 그의 삶은 정반대에 있는 두 갈래 길을 모두 걷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어디 그뿐인가. 그가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준 직업은 다름 아닌 '두더지 사냥꾼'이다. 그는 정원의 골칫거리인 두더지를 찾아 잡아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다. 그런데 그는 두더지를 사냥하는 동시에 두더지를 사랑한다(!). 그는 오래도록 두더지에 대해 궁금해하고 두더지에 대해 연구해왔다. 그는 두더지 사냥꾼이지만 두더지 사랑꾼이기도 하다. 다시 모순. 그는 양립하기 힘든 길을 또 걷는다.


"단순하면서도 아마 명백한 사실일 텐데, 그것은 거의 참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동시에 그만큼 참을 수 없이 외롭게 느껴졌다. 그 밤은 내게 이 두 감정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의 감정이 압도적이면서도 견딜 수 없는 것인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극복해낸 것이 될 수도 있듯이."


펜들 힐 근방의 돌담 밑에서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밤새 맞던 날 그가 느꼈던 아름답고 외로운, 일견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감정이 동시에 느껴지던 것을 경험한 후로 그는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갈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부패에서 성장의 시작을 보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내가 세상을 보기로 한 방법이기 때문이고, (중략) 나는 정원사이며 그것을 매일 목격하기 때문"이라고. 그가 모든 '모순되는 길'을 일부러 걸어가보기로 마음먹지는 않았겠지만, 그는 분명 그런 것들을 매일 '목격하고' 있는 모양이다. 바로 자연 속에서 말이다.




우리는 인간들 사이의 삶에 지칠 때면 '자연'에 찾아가 눈과 귀를, 몸과 마음을 쉬게 해주려고 계획한다. 그럴 때 우리는 자연에 우리의 슬픔과 아픔을, 인간이라는 이유로 만들어낸 온갖 부조리와 처참함을 받아달라고 떼쓴다. 그리고 정말 신비롭게도 자연은 자주 그런 것들을 꿀꺽하고 삼켜주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인간이 그렇게 느낀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을 달리하면 알 수 있다. "자연은 우리의 안전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의 작은 근심과 걱정 따위, 자연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자연에서 배울 수 있는 건, "그것이 늘 하던 대로 행동할 거라고 믿으며, 그것이 위험할 거라고 예상"할 수 있는 일뿐이라는 것. 우리는 그 속에서 생존하는 법을 배우고, 그것과 사랑에 빠질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을 뿐이라고.


자연 안에서 우리가 고요해지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질서보다 훨씬 크고 강력한 질서 앞에 서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더 큰 소리 앞에서 그보다 작은 소리는 언제나 속수무책으로 묻혀 버리고 마는 법. 인간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모순 따위, 자연 앞에서는 그저 우스운 걱정이 된다. "이성은 세상을 경험하는 여러 중요한 방식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그는 들려주고 보여준다. "존재들은 망가진다. 존재들은 상처 입는다. 상처는 치유되지만, 그 상처들은 때로 찌릿찌릿 쑤신다"고, "우리가 이 땅에서 내딛는 모든 작은 걸음 하나하나에는 결과가 뒤따른다"고. 살아 있는 그 어떤 것도 완벽한 대칭을 이룰 수는 없는 법인데, 나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멀쩡한 나뭇가지를 잘라 달라고 말하는 사람을 보라고. "우리는 모두 여행자"이며, "변화는 항상 찾아오는 것이고, 그것은 자신이 왔다며 큰 소리로 알리지 않는다"는 것을. "훼손은 존재의 흐름의 일부"이지만, "내 삶은 서두르며 보내기에는 너무 짧"고, 우리는 "오직 한 번에 한 걸음씩만" 걸을 수 있다는 것을.


저런, 안타깝게도 나는 그의 아름다운 글 속에서 나의 예상보다도 훨씬 광폭한 자연, 나의 예상보다도 많이 무관심한 자연, 나의 예상보다도 더 잔인하고 가차 없는 자연의 얼굴을 본다. 내가 과거의 어느 날 무심코 마주치고 또 잊었던 자연의 그 낯선 얼굴을 본다. 인간이 두려워서, 인간으로 사는 게 부끄러워서 자연으로 달아나려던 나는 앗, 뜨거워! 하면서 새삼 깨닫는다. 자연의 모순됨과 무자비함을.


그래, 그럼 삶에 대해서라면 어떨까? 그는 복잡하고 힘든 삶을 살아왔으니 뭔가를 말해줄 거야. 어리석은 나는 그런 답은 없다는 걸 이제는 알 것 같으면서도 자꾸 묻는다. 그는 말한다. "삶은 신비로 넘쳐나고, 그에 대한 대답들은 아주 적"다는 것을. 내 그럴 줄 알았다.


"나는 대답이 되지 않은 질문들을 더 좋아한다. 대답들의 끝에는 보통 아는 것처럼 보이는 데서 나오는 힘을 즐기는 사람이 있다. 나는 완성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것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빛을 내는 것, 무언가를 찾는 것은 질문이다. 대답이란 종종 질문의 거대함에 비친 흐릿한 영상에 불과하다. 만족스런 대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모순되는 두 가지 길을 오래 걸어온 경험을 통해 이렇게 덧붙인다.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그 문제가 더 이상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중략) 나는 숨겨진 것들을 찾는 데 지쳤다. 진정 중요한 것들은 실은 모두 저곳에, 그냥 가질 수 있게, 땅 위에 놓여 있다. 내가 들고서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조각들처럼. 숨겨진 것들은 숨겨진 그 자리에 그냥 그대로 남아 있어도 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의 진실 또한 숨겨져 있으며, 일상의 어떠한 가치로 받아들여지기에는 그 진실이 너무도 모호하고 불가해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고작 답도 아닌 질문이나 가진 것이 불만이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나는 내가 평생을 두고 궁금해할 것에 대한 질문을 가졌다. 어쩌면 영원히 답을 주지 않을 질문을. 그 질문은 단지 질문만은 아니다. 그 질문은 힘든 날 나를 위로해주는 친구이고, 갈팡질팡하는 나를 멈춰 세우고 심호흡하라고, 부디 신중하라고 깨워주는 선생님이다. 갈림길에서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알려주는 방향지시등이고, 이 사막과도 같은 삶의 여정을 함께 해주는 튼튼한 신발이다. 나는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삶을 바라고 어떻게 살아가길 꿈꾸는지 물을 때마다 새로운 내가 된다. 그것은 답을 위한 질문이 아니었다. 그 질문에 쓰인 단어들도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 질문이 나에게 들려주는 말, 그것은 다시 살아가라는 것이었고, 바로 그게 중요한 것이었다.


나는 여전히 자연으로 돌아가서 모든 걸 '내려놓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이제는 적어도 자연이 내 삶보다 덜 치열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곳을 지키는 지엄한 질서가 있다는 걸 인정한다. 나 역시 그 커다란 질서 안에 존재한다는 걸 받아들인다. 자연은 자신을 내려놓은 적이 없다. 그저 할 일을 할 뿐이다.


그렇게 내가 자연을 한 바퀴 돌고 돌아 다시 나의 자리로 돌아오면, 내 눈에는 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그건 작가의 표현대로라면 "세상이 돌아가게 하는 작은 존재들"이고, "우리를 우리의 자리로 인도하는, 우리가 걷는 걸음들"이다. "그 어떤 것도 완전하지 않고, 그 어떤 것도 완벽하지 않으며, 그 어떤 것도 끝나는 법이 없다"는 그의 말을 이해한다. 정말 그렇다. 나는 다시, 다시, 나의 질문을 살아내기로 한다. 나의 질문과 의문이 비추는 곳으로 또 한 걸음, 또 한 걸음. 걷다 보니 질문은 이미 잊었고, 답은 알 수 없다. 남은 건 내가 걸어온 길과 그 길을 걸어온 나 자신뿐. 내 곁에서 함께 걸어가는 이들의 발자국과 온기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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