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돈,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얼마 전에 종영한 JTBC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는 염창희라는 인물이 나온다. 그는 말이 많다. 짜증도 많다. 때때로 그는 짜증스러운 말을 쉴 새 없이 내뱉는다. 불만도 많고 안 맞는 건 안 맞는다고 꼭 짚고 넘어가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염창희의 회사 옆자리에는 염창희 왈 '다말증'인 회사 선배가 있다. 그녀도 말이 많다. 짜증도 많다. 짜증스러운 말을 쉴 새 없이 내뱉는다. 불만도 많고 안 맞는 건 안 맞는다고 꼭 짚고 넘어가야 직성이 풀린다.
드라마 초반에 염창희는 회사 동기와 점심을 먹으며 예의 그 '다말증' 선배에 대해 짜증 섞인 푸념을 늘어놓던 중, 자신도 '다말증'이 아닐까, 의심하고 각성하는 순간을 맞는다. 창희는 동기에게 자신이 다말증이 되어가는 것 같으면 꼭 얘기해달라, 욕을 해도 좋으니 그냥 넘어가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 그렇게 자신이 다말증일지도 모른다고 회의해 본 창희는 다시 투덜거리기 시작한다.
염창희의 투덜거림과 다말증인 회사 선배의 말은 분명 다르다. 아마 드라마를 본 사람이라면 두 사람이 분명히 '다르다'는데 동의할 것이다. 심지어 거의 신드롬적인 인기를 얻은 구씨보다도 염창희가 더 좋다는 사람들이 많았을 정도로 염창희는 매력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막상 염창희의 투덜거림과 다말증이 어디가 어떻게 다른지, 둘 사이에 정확히 어떤 차이가 있는지 설명하라면 그건 좀 어려울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창희가 그랬듯이, 다말증 선배를 싫어하는 건 혹시 동족 혐오였나, 하는 의심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왜 창희의 투덜거림은 속 깊은 이의 애교로 듣고, 회사 선배의 말은 무례함으로 들었나.
투덜거리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런데도 투덜거림을 듣는 일이든, 그 자신이 투덜거리는 일이든, 아무튼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자기 내면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행위'의 의미와 가치, 방식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자. 정지돈의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어떤가, 제목부터 느낌이 오지 않나. 그는 베테랑 투덜이다.
한 번 더 곱씹으며 생각하게 만드는 제목 아래에는 '서울과 파리를 걸으며 생각한 것들'이라는 부제가 달렸다. 읽어보니 정말 그렇다. 그가 서울과 파리의 거리를 걸으며 투덜거리는 내용이 이 책의 전부다. 하지만 그의 투덜거림은 분명 다말증이 아니다. 나는 그 차이를 분명히 알겠다. 이번에야말로 다말증과 투덜이의 차이를 밝혀내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1.
헷갈릴 수 있다. 투덜이들은 상대가 진심으로 듣고 있건 그렇지 않건 그다지 괘념치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그들의 말하기를 대상 없는 혼잣말하기로 오해할 수도 있고, 나아가 대상의 반응과 상관없는 자기충족적 말하기라고 생각하기도 쉽다. (물론 둘 다 조금씩은 포함된다) 하지만 투덜이들의 저런 태도는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다. '관심 없는 이야기를 들어줘야 하는 부담'을 본인도 끔찍하게 싫어하기 때문에 투덜이들은 상대에게 관심을 강요하지 않는다. 내가 지껄이고 있지만, 당신은 안 들리는 척을 해도 괜찮다는 사인을 자주 상대에게 보낸다. 하지만 다말증은 다르다. 그들은 상대가 해야 할 역할을 분명히 정해두고 있다. 칭찬과 찬양(?). 이미 상대의 반응을 정해놓았기 때문에 상대의 반응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일 뿐, 실제로 그들은 상대의 반응에 굉장히 예민하면서도 상대의 자유는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다. 만약 상대가 자신이 원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투덜이는 그 반응을 흥미로워하며 적립해두었던 다른 화제들을 꺼내 좀 더 본격적인 대화가 가능한지 타진해볼 테고, 다말증은 당신에게 불쾌함을 드러낼 것이다. 너 왜 내가 원하는대로 반응하지 않니? 그래서 다말증은 자신보다 힘이 없는, 사회적으로 더 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을 대할 때 더 자주 발병한다.
2.
창희는 말을 잘한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창희의 말 안에는 '사유'가 있다. 꼭 그 말에 동의하거나 반대하거나 하는 입장을 갖지 않더라도 들어볼 만하다. '음,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는군.' 가끔은 엉뚱하고 기발한 데도 있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하지?' 창희의 말은 그 자체로 상대의 마음을 움직인다. 자기 생각을 말하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특정한 기준에서의 옳고 그름을 가린다면야 창희의 말도 자주 틀리겠지. 오류도 있을 테고. 우리의 생각과 말이 가진 한계가 그거니까, 오케이,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다말증의 말에는 '사유'가 없다. 논리나 사유의 자리에는 자신의 안위와 이익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가끔 다말증의 말이 사유를 가진 것처럼, 나아가 힘이 센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맹목적인 이익 추구라는 건 예상보다도 훨씬 강한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안위와 이익이 전부이기 때문에 그걸 위해서는 못 하는 말이 없고, 그 강력한 에너지가 자칫 논리나 힘으로 비칠 수 있다. 그들과 오래 이야기하면 '기가 빨리는' 기분이 드는 게 그래서다. 사유는 없고 이익만 있는 말. 타당한 논리는 없고 자신의 안위만 있는 말. 그렇기 때문에 더욱 사유가 있는 것처럼, 논리적인 것처럼 보이려는 말.
3.
나는 인간에 대해 높은 기대치를 가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자신에게 요구할 수 있는 정도를 가늠해보면 알 수 있지 않나. 인간이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그저 이런 생각을 할 뿐이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하라고 하지만 않아도 이 사회는 얼마나 살기가 좋아질까. 그런데 다말증인 사람들 대부분이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당연히 남이 대신 해줬으면' 하고 바란다. 드라마에서 창희가 결국 폭발하는 장면이 있다. 다말증 선배는 창희에게 점심시간에 붐비는 식당에 가서 본인 대신 줄을 서 줄 것을 은근히 내비치는 말을 한다. 창희는 버럭 화를 내고 다말증 선배는 물론 발뺌한다.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느냐'고. 다말증은 수동공격을 주로 사용한다. 수동공격을 나의 언어로 해석하자면, '자기 손에는 피를 묻히지 않고 누군가를 혼내거나 욕해주고 싶은 마음, 혹은 타인을 이용해 자신의 이득을 취하려는 마음'인데 이 방식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구조를 갖는다. 만약 내가 누군가를 싫어하면 그를 싫어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에 대한 일말의 불편함이나 자괴감 등의 반대급부가 발생하기 마련이고, 남이 나를 대신해 무언가를 해결해준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거나 적어도 고마워해야 한다. 하지만 다말증은 맘껏 싫어만 하고, 양껏 이익만 얻고 싶지 이 반대급부는 겪기 싫기 때문에 회피한다. 그런 그들이 택한 최선의 방법이 수동공격인 셈이다. 그들은 자주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렇게 말한 적 없는데. 너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어. 뭐 안 좋은 일 있어?' 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은 한 인터뷰에서 수동공격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도 늘 그 말들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들이 겉으로 내뱉은 말에 대해서만 반응한다. 그건 매우 힘든 일이다."
4.
위의 세 가지를 종합하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투덜이들의 말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진다. 무엇을 덮거나 포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불평과 불만을, 내 감정과 호불호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문장들 하나하나가 꼭 필요하고 제 역할을 한다. 그건 그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다. 상대가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다 알아주거나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자신이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말증은 본래의 목적을 숨긴 채로 그 목적이 달성되기를 원하기 때문에(큰 목적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들의 말은 허망하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아무 의미가 없다. 대신 그들의 말은 마치 야바위꾼의 손놀림처럼 현란한데 그건 '눈속임'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감춰야 하는 게 클수록 그들의 말은 더 많아지고 더 현란해진다. 그들이 내뱉는 말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때론 숨겨진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다 보면 어느새 다말증이 원하는 것을 '대신' 실현해주려 애쓰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는 사이 주사위는 다른 컵 속으로 도망간 지 오래다.
5.
시몬 베유는 "선은 인간과 사물에 보다 많은 실재성을 부여하고, 악은 그 실재성을 제거한다."고 했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시간 동안 내가 좀 더 분명해지는 느낌, 나의 실재성이 더 자주 감각되는 느낌이 선에 가깝다고 전제할 수 있다면 투덜이와 다말증을 구별하기에도 조금은 수월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말도 했지. "누구도 자신의 의지로 악인이 되지 않는다." 투덜이와 다말증이 아주 멀리 있는 것처럼, 또한 나 역시 그 둘 사이의 어디쯤에서 아주 안전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일은 쉽다. 사실은 물론, 그렇지 않다. 선과 악은 늘 어떤 방향성을 의미할 뿐이다. 어디까지는 확실히 선이고, 어디부터는 확실히 악이라는 명확한 구분은 없으며, 단지 편리를 위해 마치 그런 것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할 뿐이다. 심지어 선이란 언제나 악보다 더 모호하다. 선은 상대와 상황에 따라 각각 다른 얼굴을 가진다. 맞추기 어렵고 추구하기 복잡하다. 때로는 어제의 선이, 오늘도 반드시 선이리라는 보장도 없다. 까다롭다. 그러니 언제나 선에 가까워지는 일보다 악에 가까워지는 일이 손쉽다. 악은 언제나 일관되고, 대부분 확실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악에는 빠질 수 있어도 "선에는 빠지지 않는" 이유다. 그러니 선한 인간이 되고 싶다는 건, 저 복잡하고 까다로운 것을 아끼고 사랑하겠다고 마음 먹는 일이고, 그건 순간의 선택으로 영원히 선함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탐구와 고민의 자세를 유지해야 하는 훈련에 가깝다. 매번의 선택마다 선의 방향으로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일, 내가 선이 아닐 수 있음을 두려워하고, 지금 내가 디딘 발걸음이 악의 경계를 넘어선 것은 아닌지, 악의 손을 들어준 것은 아닌지 자주 경계하고 돌아보는 일을 해나가겠다는 말일 것이다.
6.
그리고 그녀는 덧붙였다. "계속해서 나쁜 것만 상상하는 것은 일종의 비겁함이다. 실재 하지 않는 것을 통해 기쁨을 느끼고 알고 성장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래, 다말증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이제 그만 멈추자. 여기까지. 그것과 나 사이에 넓고 굵은 선을 긋고 그것에 대해 오래 말하는 동안 내가 얻었던 모종의 만족감과 카타르시스를 내려놓고 다시.
작가는 전혀 원하지 않았을 것 같은 투덜이와 다말증의 비교 분석을 끝냈다. 내 주변에는 투덜이가 많다. 나 역시 불만이 없는 편은 아니지만 겉으로 드러내서 말할 만큼 용기가 있지는 못하다. 이런 나를 두고 마치 '투덜거림은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듯 겉으로 소리내 투덜대는 사람들이 나를 좋아한다. 자신들의 말을 이해하는 동시에 말할 기회를 많이 허용하기 때문이려나. 물론 나도 그들이 좋다. 내 몫까지 실컷 투덜거려 주기 때문일까. 그래서 우리는 대체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일어난 모든 일은 우리가 너무 진심이었기 때문에 일어난 걸지도 모른다. 진심은 언제나 내가 더 진심이다, 라는 반발을 불러온다. 우리의 행위 내부에 당신들보다 더 진짜 문학을 하고 있다, 라는 의식이 가득했고 이러한 뉘앙스가 충돌을 일으킨 건 아닐까. 우리는 미학으로 부딪친다고 생각했지만 그리고 물론 미학으로 부딪치기도 했지만, 결국 남은 것은 미학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진정성 제로섬게임이었다. 진정성은 자유주의 같은 거라서 결국 문제는 윤리와 경제, 두 차원으로 환원된다. 쉽게 말하면 누가 더 착한가(진짠가) 그리고 누가 더 돈을 잘 버나(많이 사랑받나). 그러므로 궁극적인 의미에서의 논의는 불가능해진다."
나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말한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글을 쓰기 싫어하는 것 같다, 문학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다, 장난스럽다, 냉소적이다라고 말한다. 어떻게 그런 오해를 할 수 있을까. 나는 지금도 의문이지만 그렇다고 오해를 풀기 위해 문학에 대한 진정성을 뽐내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내 경험상 투덜거리는 사람들은 자신이 투덜거리는 면에 대해서는 꽤 진심인 편이다. 그들이 자신의 감정을 약간 모로 꼬아 표현하게 된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아니면 그저 자기방어적인 태도인 건지, 단지 쑥스러움 때문인 건지, 나는 그런 분석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그들은 그런 오해를 감수하고 자기의 말하기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는 그 방식까지가 그들의 생각이라는 것. 그들의 말과 행동은 그럴 때 하나로 통한다는 것.
또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그것에 대해 할 말이 없다는 설명도 덧붙일 수 있겠다. 우리는 묵묵히,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별로 없이,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주지 않는, 더 정확하게는 '신경 쓰이게 하지 않는' 태도를 칭송하지만, 사실 뭔가를 해본 우리는 알고 있다. 행위를 한다는 건 필연적으로 불만을 내포한다. 행위는 불평과 불만이 포함된 말이라는 데 공감한다. 해보면 할 말이 생긴다. 열심히 하면 더 많은 할 말이 생긴다. 그리고 그건 대부분 '안 좋은 것' '변화시키고 싶은 것'에 관한 말이다.
"저항은 특정한 대상이나 시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는 매 순간 우리의 본성에 저항해야 한다. 가장 가까운 대상이나 친구들에게 저항해야 할 지도 모르고 믿어왔던 것에 저항해야 할지도 모른다. 차별과 혐오는 예외적인 행위가 아닌 일상적인 상태에 가깝다. 그러므로 저항 역시 그래야 한다. 저항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가져야 할 상태다."
나는 이미 작가를 대왕 투덜이 정도로 인식해버려서, 그가 저런 멋진 문장을 써도 왠지 사이즈 업 된 투덜이 스머프나 떠올리게 되지만, 그 투덜이들의 투덜거림은 곧 일상에의 저항이다. 그들의 말은 자신을 밀어 올리는 힘이고, 때로는 주변을 깨우는 소나기다. 그들은 투덜거림을 통해 저항하고, 자기 내면을 부수고 다시 쌓는다. 그런 과정을 별일 아니라는 듯 소리 내서 투덜거린다. 그들의 투덜거림이 가끔은 통쾌하기도 한 이유다. 그들은 모두가 한 가지 길에 빠져들 때, 뒤에서 궁시렁 거리며 저 옆에 샛길도 좋다고 나는 거기로 갈 건데 너도 가보지 않겠냐고 제안하는 종류의 인간이다.
"에라스뮈스-분위기는 특정한 목적이나 주장, 대의에서 자유로워도 된다는 아이디어다. 어느 쪽 편을 들지 않아도 괜찮다는 태도이며 단지 지식의 즐거움과 삶의 기쁨에 헌신해도 된다는 해방감이다. 누군가는 이를 방관이나 비겁함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해서는 세상이 변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에라스뮈스는 부당한 권력 앞에 한 번도 방관자였던 적이 없으며 종교개혁의 큰 공헌자 중 한 사람이었다. 다만 그가 믿었던 대의가 삶이었던 것뿐이다. “그는 할말을 다 했으면 무대를 떠나도 좋”다고 생각하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무대보다 더 중요한 건 무대 아래의 삶이다."
그리고, 그들은 투덜거리되 쉬이 포기하지 않는다. 투덜거림 자체가 이미 그 일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창희는 "차가 없으면 어디서 키스를 하냐"고 아버지를 곤란하게 만들지만, 갑자기 아내를 잃은 아버지에게 "아버지, 우리는 더 화목해질 겁니다"라고도 말하는 사람이다. 창희에게 두 가지는 같은 말일 테다. "당신에게 내 마음을 설명할게요." 그 말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이고,
나는 이 책을 덮으며 작가 역시 여전히 세상을 사람을 문학을 많이 사랑하고 있음을 인정한다. 그의 투덜거림이 이 촘촘하고 흥미롭고 아름다운 책을 쓰게 하지 않았나. 역시, 사랑하다 지칠 때는 투덜거리는 게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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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베유, 윤진 옮김, <중력과 은총>, 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