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상희 Aug 04. 2022

그가 가리키는 곳에

김완, <죽은 자의 집청소>


어떤 기억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계속 그 모양과 의미를 바꿔가며 제 쓰임을 다한다. 나에게도 그런 기억들이 몇 있고, 그중에는 누군가를 영영 잃어버리던 날들에 대한 것도 있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던 어느 추운 겨울날, 좀처럼 걸려 오는 법이 없던 엄마를 찾는 전화가 걸려 왔었다. 엄마는 그 전화를 건네받고 내내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전화는 외할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전화였고, 그날, 그 전화를 받은 후로 엄마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다음 날 학교에 갔다 돌아오니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집이 이상하게 텅 빈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할머니는 오빠와 나에게 두꺼운 외투를 입혀서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병원 복도에는 얼굴이 희다 못해 허예진 엄마가 있었다. 저 먼 복도 끝에서 쭈뼛쭈뼛 걸어오는 우리를 보고 엄마는 쏟아지는 눈물을 삼키는 얼굴이었다. 엄마는 나와 오빠의 머리를 한참 쓰다듬고, 중환자실 문을 바라보고, 다시 우리의 머리를 쓰다듬고, 그 문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엄마를 보고 온 뒤 며칠이 되지 않아 외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엄마는 흰옷을 입고 그 옷보다 더 흰 얼굴이 되어 울었다. 아니, 며칠을 내내 울지도 못하고 있다가 할아버지가 땅으로 되돌아가시던 그날에 끝내 울음을 토했다. 엄마는 할아버지의 관 위로 흙을 한 삽 떠서 덮어드리라는 말에 갑자기 땅에 엎드려 돌을 고르기 시작했다. 아빠가 누워계신 곳 위로 돌멩이가 던져지는 게 싫다면서 손이 흙투성이가 되도록 돌을 고르며 울었다.


발이 시리다, 춥다, 그런 생각을 하던 나는, 엄마가 정신없이 흙에서 돌을 골라내는 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눈물이 났다. 엄마는 땅이 차갑다고 울었다. 삽이 잘 들어가지 않을 만큼 땅이 얼었다고 울었다. 우리 아빠가 저 차가운 데 묻히는 게 싫다고, 엄마는 몸을 비틀고 가슴을 치며 울었다. 엄마가 그토록 처절하게 우는 걸, 엄마가 그렇게 큰 목소리로 말하는 걸 처음 보았기 때문에 나는 놀랐고, 그 놀람은 곧 슬픔으로 바뀌었다. 엄마의 슬픔을 잘 모르는데도, 이해하지 못하는데도, 엄마의 슬픔은 나에게 전해졌다. 나는 그날 감정은 마치 피부에 닿는 감각처럼 전해지기도 한다는 걸 알았다. 엄마의 눈물이 외할아버지의 상실을 실감하게 했다.


장례를 치르고 집으로 돌아온 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나는 자세히 기억하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그때 엄마의 얼굴을 떠올려보려 노력해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어떤 단편적인 장면들이 기억에 남아 있다. 원래도 외로움이 많았던 엄마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는 정말로 혼자가 된 것처럼 보였다는 것. 엄마 마음속의 외로움이 말하지 않아도 나에게 전해졌다는 것. 그것 역시 설명 없이도 피부 깊숙한 곳에 와 닿는 감각이었다는 것. 또 하나, 외할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러 다녀오던 엄마의 얼굴 같은 것.


그리고 내 기억은 또 점프. 엄마가 어떻게 상실을 건너왔는지 나는 잘 모른다. 엄마는 가끔 멍한 채로 생각에 잠겨 있었지만, 그마저도 뜸해졌고, 곧 평소의 엄마로 돌아왔던 것 같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언제나처럼 따뜻한 아침밥을 만들어주고, 학교에 잘 다녀오라고 등을 두드려주고, 별것 아닌 일에도 재미있다고 웃어주던 엄마였다는 기억. 그래서 내가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았다는 기억.


하지만 내가 다 자란 후에 듣게 된 이야기는 전혀 달랐다. 엄마는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몇 년 동안 외할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데 아주 애를 먹었다. 자주 우울했고, 외로웠다. 홀로 화장실에 있다가 눈물이 왈칵 쏟아지길 여러 번, 조금이라도 힘든 일이 생기면 덜컥 겁이 났다고도 했다. 나는 이제 아빠도 없는데, 내가 이 일을 해결할 수 있을까, 그런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우리를 재우고 그 머리맡에 앉으면, 울컥 두려웠다. 그러면 홀로 이렇게 말했다고. '아버지, 나 좀 도와줘요. 나 이 애들을 키울 수 있게 도와줘요.'


그렇게 서로의 기억이 다른 세월이 지났다. 무심한 시간은 흐르고 또 흘렀다. 어느 날 엄마는 나에게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있잖아, 그 방을 치우다가 보니 할아버지가 너한테 피아노를 사주려고 팜플릿을 잔뜩 모아두셨더라? 엄마는 불쑥 그렇게 말했고, 나는 얼른 엄마의 얼굴을 살폈던 것 같다. 엄마의 말투와 표정에는 전처럼 짙은 슬픔은 보이지 않았고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엄마의 이야기 속 외할아버지의 그 마음이 얼마나 애틋하고 따뜻한 것인지 나는 사는 동안 매번 새로 느낀다.


그 후로도 엄마는 드문드문 외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덕분에 외할아버지가 살아 계신 동안에는 자주 들을 수 없었던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더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엄마는 그리움이 가득하지만, 전보다는 한결 편안한 얼굴로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건 엄마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이면서, 세 아이의 아버지인 한 남자의 이야기였고, 그 아이의 아이까지도 사랑한 어떤 나이든 남자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외할아버지가 외할머니와 함께 아이들은 몰라도 되는 비밀 얘기를 나누실 때는 일본말을 쓰셨다는 것, 손재주가 좋으셔서 직접 바느질도 하시고 수도 놓으셨다는 것, 귀가 얇고 사람을 잘 믿어서 사업하실 때마다 사기를 당하셨다는 것, 그런데도 사업을 포기할 줄 모르는 고집쟁이였다는 것, 사람한테 그렇게 데이고도 거리에서 자는 사람을 보면 입고 있던 코트라도 벗어주고 와야 마음이 편해하셨다는 것.


그 이야기들을 듣고 나니 외할아버지가 구해다 주신 내 배냇저고리와 포대기를, 돌 기념 한복과 조바위를, 돼지 강아지 코끼리 모양의 작은 인형들을 새삼 다시 보게 됐었다. 저런 것들을 고르는 사람에 대해, 이불 끝자락에 작은 수를 놓아 자기 마음을 표현하던 사람에 대해, 문풍지를 바를 때 말린 꽃을 한 송이 넣었던 사람에 대해. 외할아버지는 말씀을 많이 하시는 편이 아니어서 나는 외할아버지와 가깝지 않았고 외려 좀 무서워했는데, 엄마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외할아버지가 전에 없이 다정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내가 어른이 됐을 때는 이런 이야기도 들었다. 외할아버지는 불행한 결혼 생활을 이어가는 딸이 걱정돼서 매일 새벽 딸네 집 주변을 한참 서성이다 발걸음을 돌리셨다. 딸네 집은 어떤 날은 조용했고, 어떤 날은 시끄러웠다고. 시끄러운 날 외할아버지는 오래 그 집 앞을 서성이셨으리라. 저 문을 열고 들어가는 일이 내 딸을 더 힘들 게 만드는 건 아닐까, 여러 번 고민하셨으리라. 그 이야기를 전하며 엄마는 외할아버지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외할아버지가 선뜻 문을 두드릴 수 있는 가정을 꾸리지 못해서, 따뜻한 아침상 한 번 마음 편히 대접하지 못해서 내내 미안하다고 했다. 그건 바꿔 말하면 자신이 충분히 행복하지 않았다는 뜻이고, 엄마는 행복하게 살지 못한 게 후회된다고 했다. 상희야, 네가 행복한 걸로 엄마는 충분해. 엄마는 네가 행복하면 저절로 행복한 거야. 그러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행복해져라. 엄마는 그렇게 자신이 못다 전한 사랑을, 그런데도 아버지로부터 넘치게 받은 사랑을 다시 나에게 전해주려고 했다.


외할아버지는 이제 돌아가시고 안 계시지만, 나에게 외할아버지는 살아 계실 때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되었다. 내 마음속에는 나보다도 나이가 많은 추억들이 쌓였고, 우리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눠 가질 수 있었다. 엄마의 이야기 속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차라리 새로운 시작이었다. 그건 너무나 살아 있음 밖에는 모르던 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방식이었고, 내가 죽음을 처음 경험하는 방식이었다.




그의 책을 읽으며 나는 많은 죽음을 본다. 대부분 홀로 죽어가는 이를, 쓰레기 더미 속에서 죽어가는 이를, 자신의 마지막 자리까지도 깨끗이 정돈하고 치웠던 이를, 자신이 죽을 자리를 미리 정하고 뒷정리까지도 계획했던 이를 본다. 하지만 그는 아직 아니라는 듯 계속해서 그곳을 가리킨다. 이야기하는 자신을 보지 말고, 내가 가리키는 저곳을, 저 사람을 좀 보라고.


내가 아직도 다 보지 못한 것이 있구나. 나는 그가 가리키는 곳을 다시 본다. 그가 쓸고 닦은 그곳을 오래 바라본다. 그곳에는 여전히 그들의 죽음이 있다. 아, 그리고 그곳에는 그들이 남기고 간 것들도 있다. 그곳에서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살았던 사람, 그곳에서 삶의 기쁨과 슬픔을, 외로움과 고통을, 사랑과 아픔을 겪었을 사람을 본다. 그는 나와 다르지 않다.


"자살을 결심하고 그 뒤에 수습할 일까지 염려한 남자. 자기 죽음에 드는 가격을 스스로 알아보겠다며 전화를 건 남자. 도대체 이 세상에는 어떤 피도 눈물도 없는 사연이 있기에 한 인간을 마지막 순간으로 밀어붙인 것만으로 모자라, 결국 살아 있는 자들이 짊어져야 할, 죽고 남겨진 것까지 미리 감당하라고 몰아세울까?"


그들의 홀로된 죽음 역시 어떤 이야기를 남겼을 텐데, 나는 좀처럼 그 이야기를 알 수 없다. 그는 말할 수 없고, 나는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는 입이 없고 나에게는 귀가 없다.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그들이 끝내 살고 싶어 했을 그 삶을, 우리는 듣고, 전하면서, 그 못다 한 삶을 조금씩 나눠 가져야 할 텐데. 그래야 홀로였던 그들의 죽음도 혼자가 아니게 될 테고, 그렇게 아직 오지 않은 우리의 죽음도 홀로된 죽음이 아닐 수 있을 텐데. 에밀리 디킨슨은 말했다. "우리가 잃은 이들은 모두 우리의 일부가 된"다고. 하지만 그들은 가족과도 친구와도 지인이나 하다못해 직장 동료와도 끈을 나누지않고 죽는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입도 귀도 없다. 그래서 그들이 남긴 삶의 이야기는 허공에 흩어져버리고, 온갖 강력한 세제에 녹아 없어진다.


우리는 죽음을 기억하고 이야기함으로써, 결국 삶으로 연결된다. 우리가 누군가의 마지막을 상기하고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그를 기억하는 것은 결국 삶으로 돌아오기 위해서이고, 이 삶을 살아나가는 걸로 그가 남긴 사랑을 이어가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이야기해줄 사람 없는 죽음은 어떨까. 그들의 죽음이 들려주지 못한 삶의 이야기는 어떻게 들어야 할까. 우리는 그 죽음들을 통해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까. 그의 책은 그 이야기를 하자고 말한다. 그 많은 홀로된 죽음을, 묻힌 죽음을, 잊힐 삶을 기억하자고, 말하자고. 그들이 우리에게 주는 것을 받아 안자고.


그들의 죽음은 온통 삶만을 가리키고 있다. 그들은 실패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애썼던 순간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이 애쓴 것들은, 그들이 두려워한 것들은, 그들이 겪었던 마음들과 끝내 돌보지 못한 상처들은 우리가 함께 안고 가는 중임에도 끝내 '내 것'은 아니라고 믿는 것들의 목록 같다. 그 거부 또한 살아있음의 또 다른 반증이기에 입이 쓰다. 우리는 살기 위해 외면하고, 살기 위해 도망치다 결국 살지 못하게 된다.


게다가 우리 사회에서 죽음은 엄숙하거나 안타깝거나, 다행이거나 슬픈 것으로 읽힌다. 어쨌든 그것을 어서 빨리 훌훌 털고 일어나 삶으로 다시 뛰어들어야 한다고 말이다. 우리는 그러는 것이 성숙한 것, 잘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하지만 의문이 남는다. 죽음으로도 바뀌지 않는 삶이 정말 그렇게 대단한 것인가? 죽음이란 죽음 그뿐일까? 엄숙하게 슬퍼하고 다행이라며 어깨를 두드리는 걸로 서둘러 정리해야 할 일일까?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멈출 때, 죽은 이가 남긴 것들을 기억하지 않을 때, 불행하고 아팠던 삶과 죽음일수록 쉬쉬하려고 할 때 우리는 함께 불안해지는 건 아닐지. 그럴 때 우리는 그 죽음이 들려주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듣지 못한 채로 여전히 조금도 변하지 않은 삶으로 되돌아오고 만다.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숙명에 눈 감으라는 주문을 언제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약한 인간이 어떤 '목소리'를 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마지막 수단인 죽음조차도 살아남은 이들에 의해 감춰지는 걸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까. 그들이 살았던 팍팍했던 삶보다도, 그들의 죽음마저 삭제하려는 현실이 더 서글프다.


그런데 막상 누군가의 죽음을 이야기하려고 생각하면 어렵다.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될지, 그저 내 추측일 뿐은 아닌지, 동의를 구할 수도 따끔한 감수를 바랄 수도 없는 나의 감정과 말들을 과연 밖으로 표현해도 괜찮은 것인지 두려운 마음이 든다. 그의 삶을 불행했다고 말해도 되는가, 그가 두려워했다고 말해도 괜찮은가, 그는 누군가를 기다렸다고 해도 좋은가, 그가 삶을 간절히 바랐다고 써도 되는가.


저자는 우리의 그런 막막함을 마치 다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보여준다. 누군가의 죽음과 그 죽음을 기억하는 하나의 방법에 대해. 그건 어떤 계산된 공식도 아니고 정해진 매뉴얼도 아니지만, 그의 글을 읽으면 배울 수 있다. '이렇게 볼 수도 있구나' '이렇게 기억할 수도 있구나'. 그리고 그가 죽음을 대하는 방식은 '삶'을 대하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 섣불리 넘겨짚지 않는 것, 다 안다고 자신하지 않는 것.


"이 집을 치우며 지독한 고독을 보았다면 그것은 결국, 내 관념 속의 해묵은 고독을 다시금 바라본 것이다. 이 죽음에서 고통과 절망을 보았다면, 여태껏 손 놓지 못하고 품어온 내 인생의 고통과 절망을 꺼내 이 지하의 끔찍한 상황에 투사한 것일 뿐이다. 젊은 나이에 미쳐서 스스로 돌보지도 못하고 죽어버린 한 불행한 남자를 보았다면, 마치 인생의 보물인 양 부질없이 간직해온 내 과거의 불행함을 그 남자에게 그대로 전가하고는, 나는 결백하답시고 시치미 떼고 있을 뿐이다. 나는 언제나 나 자신을 바라보듯 타인과 세상을 바라보는 것 같다. 그것이 내가 이 지하 방에 관해 알게 된 유일한 진실이다."


그는 죽은 이의 집을 청소하러 가면서 이렇게 말한다. "용서하세요, 문 앞에 도착하더라도 애써 예의를 갖춰 벨을 누르지는 않겠습니다. 저 안에서 기다리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당신이 남긴 것이니까요. (중략) 여기에서 당신은 홀로 숨을 거두었고, 꽤 오랫동안 그대로 머물렀고, 오늘부터 나는 남겨진 흔적을 요령껏 지울 것입니다."


그가 마주하는 것은 분명 누군가의 죽음의 흔적이고 그러니 그것을 남긴 이는 이미 세상에 없지만, 그는 죽은 이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다.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 죽음의 자리에 남은 체취와 체액, 때로는 버리지 못한 내밀한 물건까지도 모두 살피고 갈무리하는 와중에도 그는 그를 단죄하거나 동정하는 대신 있는 그대로를 보려고 노력한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만들어놓은 이해 불가의 쓰레기를 수습하러 온 나는 누구인가?

내가 이곳에 있는 진짜 이유는 무엇이고, 지금 나는 무엇을 발견하려고 하는가?

그는 왜 나라는 인간에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굳이 내 판단의 사슬에 그를 옥죄어야만 하는가?"


우리가 누군가를 이렇게 바라볼 수 있다면. 함부로 대하지 않고, 섣불리 넘겨짚지 않고, 다 안다고 자신하지 않을 수 있다면. 우리의 죽음도 다른 시작이 될 수 있을까. 그런 마음으로 그들이 남긴 것들을 이야기하고 나눌 수 있다면 뭔가가 조금이라도 달라질 수 있을까. 우리는 죽음이 시작이 되게 하기 위해 오래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마치 삶에 관해 이야기하고 고민하듯이,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도, 죽은 이에 대해서도, 그가 남기고 간 것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삶과 죽음이 단선적이지 않음을,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그 연결 속에서 삶과 죽음은 하나로 통한다는 것을 더 자주 깨달을수록 삶도 죽음도 더 나은 것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어린 날의 나에게 외할아버지의 죽음이 단순히 상실이나 단절, 슬픔의 이미지로만 남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죽음에 대해, 죽은 이가 남기고 간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외할아버지의 마음은, 그 사랑은, 삶의 방식은 마흔을 앞둔 내 마음속에도 여전히 살아 있다. 어떤 것들은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 생생히 느껴진다. 외할아버지의 죽음은 새로운 시작이 되어 나의 삶으로 이어졌다.


존재의 유일한 필연성은 삶이 아니라 죽음에서 완성된다. 우리는 모두 다르게 살다가 죽음 앞에서만 비슷해진다. 그것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결론이다. 삶이라는 온갖 우연 속에 자리한 단 하나의 필연. 그가 보았던 그 많은 외로운 죽음들이 잊히지 않고 이 책 속에 기록된 것은 우리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나는 날에', 당신은 나와 같은 황폐한 마음이 아니기를. 끝내 홀로되어 삭제될 죽음이 아니기를. 누군가의 기억과 이야기 속에, 문틈에 넣어둔 작은 꽃잎 한 장과 놓아진 수 한 땀에, 당신이 남아 흐르기를.



오늘도 넌 보이지 않아

하지만 어디에나 너는 있지

너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난 너를 봐

널 기억해

언젠가는 나도 이곳을 떠나

네가 있는 그곳으로

가게 될 거라는 그 사실이 내겐

그 무엇보다 위로가 돼

우리 떨어져 있지만

널 향한 사랑은 계속되고

사랑은 더해져가

우리가 다시 만나는 날에

우리가 다시 만나는 날에

또 한 번 너와 함께 하고 싶어

여전히 하고 싶은 게 많이 있어

우리가 다시 만나는 날에

우리가 다시 만나는 날에

또 한 번 너와 함께 하고 싶어

그러니 우리 꼭 다시 만나

-강아솔, <우리 다시 만나는 날에>



"그러니 우리 꼭 다시 만나"라는 그 아프고 애틋한 인사를 잊지 않고 한데 모아 우리에게 전해주신 영혼의 청소부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덧1. 강아솔님의 <우리 다시 만나는 날에>를 알게 해주신 나의 벗 윤사월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덧2. 지금도 마치 얼마 전의 일처럼 생생한 상실의 시절을 다시 떠올리고, 이야기를 들려주시고, 초고를 읽고 조언해주신 나의 엄마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덧3. 하나뿐인 손녀였던 저에게 아낌없는 사랑의 마음을 전해주셨던 외할아버지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두더지 사냥꾼이 두더지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