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 보이어, <언다잉>
모두가 무더운 여름을 예상했지만 올 여름은 흐리고 습한, 천둥과 폭우의 시간으로 기억될 듯합니다. 벌써 여러 번 밤새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그야말로 '폭우'가 내리는 일이 있었고, 그런 다음 날이면 희부연 구름과 수증기 사이로 아침이 밝아오길 기다렸다가 베란다로 뛰어나가 세상이 어떻게 돼버린 건 아닌지 확인해야 했습니다. SNS에는 침수된 지역의 동영상과 사진들이 속속 올라옵니다. 여기가 아니어도 어딘가에서는 기어코 비로 인한 피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어수선하고 두려운 밤을 지내고 어느새 개인 아침을 마주하는 동안, 저는 불쑥 처음 대학 병원에서 외래를 보던 날이 생각났습니다. 그 커다란 로비에 가득한 사람들. 저마다의 아픔의 무게를 지고, 그 무게를 진 누군가의 손을 잡고, 어깨를 부축하고, 휠체어를 밀며 쉴새 없이 울리는 안내음과 전광판의 이름들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모습이 하도 강렬해서 잘 잊혀지지 않거든요. 병원 로비는 묘한 공간이지요. 언뜻 보면 공항 로비처럼 보이지만, 두 공간은 전혀 다르죠. 공항의 공기를 채우는 것이 설렘과 기대라면 병원의 공기를 채우는 것은 부담감과 공포, 신경증과 절망 같은 것들이잖아요. 하지만 공통점도 있지요. 그곳에서 사람들은 생경한 것들을 경험하는 중이라는 거요.
저는 그때 '세상에 아픈 사람이 이렇게 많은가'하고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 병원 밖에서는 잘 모르고 살잖아요. 세상에 아픈 사람이 많다는 걸. 병원 밖의 세상에서만 살 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건강해보였거든요. 그런데 대학 병원 로비에 하루 종일 서 있어보면 알게 되죠.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픈 중일 지도 모른다는 걸요. 저는 그 압도적인 숫자에 놀랐어요. 그런데 병원 문밖으로만 나가면 이 많은 '아픈' 사람들이 대체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의아했지요. 꼭 마법처럼요. 그때 이상한 감각을 느꼈어요. 아픈 사람들은 대체 어디로 숨겨지고, 숨어드는 걸까요?
비도 오고 그래서요, 여름은 아직 제법 남았지만, 사실 또 그렇지도 않은 게 입추도 이미 지났고, 어쨌든 여전히 비는 내리고, 사람들은 폭우와 폭풍 속을 헤매이고요. 그런 이유로 여름 방학 특집을 준비해보았습니다. 아픔을 기록한 책들, 돌봄을 기록한 책들을 몇 권 소개하고 싶어서요. 마치 밤새 천둥과 번개를, 폭풍과 폭우를 맞고 언제 그랬냐는 듯 개인 하늘을 볼 때처럼, 두렵고 괴로운 일은 얼른 지나가버리기를 바라게 되잖아요. 그 시간을 기억하고 싶지 않고, 오래 곁에 두고 싶지도 않지요. 하지만 맑은 하늘을 볼 때 마음 한켠에 남는 것들이 있어요. 아직 저 시간 속을 건너는 사람도 있다는 걸, 함께 이 맑은 하늘을 볼 여유조차 없이 천둥과 번개 속을, 폭풍과 폭우 속을 헤매고 있는 사람도 있다는 걸, 나 역시 그런 시간을 건너왔다는 걸, 여전히 그 폭우가 휩쓸고 간 잔재를 치우는 중이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고도 생각해요.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아마도 여전히 그 시간들을 잊지 못했기 때문일 겁니다.
앤 보이어 지음, 양미래 옮김, <언다잉>, PLAYTIME
앤 보이어는 미국의 시인으로 유방암을 겪은 경험을 토대로 이 책을 썼습니다. 하지만 아픈 사람이 쓴 일반적인 치료와 회복에 관한 증언집이나 경험담을 상상하지는 마세요. 그녀는 한 번도 자신의 경험을 전형적으로 서술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녀가 자신의 경험을 과장하거나 축소해서 마치 현실이 아닌 것처럼 표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녀의 경험은 전부 사실에 기반하며, 자신이 느끼고 생각한 것도 모두 솔직하고 진솔하게 적습니다. 다만 그녀는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 기존의 공식을 모두 깨뜨립니다.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신선한' 투병기입니다. 거침없이 내달리며 폐부를 찌르는 사고의 향연과 날카롭고 깊숙한 유머 속에서 울다 웃다 문득 정신을 차리면, "지금 병들지 않은 모든 사람은 예전에 병들었던 적이 있거나 머지않아 병들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서늘한 마음이 됩니다.
(핑크색 글씨는 책에서 가져온 문장입니다. 스포를 원치 않으시는 분들께서는 검은색 글씨만 읽으셔도 좋습니다. 핑크색 글씨는 책으로 직접 읽으시면 더 좋습니다.)
“의사들이 그러더라고요.” 항암 화학 약물 투여실에서 어느 나이 지긋한 남자가 내게 말했다. “내가 암에 걸렸다고. 그런데”, 그가 속삭였다, “난 좀 미심쩍어요.”
현대 의학은 발전을 거듭하고 있지만, 언제나 인간의 몸이 작동하는 방식과 원리가 훨씬 더 신비롭습니다. (아, 물론 질병의 치료에 있어 '신비주의'가 현대 의학보다 설득력이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게다가 의학이 내포하는 건 단지 의술의 문제만은 아니고, 사회적/정치적/경제적/계층적 이슈와도 상호 긴밀하게 얽혀 있습니다. 우리는 의학을 신뢰하는 동시에 의학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는 없다는 것 또한 인정해야 합니다. 의학의 최전선에 있는 의료인들조차도 이런 부분을 인정하고 있으니까요. "환자 입장에서 보기에 일들이 가시적으로 벌어지는 현장은 의료 시스템이지만, 그 의료 시스템 너머와 이면과 아래에는 가족 인종 노동 문화 젠더 돈 교육 같은 다른 온갖 시스템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런 온갖 시스템 너머에는 모든 시스템을 포괄하고 있는 듯한 하나의 시스템이, 너무나 절대적이고 압도적이라 우리가 흔히 이 세상이라고 착각하는 시스템이 있다."
"고대 그리스 의사 갈레노스는 아리스티데스가 육체는 약하나 영혼은 강인한 드문 유형의 인간이었다고 기록했다. 아리스티데스는 “온몸이 쇠약해지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쓰고, 가르치고, 말했다. 구글에 내 병을 검색해 본 나는 그 결과가 너무나 방대한 나머지 초현실적인 외로움을 느낀다. 내 영혼이 얼마나 강인한지는 통 모르겠지만, 나는 흔한 유형의 인간인지라 먹고 살자면 일을 해야만 하고, 그래서 아픈 와중에도 아리스티데스처럼 계속해서 쓰고, 가르치고, 말하고 있다. 해야 할 일들을 처리하다가도 내가 계속 살게 될 거라고 말해 주는 연구 결과를 절실히 바라며 틈틈이 죽음을 검색한다. 죽음에 관한 꿈도 꾸기 시작했지만 밤의 명령에 따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런 꿈에서 깨면 내 몸의 필멸성에 반하는 예외를 검색한다. 라이프매스에서 예후 계산기 결과를 확인하고 다시 잠들면, 생존율 곡선과 사망률 곡선으로 표현되는 죽음에 관한 꿈을 꾼다."
아픈 이나 돌보는 이는 아픔이나 돌봄의 상태로 진입하는 순간 그렇지 않았을 때와 전혀 다른 시공간으로 입장하게 됩니다. 이때 진짜 문제는 아픈 사람, 돌보는 사람이라는 하나의 정체성만으로 그 시간을 건널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아픔이라는 시공간에서도, 아프지 않음이라는 시공간에서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그들의 자아는 분열됩니다.
"현대 종양학에서 사용하는 이미지들은 대체로 사람 얼굴 형태를 띠고 있으며, 모든 얼굴이 여러 인종과 연령을 아우르는 행복으로 환희 빛난다. 암 교육용 자료에서 활짝 웃고 있는 얼굴들은 (대머리, 암 종류별로 색깔이 다른 리본 등) 사회적 관습을 모방하는 방식으로 암을 표현하고 있지만, 그 안에서 암은 물론이고 노동, 인종 차별, 가슴앓이, 가난, 학대, 낙담 등으로 인한 고통의 흔적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현대의 신전은 역사가 소거된 미소들이 모인 장소며, 우리의 질병을 찍은 모든 사진은 번지르르하고 수상쩍은 행복을 담은 봉헌물인 셈이다."
아프지 않은 사람들이 가진 개별성도 자칫하면 뭉뚱그려진채 하나의 '부류'로 분류되는 일이 허다한데, 아픈 사람에 대해서는 어떨까요. 게일 콜드웰이 이런 말을 했었죠. 마음에 난 상처는 내가 언제, 얼마나 그 상처를 내보일지 결정할 수 있지만 겉으로 드러난 상처는 그렇지 않다고요. 겉으로 드러난 상처는 마치 그걸 발견한 사람에게 그 상처를 가진 사람에 대해 '마음대로' 생각하고 판단할 권리를 주는 것 같다고요. 질병도 그렇습니다. 가끔은 어떤 질병을 직접 경험했거나, 혹은 아주 가까이에서 지켜본 적도 없으면서, 그 질병이 어떤 것인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기도 하죠. 나아가 그 질병에 어떤 이미지를 덧입히고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그럴 때 아픈 사람은 마치 공공재처럼 분류됩니다.
"'돌봄’이라는 단어가 데이터를 입력하는 키보드를 연상시키는 경우는 흔치 않다. 예의 무임금 또는 박봉으로 행해지는 (매일매일 먹이고, 씻기고, 보살피는 등 자신과 타인을 살아 있는 육체로 재생산한다는 점에서 ‘재생산 노동’이라고도 불리는) 돌봄 노동은 대체로 기술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고 정서적이고 본능적인 것과 밀착해 있다고 간주된다. ‘돌봄’이 감정을 알아차리고 가까이에서 보살피는 하나의 방식으로, 일종의 사랑으로 이해되는 경우도 빈번하다."
돌봄에 대한 이야기는 이어지는 특집에서 또 다른 책을 통해 좀 더 자세히 이야기 나눠요.
"이윽고 사람들은 떠나고, 친구들은 하나둘 떨어져 나가고, 연인들은 언젠가 당신이 다시 그들에게 호감을 품게 될 가능성마저 몽땅 챙겨 잠적해 버리며, 동료들은 당신을 외면하고, 경쟁자들은 이제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고, 트위터 팔로워들은 언팔로우한다. 당신을 떠나는 이들의 입장에서 보기에 당신은 존재 가능한 모든 사물 중에서 가장 사물 같은 존재일 수도(누군가에게는 쓰레기처럼 버려도 될 물건일 수도), 병에 걸린 사람 중에서 (버려지면 몹시도 처량한 심정을 느끼는) 가장 인간다운 존재일 수도 있다. 혹은 이미 알고 있곘지만 파멸을 불러일으키는 병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무엇이든 가능하므로, 가장 인간적인 동시에 가장 사물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얼마전 산책길에서 어떤 아주머니의 모자를 주워드린 일이 있어요. 아주머니는 한쪽 팔과 다리를 잘 못 쓰시는 상태였는데, 예상대로 뇌출혈의 후유증을 겪고 계셨어요. 아주머니는 모자를 버려야 할까 고민했다는 말씀을 하시다가 울먹이셨어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주머니가 아프게 된 후로 중/고등학교 때부터 우정을 유지해오던 친구들이 하나 둘 멀어져서 이제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고 하셨어요. 아주머니는 아무리 생각해도 친구들의 변심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씀하시며 우셨어요. "지들이 암으로 아플 때 내가 좋은 거 같이 먹자고 식당도 가고, 공기 좋은 산에도 같이 가고 했는데, 이제 내가 이런 꼴이 되니까 지들끼리 만나고 지들끼리 어울린다"는 아주머니의 이야기가 오래 마음에 맴돌았어요. 왜냐하면 아주머니는 말씀하셨거든요. "남편도 자식들도 모두 다 나한테 잘해줘요. 고마운 일이죠. 하지만 나는 내 친구들도 필요해요." 아주머니는 욕심쟁이 일까요? 가족도 없이 투병하는 힘든 사람들도 많은데 친구와의 우정까지도 놓치고 싶지 않아 하는 건 지나친 이기심일까요? 저는 혼자 이런 생각을 했어요. 어쩌면 아주머니에게 정말 필요한 건, '내가 아파서 친구들이 나를 떠났다'는 마음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일지도 모른다고요. 친구들을 원망하는 것 같지만, 실은 절뚝거리는 자신의 팔과 다리를 볼 때마다 자신을 원망하게 되는 그 마음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건 아닐까요. 누군가 아주머니를 그만큼 사랑해주기를, 어떤 일도 당신의 절뚝거리는 팔과 다리 때문이 아니라고, 그건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다고 말해주기를 바라며 집으로 돌아왔어요. "인생의 한창때에 병에 걸린 사람은 다시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려 안간힘을 쓰면서 나를 사랑해 줘요, 라고 말한다. 내가 예전에 했던 일을, 그리고 앞으로 하게 될 수도 있는 일을 떠올려 줘요. 시간과 정확히 어떻게 얽혀 있는 건지도 확실히 모르는 상태로 현재라는 시간에 영영 갇혀 버린 나를 사랑해 줘요."
"유방암 환자들은 유방암에 걸리기 이전의 자기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야 하지만, 그때보다 더 낫고 더 강하면서도 동시에 가슴이 아려 올 정도로 악화한 상태이기도 해야 한다. 우리는 불행은 혼자 간직하고 용기는 만인에게 기부해야 한다."
<아픈 몸을 살다>를 쓴 아서 프랭크는 '아픈 사람은 아픈 걸로 이미 할 일을 다 했다'고 했죠. 이제 그들이 겪은 일을 보며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고치고, 어떻게 함께 살아갈지를 고민하는 건 아프지 않은 이들의 몫이라고요.
"그 수백만 달러가 도대체 내 몸에 무얼 해 주고 간 것이며 나는 어째서 여전히 이렇게 망가진 상태인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암을 앓은 후로 내가 들이쉰 모든 들숨의 비용을 계산해 보면 날숨으로 스톡 옵션 정도는 뱉어 내야 할 터였다. 내 삶은 하나의 사치품이 되었지만 나 자신은 부식되었고, 훼손되었으며, 확신을 잃은 상태였다. 나는 괜찮지 않았다."
날카로운 유머.
"유방암으로 죽는 것은 죽는 사람의 허약함이나 도덕적 실패를 보여주는 증거가 아니다. 유방암과 관련된 도덕적 실패의 책임은 유방암으로 죽는 사람에게 있지 않다. 그 책임은 그들을 병들게 만들고, 치료를 받다 파산하게 함으로써 역시나 병들게 만들고, 그러다가 그 치료가 수포로 돌아가면 그들에게 죽음에 대한 책임까지 물어 버리는 이 세상에 있다."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자. 고통의 형언 불가능성을 말하는 목소리는 역사적으로 특수하고 이데올로기적인 주장이며, 고통이 말로 표현될 수 없는 대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이유는 우리가 우리의 진짜 기분을 표현할 언어를 공유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중략) 고통에는 전달 가능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이 철학적 이치를 살아 있는 생명체가 고통받는 모습을 목격한 각자의 경험과 한번 대조해 보자.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내는 울부짖음, 통곡, 비명, 날카로운 외침, 흐느낌 등은 전혀 모호하지 않다. “그렇게 하면 아파!”, “고통스러워!”, “썅!” 같은 감탄사 또한 대체로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고통의 표현이다. 개나 고양이도 고통을 느끼면 별반 다를 바 없는 방식으로 표현한다. 얼굴에 만연한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을 - 인간 얼굴이 아니라 할지라도 -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착각하기란 불가능하다."
가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하지 않으니 몰랐다"고 이야기 하는 목소리를 듣곤 합니다. 어떤 날은 그 목소리가 낯익어서 돌아보니 네, 제 목소리더라고요. 그때 느꼈던 당혹감을 기억합니다. 나의 무신경함, 몰인정함에 놀라는 순간을요. "몰랐다"는 말을 내뱉는 순간 더 큰 후회가 밀려옵니다. 몰랐다는 말이 얼마나 잔인한 말일 수 있는지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순간을 겪고 나면 다시는 그런 순간을 겪고 싶지 않아서 "몰랐어"라는 말을 내뱉기가 점점 어려워집니다. 일종의 학습이랄까요. 하지만 슬프게도 '앞으로도 모르고 싶다'의 마음으로 "몰랐다"고 말하는 경우를 마주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모르고 싶은 마음은 고통은 어차피 형언할 수 없다는 논리와 상부상조의 관계인 경우가 많습니다. 어차피 말로 다 표현할 수도 없으니, 알려고 해봐야 무슨 소용, 그러니 나는 모르련다라는 기적의 논리. 누군가 말했지요. '모른다'는 말은 때로 힘의 언어라고. 알고 싶지 않은 걸 영영 몰라도 되는 건 권력에 가까운 거라고요. 어머, 저도 가끔은 모르고 싶어하는 나를, 차라리 몰랐으면 하는 나를 마주하는 날도 있는데요. 그게 권력과 힘에 길들여지는 일이라는 건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저 저의 나태함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런 권력과 힘이라면 가지고 싶지 않습니다. 놀라고 당혹스럽더라도, 나아가 그러는 나를 못마땅해하더라도, 알려고 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권력과 힘보다는 인간다움에 손을 들어주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내가 느끼는 고통에 점수를 매겨 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와 친구들은 고통을 표현할 대체 어휘를 담은 소책자를 제작해 대기실에 슬그머니 비치해 둘 계획을 세웠다. 고통의 새로운 언어를 제시하는 그 소책자는 대부분 에밀리 디킨슨의 시로 구성할 생각이었다. 당신의 고통은 1-10점 중 어디에 위치합니까?
341 크나큰 고통이 지나가면 굳은 감정이 온다
477 절망을 에워쌀 수 있는 사람은 없다
584 더는 나를 아프게 하지 않았다
599 지극히 온전한 고통이란 게 있다
650 고통 속에는 공허의 시간이 흐른다
761 공허에서 공허로
1049 고통은 다만 하나만 알며 그건 바로 죽음이다"
"나로 말하자면 소진되지 않았던 때도 있었지만 어쩌다 보니 소진되어 버렸다. 병에 걸렸고, 그런 다음에는 치료의 후유증으로 인해 소진되었다. 완전히 고갈되는 순간도 경험한 적 있으나 그 순간은 지나갔고, 회복한 뒤에는 어쩌면 영원토록 이어질 ‘눈곱만큼도 나아지지 않는’ 상태가 되어 소진의 밑바닥을 향해 점점 더 침몰했다. 더 이상 자가 수리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고갈은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죽음을 제외한 일을 간신히 해 나가는 상태를 의미한다."
아픈 이가 아픔을 살아내는 시간과 돌보는 이가 그 곁을 지키는 시간은 '소진'이라는 단어와 참 닮았습니다. 소진은 어쩐지 귀엽고 예쁜 소녀를 연상시키지만, 어떤 이들에게 소진이라는 단어는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 없는 이미지들과 연결됩니다. 끝없는 일상의 쳇바퀴와 그 무게, 회복될 줄 모르는 체력, 지치지 않고 벌어지는 사소한 문제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기 위해 "버텨야 한다"는 무심한 목소리들, 파리한 얼굴, 띵띵 부은 얼굴, 괜찮은 척 하는 얼굴 같은 것들요. 소진되는 건 그 사람이 미련하기 때문이 아니라, 시스템이 부재하고, 도와줄 손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부디 한 인간의 소진을 그저 개인의 일로 치부하지 않기를.
"나는 대량 살상에 가까운 의료 행위를 통해 병을 치료한 대가로 신경 미토콘드리아 일부와 내 외모와 내 기억의 많은 부분과 내 지능의 상당 부분과 낙관적으로 추산했던 5-10년의 추가 수명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잃고 나서는 그럼에도 내가 여전히 나 자신임을, 구석구석 망가지는 동안 더 강한 내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인간이 되는 것에 관해서라면 결국 우리를 진짜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상실이라는 조건인 듯하다."
"우리를 진짜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상실이라는 조건인 듯하다."라는 문장이 오래 마음을 울립니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모순적인 존재이지만, 상실이 결국 인간을 '진짜'로 만든다는 저 문장에 저 역시도 깊이 공감하고 맙니다. 그녀는 이 책의 맺음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존이 지닌 아름다움과 호화로움을 깎아내리는 이들은 죽음의 문턱에 선 경험을 해 본 경우가 무척이나 드문 탓에 그렇게 깎아내릴 수밖에 없다"고, 자신이 "아직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에 황홀한 기쁨을 느끼지 않는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고요. 하지만 어쩐지 자신이 '생존자'라고 불리우는 것은 마치 "죽은 자들에 대한 배신처럼 느껴"져서 싫다고요. 그녀는 암이라는 병이 차려놓은 온갖 '상실'의 경험을 통해 결국 생의 환희를 마주했지만, 선뜻 그것만이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음을 고백합니다. 뭔가가 있다는 걸, 끝내 잊혀지지도 잊을 수도 없는 뭔가가 남았다는 걸 고백합니다. 하루도 황홀하지 않은 적이 없는 그녀가, 애끓는 심정으로 밝히는 이 송곳같이 서늘한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