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옥, 메이, 이지은, 전희경,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제 책상 위에는 A4용지 한 뭉치가 늘 놓여 있습니다. 다 읽은 책들을 치우고 책상을 정리할 때도, 식탁과 겸용으로 쓰이는 책상이니만큼, 음식들에 자리를 비켜줘야 할 때도 그 원고 뭉치는 쉽게 치우지 않습니다. 그 원고 안에는 제가 남편을 간호하는 동안 경험한 일들을 적은 글이 담겨 있습니다. 병원에 있던 당시에 틈틈이 메모해둔 것들, 남편이 퇴원한 후에 제가 글을 쓰기로 하면서 새로 적은 것들이 그 종이에 모두 모여 있습니다.
가끔 그 원고 뭉치의 아무 데나 펼쳐서 읽어봅니다. 어떤 글은 순식간에 그날 그 순간으로 저를 데려다 놓기도 하고, 어떤 글은 전혀 새로운 감각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그때는 이렇게 느꼈구나', '지금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아' 하는 사이에, 어쩌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잊히지 않을 기억을 갖게 되었음을 다시금 인정하게 됩니다. 이 경험으로 제가 뭔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하고요.
이번 프로젝트를 생각하게 된 것도, 제가 저 글들을 좀 더 손보고 다듬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만의 경험이지만, 읽는 이에게도 다가갈 수 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면 좋겠어요. 우리가 처한 상황은 다르지만, 결국 서로의 상황을 넘어 더 깊은 곳에서 공감할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런 걸 해보고 싶어서, 저는 책을 찾아 읽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렇게 원고 뭉치는 점점 낡아가며 시간을 덧입고 있습니다.
아픔이나 돌봄에 대해서 저 역시 하고 싶은 말들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어딘가에 다 쏟아 내버리고 싶지는 않았어요. 다 쏟아 내버리는 대신, 고여 있는 것들을 바라보며 다음을 기대해보고 싶었습니다. 이번 기획은 그런 의미에서 저에게는 참 고마운 시간입니다. 고여 있는 것들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주었고, 다 쏟아내지 않고 머금는 이 시간이 좋다는 여유를 알려주었습니다.
김영옥/메이/이지은/전희경 지음,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 질병, 돌봄, 노년에 대한 다른 이야기>, 봄날의책
네 명의 필자가 질병, 나이 듦, 돌봄이라는 의제에 맞춰 오랜 시간 연구해온 방대한 이야기들을 어렵지 않은 글로 풀어낸 책입니다. 누구에게나 쉽게 이해될 수 있도록 서술하였지만, 그런데도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분명히 논쟁적일 테고, 때로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그리고 그 논쟁과 오해는 지금 우리가 건너고 있는 이 시간에 대한 증언일 것입니다. 많이 공감하고 많이 분노하고 또 많이 반대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그 모든 목소리는 결국 질병, 나이 듦, 돌봄이라는 주제를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요.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는 제가 읽다가 도저히 한 번에 다 읽을 수 없을 만큼 감정이 뜨거워져서 끝내 책을 내려놓고 산책을 나서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산책에서 돌아와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번 책을 덮고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힘을 내서 책을 펼치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모두 읽었습니다. 마침표가 아니라 물음표와 쉼표로 끝나는 글들 속에서 저는 새로운 방향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을 쓰고, 만들어주신 모든 분께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지난번 특집과 마찬가지로 회색 글씨는 책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입니다. 스포를 원치 않으시는 분들은 검은색 글씨만 읽으셔도 좋습니다. 회색 글씨는 책으로 직접 읽으시면 더 좋습니다.
*더불어 이 책에서도 가장 많이 언급된 아서 프랭크의 <아픈 몸을 살다> 역시 함께 소개하고 싶습니다. 궁금하신 분은 아래에 소개한 저의 독후감을 통해 살짝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이 책 역시 책으로 직접 읽으시면 더 좋습니다.
https://brunch.co.kr/@closer0927/542
"그러면서도 이런 때, 이 책의 필자들은 견디기 어려운 것을 견디고, 계속 살고, 계속 살리는 일에 관해 말하고자 했다. 거리 위의 고통을 고발하는 일과 몸의 고통을 알아가는 일을 함께 말하고자 했다. 질병, 나이 듦, 돌봄이라는 의제에서 사회적 맥락과 구성을 인지하면서도 지금 마주한 나날을 충만하게 산다는 것에 관해 말하고자 했다. 어렵고 모순된 과제였다. 여러 층위의 두려움이 있었고 희미한 배신의 감각을 포함해 복잡한 감정들이 있었다. 그런데도 이 과제를 붙들고 있었던 건, 이 책에 담은 말이 필자들의 살아온 몸에 조응하는 가장 정직한 말이자 그 몸에서 가장 긴급하게 발화되고자 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서로 돌보며 사는 사회에 대한 논의들에서는 ‘우정과 환대’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나는 이 역시 ‘시민’의 개념을 개정/재구성하고 탈가족화된 사회에 대한 상상력을 촉발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우정은 여전히 지나치게 개인의 사회성에 기대고 있고, 환대는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다면 남용되거나 고갈되거나 착취되기 쉽다는 점에서 돌봄을 공적으로 다루는 데에는 충분치 않다."
네, 선의의 마음은 남용되거나 고갈되거나 착취되기 쉽습니다. 선의의 마음은 때로 '약한 것'으로 치부되기도 하고, 선의의 마음은 '공짜'이고 '무료'여야만 진정한 선의가 아니냐는 억측에도 맞서야 합니다. 왜 누군가의 선의가 공짜인가요. 왜 누군가의 선의가 무료인가요. 선의를 가진 이가 '대가 없이 전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과 그것을 '당연히 공짜'라고 여기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대가 없이, 라는 마음으로 선의를 베푼 적이 있습니까? 있다면 아시지 않습니까, 그게 얼마나 어렵고 귀한 일인지.
"특히 잘 의존하는 법, 돌봄 ‘받는’ 실력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에노 치즈코는 “장애인에 비해 노인은 돌봄을 받는 데에 있어선 초심자다”라고 말하면서 ‘능력’으로서의 의존을 강조한 바 있다. 이것은 우리가 주로 배워왔던 것(‘남에게 폐 끼치지 말 것’)과는 매우 다른, 새로운 인간관계의 양식을 ‘발명’하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그 발명은 구체적인 관계의 맥락과 역사에 따라, 질병과 늙음의 속도와 양상에 발맞추어, 계속 이루어져야 한다. 돌보는 쪽도 돌봄 받는 쪽도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 노력이 ‘병을 돕는 관계’를 ‘병이 돕는 관계’로 변화시켜준다."
엄마가 언제부턴가 하시는 말씀이 있어요. "늙는 것도 연습이 필요한 일"이라고요. 아침에 눈을 떴을 때부터 잠들 때까지, 무시로 찾아드는 몸과 마음의 불협화음에 적응하고, 마음을 설득하고 달래서 몸의 시계에 맞추고, 때로는 마음이 너무 좌절하고 사그라지지 않도록 일으키는 일을 해야 하는 게 노년의 삶이라고요. 그리고 그게 '처음'이라 매번 낯설고 이게 맞는지 궁금하고, 때때로 서글프다고요.
"아픈 사람의 ‘보호자’가 된다는 경험에 대해 간결하게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보호자로서 느끼게 되는 감정들 역시 한두 가지 단순한 감정들의 조합 내지 나열로 묘사되기 어렵다. 가족간병이나 ‘주조호자’의 경험(주로는 스트레스)을 연구한 간호학 내지 사회복지학 분야의 연구들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만, 여전히 그것을 읽는 나는 그 모든 말들이 맞는 말이면서도 틀린 말이라고 느낀다."
저 역시 보호자의 시간을 오래 건너왔고 지금도 건너는 중이지만, 개개인이 처한 상황이 모두 다르고, 특히 돌봄에 있어서는 환경과 조건이 많은 것을 뒤바꿀 수 있을 만큼 큰 영향을 미치기에 제 기준에서 상황을 설명하고 제 감정에 바탕을 두고 마음을 묘사하는 일에는 많이 고민하게 됩니다. 이는 돌봄이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그저 '개인'에게만 짐 지운 일임을 보여주는 거겠죠. 돌봄은 모두가 주고받게 될 일이지만 그것을 들여다보면 '우리'라는 감각은 없고 '책임'과 '의무'라는 감각만 있지는 않나요? 아직도 많은 시간과 대화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입니다. "마법의 정답 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그나마 생각해낼 수 있는 답조차 아득히 멀리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우리 사회 전체가 지금보다 훨씬 더 느려질 떄, ‘환자의 시간’이나 ‘보호자의 시간’을 경험해본 시민들의 수가 지금보다 훨씬 더 늘어날 때, 모든 시민이 돌봄의 무대 위에 올라설 때, 그토록 예측 불가능하고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으며 자주 무질서해지는 시간성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유연하고 인간적인 시스템을 만들 때, ‘답’이라고 할 만한 것이 비로소 찾아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러한 감정들이 주조되는 간병이라는 일의 구체성, 간병이 이루어지는 맥락을 구성하는 의료와 법과 가족의 문제들, 그리고 무엇보다 간병하는 사람의 ‘마음’이 처한 풍경과 그 풍경의 지도에 대해 우리가 함께 이야기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마음의 풍경을 날마다 황폐하게 만드는 그 수많은 감정들의 ‘무게’와 ‘복잡성’에 대해, 그러한 감정을 다룰 수 있는 시간과 관계에 대해, 그리고 그 감정들의 미로 안에 갇혀버리거나 통째로 망각되지 않기 위한 사회적 조건들에 대해서도 말이다."
제가 써놓은 글 중에는 병원에 상주하는 보호자들 사이의 은근한 신경전, 특정 간호 형태에 대한 우월의식과 강요, 마치 소진되는 것이 진정한 간호의 의미인 것처럼 여기는 잘못된 문화 등에 관해 쓴 이야기도 있습니다. 제가 그 안에 속해있을 때는 불편하고 답답하기만 하던 일들입니다. 저 혼자서는 개선하려 해도 쉽지 않았던 일들이고요. 이제 병원을 떠나 한 걸음 떨어져 그때의 우리들을 떠올리게 되니, 또 다른 마음도 듭니다. 얼마나 황폐한 마음이었을까요. 얼마나 간절하고 절박한 마음이었을까요. 그 마음들이 그렇게밖에 표현되지 못한다는 것, 그 마음들이 위로받지 못하고 나뒹군다는 것, 그러다 끝내 죄없이 나뒹구는 또 다른 마음을 만나 서로 베고 찌른다는 것, 저는 아마도 그걸 잊을 수 없겠구나, 하고 뒤늦게 깨닫습니다.
"그런데 ‘끝이 없다’는 것이 단지 완치가 불가능하다는 의학적 사실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앞으로 어떤 나날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다는 것, 자신의 인생에 대해 아무런 계획을 세울 수 없다는 것, 회사의 시간, 전철의 시간, 신문과 달력의 시간 같은 평범한 일상과 사회적 삶을 구성하는 시간들로부터 동떨어져 나만 다른 시간 안에 갇혔다는 느낌과 관련된 무언가다."
아픈 사람과 돌보는 사람 모두에게 찾아오는 '시간의 공격.'
"이들이 하고 있는 일은 아프기 전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의 ‘건강 회복’이라기 보다, 그냥 ‘사는 것’ 자체다. 삶의 목적은 삶이다. 몸을 ‘막 쓰는’ 것만큼이나 몸을 잘 관리하는 것도, 몸을 수단으로 본다는 점에서 결국 관점은 같다. 젊고 아픈 사람들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그 반대다. 몸인 존재로 살아가자는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꼭 건강하지 않아도 된다.”"
이 책에서는 특히 젊고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와 치매에 관한 이야기도 다룹니다. 읽는 내내 두렵고, 괴롭고, 힘들지만, 다 읽어낸 후에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고맙다는 마음이 듭니다. 거절도 거부도 불가능한 일들이 있죠. 그런 일들은 결국 받아들여야 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모르겠잖아요. 그럴 때는 결국 먼저 받아들여 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죠. 그 방법을 그대로 따라 한다기보다는 그 방법을 향해 가는 과정을 보는 거죠. 먼저 걸어간 사람들의 발자국은 많은 것들을 담고 있으니까요.
"지배적 시간의 질서 안에서 살 수 없는 아픈 사람들에게 시간은 과거와는 다른 것이 된다. 질병은 시간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시간을 강요한다. 아프면 삶이 중단되었다가 나으면 삶으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 아프며 사는 시간 역시 삶이다. 젊고 아픈 사람은 ‘젊은 나이’를 살아가는 매일의 시간, 일상의 시간을 살아가는 자기만의 삶의 양식(“스타일”)을 발명해야만 한다. 물론 이런 ‘발명’이 단번에 성공하는 일은 드물고, 시행착오에도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들며, 시행착오 끝에 애써 어떤 시간의 양식을 발명해도 몸 상태는 계속 변하기 때문에, 발명은 완료 없이 계속되어야 한다."
남편이 아플 때의 시간도 소중한 인생이었습니다. 그 시간은 그냥 버려지고 방치되고 뭔가를 준비하는 시간만이 아니라 삶에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 시간, 그 순간들이었습니다. 의식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던 그 해, 남편의 생일날, 저는 새벽부터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그날만은 꼬박 하루 세끼를 함께 먹고 싶어서요. L 튜브로 주입하는 '액체'도 식사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죠. 이런 저를 별나게 군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는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게 기억납니다. 투병의 시간은 자칫하면 '단절'의 시간으로 인식되거나 커다란 블랙홀처럼 설명되기도 하지만, 그는 그 시간을 '살아내고' 있었습니다. 멀리서 보면 아무 변화도 차도도 없어 보였지만, 들여다보면 매 순간, 매일 달랐어요. 그 시간이 과거가 된 지금은 더욱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 시간을 살아내지 않았다면 지금도 없다는 것을요.
"돌봄을 통해 다른 방식으로 관계 맺고 미래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 돌봄을 이상주의적으로 낭만화하고 이를 개인의 덕목처럼 이야기하는 것으로 읽히지 않기를 바란다."
깊이 공감해요.
"“못 움직이게 하는 것도 학대에 속하는 거예요.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두고 보호하는 게 우리들의 일이죠.”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이 기본적인 명제가 생활영역에서도 가능하다면, 그래서 요양원에 입소하지 않아도 된다면 가장 좋을 것이다. ‘위험에서 보호하기’는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다. 정말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보호하는 방식에 대해 더 고민하고 더 상상력을 발휘하자고, 이미 조금씩 타인의 도움이 필요해진 나는 위험한 배회를 할 수도 있는, 하고 있는 미래의 나를 위해, 미래의 내 자리에서 지금의 내게 제안한다."
남편이 앞을 볼 수 없게 된 뒤로 그의 자유와 안전을 동시에 고려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순간에 저는 제가 남편의 친구이자 애인, 아내이자 가족이고, 그리고 여전히 남편의 보호자임을 불쑥 깨닫습니다. 남편은 성인이지만, 남편이 넘어지거나 다친다면 저는 그 사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을 거라는 걸 압니다. 제 머리로 아무리 '그는 성인이고, 자유의지대로 행동한 거야'라고 말한대도 제 마음은 이미 '내가 좀 더 안전한 길을 찾았어야 해' '내가 좀 더 연습하라고 해야 했어'라고 결론을 내린 뒤일 테죠. 제가 세상의 모든 길을, 모든 변화를 다 알 수는 없다는 걸 아는데도 말이죠. 심지어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통제/제어할 수도 물론 없고요(그래서도 안되겠죠). 그러니 저 역시 작은 집 안에서조차 언제나 남편을 '지켜봅니다.' 그가 위험하지 않은지, 부딪히지 않는지, 뭔가 불편을 느끼지는 않는지, 내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은지. 지켜보면서 자유를 허용하는 일, 자유를 허용하기 위해 주의 깊게 살펴보는 일, 그게 보호의 전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 상상하게 됩니다. 남편이 좀 더 안전하고 자유로울 수 있는 세상이기를. 보다 많은 곳에서 많은 사람이 서로의 '자유를 허용하기 위해 보호'할 수 있기를.
그리고,
“그녀는 내 고통을 이해 못했거나 함께하지 못했다는 걸 미안해하며 시각장애인이 된 나에게 적응하는 데 나보다 6,7년은 더 걸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나와 함께 외출할 때면 내게 닫혀 있는 그 모든 세계 - 아이들을 포함한 - 가 느껴져 마음이 온통 상실감으로 얼룩지게 된다고 마릴린은 내게 설명했다. 나는 볼 수 없는 것은 내게 별 의미가 없다고 그녀에게 설명하려고 애썼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눈에 보이는 세상이 내게 아무 의미가 없다면, 그리고 만약 마릴린이 그 눈에 보이는 세상의 일부라면, 그렇다면 마릴린의 일부는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내가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해 나아가는 반면, 그녀는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고통을 감내하며 두 세계 사이에서 한 발은 안으로 또 한 발은 밖으로 그렇게 늘 중재자로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그날의 대화로 우리 둘은 깊은 소외감을 느꼈다. 나는 이 소외감 저편에는 사랑에 의해 탄생한 새로운 존재 방식이 있다고 그녀에게 얘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새로운 세계의 탄생이 너무나 더디고, 고통스럽고, 그쳤다 이어졌다 한다. 그래서 얼마 안 되는 찬란한 순간들을 제외한다면 어쩌면 영원히 실현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존 M. 헐, <손끝으로 느끼는 세상>)
남편과 제가 어떻게 이 시간을 건너고 있는지, 또한 앞으로 어떻게 건너게 될지 글로 적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남편이 퇴원해서 집으로 온 지 3년이 되어가는 지금에서야 저는 우리의 시간을 어쩌면 글로 적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생각들이 모여 한 편 한 편의 글이 되기까지는 또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요. 어쩌면 막막한 마음이 앞서는 일이지만, 저와 남편은 기대합니다. 지금 그 고통이 이상한 게 아니라고, 당신들이 잘못한 게 아니고, 당신들이 잘못 가고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거든요. 먼 곳의 누군가에게, 혹은 우리 자신에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