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오스터
새해 첫 책으로 맞춤했다. 특히 책을 펴자마자 “글만 써서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다. 비바람을 막아 줄 방 한 칸 없이 떠돌다가 굶어 죽지 않으려면, 일찌감치 작가가 되기를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는 문장을 마주하니 정신이 번쩍 들고 반쯤 굽어졌던 허리가 곧게 펴졌다.
왜 글 쓰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꼭 이 길이여야 하니? 지금도 늦지 않았어. 도망쳐’라고 말하지 못해서 안달인가. 이쯤 되면 ‘작가’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의 비밀 결사라도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이번 달에 몇 명의 작가 지망생을 죽비로 내리쳐 이 험난한 길에서 구해줬는지 자체 평가라도 하는 모양이다. 물론 제일 많은 사람을 구제한 작가라고 해서 별다른 부상이 주어지거나 하지는 않는다. 자신들은 이미 그 길에 두 발을 깊이 담그고 있는데 상은 무슨. 그저 독한 술을 한 잔씩 나눠 마시고, 그럼 안녕히, 다음 달에 만납시다, 바이바이, 헤어지는 것.
쓸데없는 상상을 거둔다. 172페이지를 단숨에 읽어내렸다. 한 사람의 인생사(정확히는 청소년기부터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서기까지)가 상투적이지 않고 소설처럼 재밌기는 어려운데. 폴 오스터는 그걸 해냈다. 이 성공에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했으리라. 우선 소설처럼 살아야 했을 테고, 그 흔적들을 그러모아 소설처럼 써야 했으리라. 그는 이 두 가지 일을 했다. 덕분에 2025년 제주의 어느 카페에서 두 번째 책을 상상하며 자주 허공을 응시하는 나에게까지 이 책이 닿을 수 있었다. 고맙습니다.
새해 다짐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런지 좀 되었네. 매년 새 다이어리를 사고 1월 1일이 되어 드디어 다이어리의 새 페이지를 넘기고 뭐든 써보고 싶던 날들도 있었지만, 어쩐지 그런 날들은 아련하게 멀어졌다. 작년 가을에 산 노트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어서 지난번에 썼던 페이지 뒤에 2025년 1월 1일을 적은 게 다다. 청소하고 화분에 물을 주고, 환기를 했다. 분리수거하고, 도어락의 건전지를 갈아 끼웠다. 아무 날도 아닌 것처럼, 아주 평안해서 때로는 지루하다고 착각까지 하곤 하는 어떤 보통의 날처럼 보내길 바랐다. 그렇게 보통의 날을 보내다가 저녁이 되어 남편에게 여러 번 고맙다고 말했고, 남편 역시 나에게 몇 번이나 고맙다고 말했다. 그걸 안 할 수는 없었다.
자고 일어나면 새해가 밝는다는 사실은 마흔 번을 넘게 겪어도 이상한 감각. 그래서 뭐가 크게 다르다는 건가, 아니라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다 잠들었다. 눈을 뜨니 정말로 2025년이었다. 역시 이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