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스타브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를 읽고 있다는 걸 아는 남편이 중간중간 묻는다.
”아직도 그 책 읽어요? 어떻게 됐어요, 보바리 부인은?“
”파국을 향해 가고 있어요. 하필 제일 엉망인 남자를 사랑하는 중.“
그리고 덧붙인다. 이 여자는 남편 빼고 모든 남자를 사랑하기로 작정한 사람 같다고. ’남편‘은 자신의 ’아내‘에게 저런 책을 읽게 놔둬도 되는 걸까 고심하는 얼굴로 되묻는다. ”정말로 그게 소설의 내용이에요?“ 나는 남편의 얼굴에 묻은 약간의 불안함과 황당함이 재밌어서 웃는 얼굴로 대답한다. ”그렇대두요.“
그녀로 말하자면 권태의 여신이다. 허영과 욕망의 여신이다. 변덕과 무책임의 여신이다. 에마 보바리는 끊임없는 자기 합리화와 거짓말, 유혹에 대한 열렬한 환영과 충동에 망설임 없는 항복의 여신이다. 그녀는 자신을 모두 태워버리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불길을 향해 뛰어든다. 기꺼이 뛰어들고, 실패하고, 오래 앓다가 겨우 회복해서 다시 또 뛰어든다. 부나방 같은 그녀가 반복적으로 관계에 실패하는 모습을 볼 때면 답답한 마음마저 든다. ‘학습 효과’라는 것이 없나?
하지만 끝내 그녀가 파국에 이르면 문득 질문하게 된다. 그녀가 원한 건 단지 ‘파국 아닌 삶’이 아니었음을. 이 말은 그녀가 파국을 원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녀는 파국이 아닌 삶을 위해 너무 많은 걸 희생하고 싶지 않았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그녀는 욕심을 부린 것이다. 파국을 피하고자 안정적인 삶에, 절제와 절약을, 감내와 인내를, 억제와 책임을 다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저 반대편으로 내달린다. 그리고 대가를 치른다.
여기 또 다른 보바리가 있다. 샤를 보바리, 에마의 남편. 소설은 샤를이 학교에 다니던 때의 몇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우유부단하고 겁 많고, 그러니 자연히 존재감이 거의 없는 그의 모습을 자세히 묘사한다. 그는 언제나 휘둘린다. 어릴 적에는 선생님이나 부모님의 말씀에, 자라서는 아내의 말에 따라 사는 곳을 옮기고 직장을 옮긴다. 삶의 순간마다 대부분 전전긍긍하고 어쩔 줄을 모른다.
궁금했다. 샤를은 정말로 몰랐을까? 보바리 부인이 자신을 두고 여러 번 외도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산책하고 말을 타러 나간다는 핑계로 새벽이슬을 맞고 내연남의 집으로 밀회를 즐기러 간다는 것을? 피아노 교습을 핑계로 도시를 건너 하룻밤을 보내고 온다는 것을? 아니면 그저 모르고 싶었을 뿐일까? 나의 아름다운 에마, 영원히 아름다워야 할 에마를 지키기 위해 그저 아무것도 모른 체 했을 뿐일까?
아이러니한 것은 이 책을 모두 읽은 후에 내 안에 남아 있는 질문이다. 나는 어째서 에마보다 샤를을 더 이해할 수 없는가. 에마의 감정에 대해서는 물음표가 남아 있지 않은데, 왜 샤를에 대해서는 아직도 여러 개의 물음표가 남아 있는가. 어째서 샤를을 답답해하는가. 그가 대체 무엇을 잘못했기에? 나는 무슨 이유로 그를 냉대하는가. 배신한 건 에마가 아닌가.
아마도 하나의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도덕이나 윤리, 법이나 규칙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온전히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고. 슬프게도 사랑은 도덕적인 이에게 주어지는 대가가 아니다. 사랑은 언제나 자기가 원하는 쪽으로 움직인다. 자유롭다. 자유로운 사랑 덕에 우리는 사랑으로부터 영원히 자유롭지 못하다. 어떻게 해야 사랑받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으므로. 어떻게 해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으므로.
인간이 사랑에 대해 꿈꾸는 것이 있다면, 그저 자기 자신이 되어 그런 나를 사랑하는 이를 만나는 것일 텐데(물론 그 반대도 성립해야 한다). 인간은 막상 그런 사랑 앞에서도 막연히 조마조마한 것이다. 사랑이 영원하지 않음을 알기 때문에. 나에게 왔을 때처럼 홀연히 가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에. 사랑에서 영원한 지점은 아마도 딱 한 가지 일텐데 그것은 사랑이 움직인다는 사실 뿐이다. 샤를은 그것을 알고 있었을까. 알고도 사랑했을까. 나는 어쩌면 그것을 묻고 싶었나 보다.
그런데 그러면 뭐가 달라지나. 이렇다니까. 사랑 앞에 서면 늘 이렇게 멍청해지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