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투마킨
고통을 전하는 이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려니 복잡한 생각들이 두서없이 떠오른다. 이건 인스타에서 어떤 이의 슬픈 사연을 읽고 ‘좋아요’를 누르기가 망설여지는 것과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좋아요’는 ‘긍정적인 것’ ‘밝은 것’ ‘즐거운 것’ ‘웃긴 것’ ‘스스럼없이 남과 공유할 수 있는 것’ ‘비밀이 아닌 것’ ‘비밀일 필요가 없는 것’ 등등에 어울린다는 판단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누군가의 슬픈 이야기에 선뜻 ‘좋아요’를 누르는 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소식에 하트 누르는 일을 잊지 않으려 한다. 왜 그런 이야기는 ‘좋아요’를 받을 수 없나. 반항하는 마음이 되니까. 그런 이야기가 쓰이고 읽힐 자리가 많아졌으면 좋겠으니까.
이때의 좋아요는 이런 의미다. ‘이야기를 들려줘서 고마워요’ ‘바깥의 시끄러운 세상과는 좀 다르게 흘러가고 있을 당신의 시간을 존중해요’ ‘앞으로도 당신의 이야기를 궁금해할게요‘ ’그게 불편하면 혼자 있도록 내버려둘게요’ 중얼중얼.
오 당신, 안다는 자여 / 당신은 알았는가,
어머니가 죽는 걸 보고도 / 당신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 …..오 당신 안다는 자여 / 당신은
알았는가, 하루가 1년보다 길고 / 1분이
평생보다 길다는 것을 / …..당신은
이것을 알았는가 / 당신, 안다는 자는.
(샤를로트 델보, <오 당신, 안다는 자여> 중, 본문 316~317쪽)
그래서 나는 나의 선량함을 확인했나. 그렇게 만족했나. 때로는 ‘내가 가진 아픔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이해하려 애쓰는 자신’에게 취했었나. 다 아는 것 같았나. 뭔가 아는 것 같았나.
날선 질문에 허겁지겁 답을 하려다 깨닫는다. 나는 선량함을 확인하지 못했다. 타인의 고통을 다 안다 자부하지도 못했다. 그럼 뭘 했느냐고. 나는 나의 고통조차 끌어안지 못해서 오래 아팠다. 그래서 타인이 아파할 때, 그게 꼭 나의 고통 같아서 곁을 맴돌았을 뿐이다. 당신의 고통과 내 고통이 많이 닮았네요. 그 고통과 이 고통은 완전히 달라 보여도 자세히 보세요, 어딘가 비슷한 데가 있죠. 곁을 서성이며 무슨 말을 건네보고 싶었을 뿐이다. ‘고통’이라고 말할 때, 그것이 나에게도 있다는 걸 떠올렸을 뿐이다. 그러다 부끄러워지고는 했지. 내 고통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당신의 고통이 아니라 그저 내 고통만을 끌어안고 있는 것이.
고통은 개별적이다. 아무리 닮아 보여도 모두 완전히 다르다. 피와 살로 이뤄진 우리의 육체는 삶과 죽음 만큼이나 분명하게 타인과 나를 가르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 앞에서 자주 좌절하는 이유다.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그가 될 수 없고, 그 지엄한 분별이 이해를 가로막으니까. 하지만 고통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고통은 영토를 넓힐 수 있다. 고통의 생애를 이어갈 수 있다. 고통을 보려고 할 때, 알려고 할 때, 들으려고 할 때, 잠깐 내려놓게 할 때, 고통은 비로소 자기의 생을 산다. 고통은 죽어 있는 과거가 아니라 그것이 고통이라 불리우는 한 살아 있는 것이기에. 고통과 함께 했던 이는 그 고통과 함께 어딘가에 닿을 것이다. 고통이 없을 때는 상상할 수 없던 곳. 있는지도 몰랐고, 갈 수 있을지는 더더욱 몰랐던 곳.
그곳에는 내가 알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아픔이, 더 많은 고통이, 그리고 그것들이 만들어낸 더 넓은 세상이, 더 많은 가능성이 있다. 그곳에서는 어떤 것도 쉬이 끝나지 않는다. 마치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고 길이고 생이라는 듯이. 덕분에 채워지지 않은 무지를, 섣부른 결론을, 성급한 좌절을, 덜 익은 실패를 위로받는다. 아직 아무 것도 끝나지 않았어, 아니 차라리 모든 건 계속되고 있어. 이 책은 마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같았다. 그래서 아파도 아프지만은 않았고, 두려워도 두렵지만은 않았다.
-이 많은 고통 앞에서 괜찮았던 적이 있었나.
=처음이다.
-내가 위로받아도 괜찮은가?
=아직 답하지 못하겠다.
-고통과 슬픔은 무엇이 다른가.
=고통은 개별적이지만 슬픔은 함께일 수 있다.
-이 책의 부제를 말하는 건가.
=그렇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슬픔에는 한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