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재생의 부엌>

오토나쿨

by 이상희

상처받지 않는 마음에 대한 환상을 가진 적이 있다. 얼마나 잘 회복하느냐가 중요하다는 믿음에 기댄 적이 있다. 오래된 상처가 반복된다는 말에 수긍한 적이 있다. 어떤 상처는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받아들인 날이 있다. 이 모든 문장이 죄다 진부하다며 냉소를 가장한 적이 있다.


상처받지 않는(줄 알았던) 마음이 흘리는 눈물을 본 날이 있다. 회복이라는 말의 무게를 생각하던 날들이 있다. 오래된 상처든, 방금 난 생채기든 감쪽같이 희망으로 모습을 바꾸던 어떤 찰나에, 그래서 이 상처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겠구나, 생각하던 날의 내가 조금은 머쓱해지던 순간에는 모든 마음이 새것처럼 낯설고 또 좋기도 했다.


마음에 대해서라면 모든 말이 진실이면서 거짓이라는 걸, 모든 길이 지름길이면서 동시에 가장 느린 길이라는 걸, 어떤 방법도 소용없어 보이지만 뭐든 해봐야만 한다는 걸, 비슷해 보이는 마음도 들여다보면 전부 다르다는걸, 강하면서 약하고, 단단하면서 연약하고, 자주 허물어지지만, 그보다 더 자주 다시 일어선다는 걸.


그가 쓴 ‘재생’이라는 말이 반가웠던 건 회복도, 재활도 아니어서였겠지. 막상 그 말을 쓴 그는 재생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고는 당황했다지만, 마음 앞에는 어떤 말을 새롭게 붙여봐도 좋은걸. 전혀 포기하지 못했지만, 포기한 것처럼 여기려고 애썼던 어떤 마음을 아무도 몰래 다시 들춰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진실이면서 거짓이고 지름길이면서 느려터진 길을 또 한 번 가볼 핑계가 생긴 것 같아서.


이리저리 오가는 동안 읽느라 집중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책을 읽는 동안 여러 번 울었다. 여전히 다시 일어서려 애쓰고 있는, 누가 손잡아 주기를 바라기 전에 ‘한 번 더 해보고 싶다’고 말하는,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때 그런 일이 있었고, 저는 여기까지 왔습니다. 참 무더운 여름이었습니다’라고 담백하게 눈물을 머금을 줄 아는 마음이 있어서. 그런 각자의 발걸음이 드문드문 불을 밝히며 걸어가고 있다는 걸 떠올릴 수 있어서.


그리고 그런 성숙한 걸음들마저도 마음에 대해서라면 여전히 갈팡질팡하고 있을지도. 도저히 완벽하게 능숙해지지 않는 어떤 지점이 남는 것. 완벽해지지 못하는 것까지가 마음과 마음을 대하는 우리의 태생적인 관계일지도. 마음 앞에서는 영원히 서툴겠구나. 이 긴 글은 결국 이 한 줄을 쓰기 위해서였다.


내내 좁혀지지 않는 그 한 땀을 섣불리 결핍이라 단정짓지 않으며 매번 당신이 부엌에 서는 것처럼, 나도 뭔가를 하고 있다고. 영원히 서툰 마음으로.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