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by 이상희

술을 마시고 싶은 기분이라는 것이 있다. 그게 허기와 비슷한 종류의 감각이라는 걸 나는 마흔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그 후로 가끔씩 술이 마시고 싶은 날이면 물어본다. ‘혹시, 배고파?’ 좋은 질문은 좋은 대답을, 어쩌면 나은 대답을 불러온다. 저렇게 물을 수 있게 된 후 나는 전보다 술을 덜 마시게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배가 고프지도 않은데 술이 마시고 싶은 날이 있다.


그녀의 소설집은 제목에 이끌려 산 것이 분명하지만 어쩌나. 배고파서 술이 마시고 싶던 날이 아니라 배가 하나도 안 고픈데 술이 마시고 싶던 날처럼 선연하기만 한 이야기들 앞에서 나는 술이 마시고 싶어진다. 배는 안 고프다. 이야기 하나하나가, 인물 하나하나가 술에 취해 흐려진 시야처럼 뿌옇고 흔들리는 것 같다가도 정신 차려보면 너무나 분명하게 해야 할 말을 하고 있어서, 해야 할 행동을 하고 있어서. 나는 책을 읽으며 몇 번이나 자리를 고쳐 앉았다. 취해 있고 싶지 않았다.


이야기는 대부분 삶의 어두운 면을 다룬다. 사랑이라면 실패한 사랑을, 삶이라면 어딘가 부서지거나 망가진 쪽을 쓴다. 반대편의 이야기는 할 말이 별로 없기 때문일 것이다. 값어치가 덜해서가 아니라. 실패하고 부서지고 망가진 쪽의 이야기 속에서 조각난 빛을 찾아낼 때 (아마도) 읽는 이는 기뻐할 테니까. 다행이야. 아주 망가지지는 않았구나. 완전히 부서지지는 않았구나. 하지만 그런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이야기들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지점에서 가슴 어딘가를 뭉툭하게 찌르는 뭔가를 느낀다. 우리가 실패하고 부서지고 망가질 때 과연 바닥이 있을까. 제발, 거기까지만, 이라는 마음은 그저 이야기를 읽고 부채감을 느끼기 싫은 나의 이기심일 뿐이지 않은가.


인물들이 어딘지 모를 바닥까지, 심지어는 죽음까지 닿게 해놓고도 그 이야기를 쓴 작가 스스로 전혀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작가가 너무 냉소적이면 나는 상처를 받는 편이다. 이 사람, 이 모든 걸 나 혼자 감당하게 하고 있네, 라는 감각이 느껴지면 작가가 미워지기도 한다. 아, 당신은 힘든 걸 하고 싶지 않군요. 그래서 이걸 읽은 나더러 감당하라는 거군요. 하지만 저런 상황에서 작가가 따뜻하다면, 나는 그런 이야기와 그런 이야기를 쓴 작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역시 이 이야기를 감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체 이야기의 어떤 부분에서 그렇게 느꼈느냐고 묻는다면 나의 고민이 아주 길어지겠지만, 여기서는 그저 내가 느끼는 것이 그렇다고 용감하게 말하련다. 그리고 이런 애정이 본능적으로 ‘강한 쪽’을 찾는 결과임을 인정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태연한 얼굴로 인물들이 어떤 ‘끝’에 다다르게 해놓고도 그게 삶이고 우리는 결코 그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무려 다정한 언어로 쓰는 이런 이야기를. 나는 좋아한다. 왜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나의 대답이 역시 또 길어지겠지만(사실 설명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그냥 좋다. 이 모든 아픔과 그 아픔에서 슬며시 배어 나오는 가느다란 애정과 삶에 대한 눅진한 진실성. 그리고 결코 누군가를 혼자 두려 하지 않는 순전함까지. 슬픔 고통 실패 체념 낙담 아픔 희망 사랑 순수 진심. 어떤 단어도 맞지만, 차라리 그 모든 것에 가까운. 그래서 쉬이 실망하거나 기뻐하기에는 이른.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것만이 진실일. 내가 참 좋아하는. (질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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