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바티스트 앙드레아
“털고 일어설 수 없는 부재들이 있지.”
겁이 많기 때문에 ‘소울메이트’가 나타나도 그가 정말 소울메이트인지, 소울메이트를 바라는 내 욕망이 만들어낸 기대와 허상일 뿐은 아닌지, 그러다 ‘아니, 소울메이트라는 게 진짜 가능하긴 해?’라며 한껏 뒤로 물러나 도망칠 준비부터 하고 싶어질 나는, 되려 그렇게 허약하기 때문에 늘 소울메이트를, 운명적인 만남과 삶을, 사랑을 꿈꿔왔다.
그러니 비올라와 미모의 우정을, 소울메이트 혹은 영혼의 단짝 내지는 우주적 쌍둥이(!)라는 말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둘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이 좋았다. 그들이 꼭 내 마음의 밝고 어두운 한 쌍처럼, 서로를 미워하면서도 서로를 사랑하는 모습이. 서로에게 최선이 되기 위해 다시 일어서는 모습이. 세상이 뭐라고 하든 둘만의 우주를 놓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 하나같이 내 마음을 건드렸다.
남편이 생사의 고비를 넘기던 때, 시가 쪽 어르신 한 분은 우리를 두고 점을 보셨다지. 점쟁이는 우리가 억겁의 인연을 지나 이번 생에 겨우 다시 만났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둘을 방해하지 말라며, 이번 생에서야말로 둘이 한번 잘 살아보게 두라고 말했다지. 나는 그 이야기를 건너 듣고는 ‘아, 내 소울메이트가 남편이라고?’ 하며 설명할 수 없이 곤란한 마음이었는데. 우리가 정말 억겁의 세월 만에 다시 만난 거라면 띠 궁합도, 별자리 궁합도, 하다못해 mbti 궁합도 안 맞는 건 무슨 심술인지 묻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안 맞는데도 소울메이트일 수 있느냐, 되묻고 싶었다. 남의 일이라고 쉽게들 말한다 참.
내 마음이야 어떻든, 운명은 제멋대로여서 그것을 살아내겠다는 용기를 가진 이에게도, 도망치려는 이에게도 그저 맹렬하게 닥쳐올 뿐이다. 우리는 그것을 피하거나 그것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다. 남편이 안 보이게 되고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나는 내가 아픈 걸 못 견디는 사람이고”
“나는 누가 아픈 걸 보는 걸 못 견디는 사람이니”
“이렇게 된 게 우리 둘이 살기에는 그나마 최선이었으려나?”
내가 안 보이고 남편이 나를 돌봐야 했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지내지 못했을 거라는 암묵적인 확신. 그 모든 궁합에서 최악이라는 판정은 받았어도 어쩌면 우리가 억겁의 시간을 지나 만난 배필 중의 배필일지 모른다는 마지막 증거가 아닐지. 우리는 저 말을 하던 날 웃었다. 미미한 증거나마 찾아보려는 노력이 귀여워서. 남편이 다친 후로 우리는 그 흔한 토정비결도 보지 않는다. ‘회사에서 승진할 운이네요’ 같은 점괘가 나오면 헛웃음이 나니까.
비올라는 미모를, 미모는 비올라를 자신의 운명처럼 여겼으나 정작 그들의 운명은 둘을 스쳐 지날 뿐. 미모가 영원히 털고 일어나지 못할 비올라의 부재는, 그녀를 새겨 넣은 피에타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뿐. 미모에게는 영원한 허무이며, 공허다. 남편과 내가 서로를 운명이라 여기든 말든, 우리가 그걸 눈치채든 채지 못하든 운명의 발걸음은 제멋대로 걷는다. 그러니 우리가 이생을 다 산 뒤에, 그 끝에 가서나 어렴풋이 뭔가를 깨닫게 될지도 모를 일.
나는 그와 이렇게 다르고 안 맞는데도, 어쩐지 그가 없는 내 삶은 상상하기가 어려워서, 그토록 애절하게 그의 생을 되살려보려 애썼던 게 아닐지. 그의 부재를 내가 감당하지 못하리라는 육감이 아니었을지. 가끔 상상한다. 만약 그때, 그가 정말 나를 떠났다면 나는 어땠을까.
그 모든 운명의 장난 속에서도. 시대의 한계와 지독한 비껴감 속에서도 비올라가 미모를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미모가 비올라를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책장을 덮은 후에도 내 안에 남아 있다. 용기가 없어서 소울메이트를 만나도 도망칠 것 같다고 말하는 겁쟁이인 내가, 비올라와 미모를 사랑해서, 둘의 이야기를 오래 머금고 있었다. 그들의 용기와 사랑에 경의를. 한없이 작고 작은 인간인 나는 나의 곁에 와서 앉아 있는 운명의 어깨를 물끄러미 본다. 나의 미모, 나의 비올라가 그 곁에 앉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