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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씨 마을의 꿈>

옌렌커

by 이상희


이 소설을 읽던 중에 내 팔자주름을 따라 작은 여드름이 하나 났다. 붉은 자국처럼 멍울이 생기다가 여드름의 끝이 노랗게 곪기 시작하면 그것을 짜버릴 타이밍을 잰다. 간단해 보이지만, 당장이라도 짜버리고 싶은 충동은 생각보다 강해서 덜 여문 여드름을 성급히 짜서 상처만 키우는 경우도 많다. 이번에는 다행히 그러지 않았다. 마치 소설이 끝나야만 여드름을 짤 수 있다는 듯.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은 후 후다닥 화장실로 가서 여드름을 짜버렸다. 이미 농익어버린 여드름은 손으로 짜는 시늉만 했는데도 노란 고름이 터지고, 이어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아팠다. 오래 기다린 것 치곤 하나도 속이 시원하지 않은 이별이었다.


대강의 내용을 알고 읽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은 어느 한 번도 빠짐없이 치밀하게 고통스러웠다. 서술이나 표현이 너무 충격적이거나 기괴해서 이 이야기가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다고 믿을 수 있는 심리적 거리를 전혀 주지 않고. 소설은 아주 다정하고 친근한 언어로, 쉬운 언어로, 그래서 더 소설 속 이야기에 가까이 다가앉도록 독자를 이끈다. 덕분에 이 고통스러운 이야기가, 쉬이 읽힌다. 이만 자에 달하는 이야기를 쉬이 읽어버리고는 그 ‘쉬이’의 감각이 오히려 기이하게 느껴지는 순간. 소설 속을 흐르는 고통이라는 냄새가 나에게도 짙게 배었음을 느낀다. 후각은 금세 마비된다고 했던가.


인간은 대체 무엇이고 생명은 또 무얼까. 생명이 살아간다는 건 대체 어떤 일일까. 우리는 계속해서 뭔가를 욕망하며 살고, 그 욕망이 곧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줄 테지만. 대체 어디까지 욕망해도 되고, 어디서부터는 욕망해서는 안 되는 걸까. 그런 의미에서라면 우리는 이미 길을 잃은 지 오래가 아닐까. 그의 소설 굽이굽이마다 인간의 욕망이 넘친다. 생명과 맞바꾼 욕망이 넘실댄다. 죽음의 이야기일거라 생각했는데, 욕망의 이야기였다. 죽음을 넘어서려는 욕망, 죽음 후에도 결코 죽지 않고 살아갈 욕망의 이야기. 그런데 그 욕망을 말하는 얼굴들이 너무나 평범해서 혼란스럽다. 꼭 내 얼굴 같다가, 내 친구의 얼굴 같다가, 내 가족의 얼굴 같기도 한 친밀한 얼굴들이 욕망 그 자체가 되어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힐 때, 나는 ‘아, 이것은 나의 이야기다’라는 선언조차 무의미하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런 깨달음조차 건방진 것이 된다.


저자는 말했다. “이 작품을 쓰면서 내가 소모한 것이 체력이 아니라 생명이었“고, (그것은) “내 목숨의 뿌리였다”고. 욕망은 반드시 타인의 무언가를 담보로 자란다. 스스로 채워지는 욕망은 없다. 때로는 타인의 목숨과 생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이 지나칠 때, 뭔가가 잘못돼가고 있음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외면할 뿐. 도망칠 뿐. 내가 나이기 위해 이것 하나 못 해주느냐 어깃장을 놓을 뿐. 작가는 그 모든 욕망의 뿌리까지 들여다보느라 자기 목숨의 뿌리를 걸어야 했다고 썼다. 나는 지금 무엇을 욕망하는가. 거기에는 누구의, 얼마만 한 생이 걸려 있나. 어떤 목숨의 뿌리를 뒤흔들고 있나.


#딩씨마을의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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