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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쓰기 위하여>

천쉐

by 이상희


고작 한 권의 책을 썼을 뿐이지만, 언제나 ‘쓰는 사람’이라는 감각은 잃지 않으려 한다. 읽은 책 리뷰를 하는 것도 모두 그런 의지가 담긴 행위다. 더구나 좋은 책은 읽고 나면 늘 마중물이 되어 ‘나의 이야기’를 꺼내놓게 만든다. 세상에는 그런 좋은 책이 마치 무한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많고, 그건 다행이면서 때때로 ‘쓰는 나’를 움츠러들게 만든다. ‘이렇게 많은 책이 이미 있는데,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에 나오고 있을 텐데, 굳이 나까지?’ 그런 마음 다 안다는 듯 30년이 넘게 쓰는 사람으로 살고 있는 그녀, 천쉐는 대답한다. “그러면 안 쓰면 된다. 나는 쓰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쓰라고 권하지는 않는다. 글쓰기라는 일은 자발적이지 않으면 할 수 없다.”


지난 연말 번아웃을 인정했고, 이후 여러 차례 컨디션이 나쁘거나 이런저런 잔병치레로 힘든 시간을 건넜다. 그러면서도 (나의 일은 아니지만, 나의 일을 포함하는) 남편의 전시를 했고, 전시가 끝날 즈음, 나도 ‘안식년’이라는 걸 갖겠다고 호언장담했었다. 남편은 자신의 핸드폰에 디데이까지 설정해 두고 매일 아침, 자기 오늘 안식년 5일 차야, 오늘은 안식년 8일 차야, 알려주었다. 그가 그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데, 내가 알게 모르게 워커 홀릭이어서 좀처럼 뭔가를 내려놓고 쉬질 못하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간은 더욱 내려놓을 수 없(다고 믿었)던 일들이 많았으니. 곁에서 나를 지켜보는 남편이 ‘말만 하지 말고 진짜 좀 쉬라’고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할 만도 하다.


이번에는 기필코 쉬어 보이겠다며 내가 한 첫 번째 일은 새 노트를 펼쳐 안식년 일지를 작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만 해라 쫌) 매일 날짜를 적고, 휴가 며칠 차 인지도 적고, 하루하루 기억할 만한 감정이나 상황들도 적었다. 내가 소진됐다고 느낀 가장 큰 이유가 나를 돌보는 데 부족했기 때문임을 인정하니까. 내가 무얼 느끼고 생각하고 거기서 뻗어 나오는 감정은 또 어떻게 움직이는지 공을 들여 살펴본 지 제법 오래되지 않았는가. 노트에는 그런 찰나의 감각이나 생각들도 적지만 무엇보다, 내가 ‘쉬고 있음’을 매일 아침 확인하는 것이 좋다. 마음이 조급해지려고 하면 노트를 펼쳐서 내가 쉬고 있는 상태임을 알려줄 수도 있다. (뿌듯)


그렇게 2주일쯤 지났을까. 나는 내가 뭔가를 놓아줄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너무 오래 붙잡아두었음을 인정했다. 그럴만한 상황이었대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일이었대도, 그것이 내가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해도, 이제는 놓아주어야 할 때임을. 그렇게 놓아주고, 자유로워진 내가 자유로워진 무언가를 기쁘게 만나고, 그러다 다시 서로의 자리에서 자유로워도 괜찮다는 것을. 영영 잃을까 봐 불안했던 날들이 스쳐 간다. 나의 불안을 자극하거나 마치 그 불안이 현실인 것처럼 나를 겁줄 때도 있다. 내가 자주 그런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된다. 그 마음을 알아보고 인정해 주면 어느새 지나간다. 감정마저도 놓아준다. 너는 네 할 일을 하고 있구나.


그리고 그녀의 책을, 장바구니에서 몇 개월을 묵혀두었던 이 빨간색 책을 주문해 읽었다. 순정하고 담백한 언어, 간명한 이야기. 어딘가 조금은 닮은 마음까지. 그녀의 말처럼 쓰는 일이란 “사랑의 그물에 걸려” 들어 “밤낮이 없고 시간 개념도 아예 없”어지기만 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절제의 예술”이라는 것. “영감도 힘도 한꺼번에 다 써버려선 안 된다. 모든 에너지를 몸속에 쌓아놓고 조금씩 지속적으로 발산해야 한다”는 것. 그러니 제아무리 안식년이어도 여전히 읽고 싶은 책을 읽고, 하루에 몇 시간은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써도 좋다는 것. 나는 지금 ‘달려 나가려는 마음’을 놓아주고, ‘오래오래 끝까지 걷는 법’을 익히는 중이라는 것. 놓아준 자리에서 이제껏 몰랐던 그 얼굴을 오래 바라볼 수도 있다는 것.


이 글을 올리고 나면 남편은 으레 그렇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내 그럴 줄 알았다’고 하겠지만. 어쩌라구. 이게 나다. 나도 나를 어쩌지 못한다니까? 그렇게 낄낄 대며 점심 식사를 준비하겠지. 오후의 나를 향해 걸어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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