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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로 보고 손으로 읽으면>

호리코시 요시하루

by 이상희


곧 있을 아이들 대상 강의를 준비하며 <귀로 보고 손으로 읽으면>을 읽던 중이었다. 저자는 남편과 같은 전맹으로 평생을 빛도 없는 세상에서 살아왔다. 해당 꼭지에서 그는 ‘들리지 않는 세상’이 자신을 얼마나 답답하게 하는지 설명하고 있었다.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해 준 사람이 너무나 겸손해서 끝까지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대체 누구에게 감사를 표현하겠느냐 하는 일면 귀여운 에피소드.


하지만 남편과 나는 이 사례를 읽으며 그리 간단하지 않은 마음이 되었다. 책의 저자에 비한다면 이제 막 시각장애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짧은 시간을 살아온 남편과 나는 들리지 않는 세상의 막연함과 막막함이 시각장애인을 얼마나 움츠러들게 하는지 실감하기 때문이다. 내가 남편의 얼굴에 붙은 속눈썹을 떼어주려고 아무 말도 없이 무심코 얼굴에 손을 대면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곤 하는데, 우리는 그때마다 서로에게 얼마나 미안한지 말했다. 남편의 이야기는 이어진다. 누군가에게 설명을 듣지 않으면 자신의 세계가 급격하게 좁아진다는 느낌이 들고, 그 현실을 자각할 때마다 장애를 실감하고, 절망한다는 이야기였다.


“중학교 시절에 가정 선생님은 언제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눈이 보이지 않으니 말로 보거라.” (중략) 보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은 반드시 물어보라고도 하셨으며, 눈으로 봐서 이상한 것은 하나하나 세세하게 지적해 주셨다. (중략)

물론 먼저 우리 자신이 자존심과 편견으로 마음이 혼탁하지 않아야 한다. 상큼하게 말을 투영할 맑은 ‘마음의 눈’을 지니도록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또 우리가 발화하는 말에도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고,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남편은 고백한다. 하루에도 수십 번, 들리지 않으면 절벽처럼 느껴지는 세상에 서 있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절망하고 자존심이 상하고 어깃장이 나던 마음이 들었노라고. 그런 순간들이 쌓이고 쌓이면 참다못해 세상을 향해, 자신을 향해 빈정대곤 했다고. ‘상큼하게 말을 투영할 맑은 ‘마음의 눈’’ 같은 건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며 그는 오래 허공을 응시했다. 부끄럽다고도 했고, 미안하다고도 했다. 그런 날카로운 말들에 매번 찔렸을 나에게 하는 사과였다.


나는 좀 다른 생각이었다. 보이는 사람도 언제나 ‘상큼하게 말을 투영할 맑은 ‘마음의 눈’을 지니는 건 아니다. 아니. 사실 대부분은 그러지 못한다. 뻔히 볼 수 있으면서도 상대와 상태를 왜곡하고, 오해하기도 한다. 상대를 내가 바라는 대로 해석하고 때로는 상대에게 그걸 투사하며 ‘나의 결백’을 위해 애쓴다. 그의 상황과 나의 상황이 같다는 말이 아니다. 그가 날 선 말들을 던질 때 내가 아무렇지 않았다는 말도 아니다. 그가 느끼는 외로운 고통을 어떤 못난 마음에 퉁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가 맑은 마음의 눈을 가지려 애쓴다면, 그렇게 전하려는 마음을 나 역시 맑은 마음의 눈으로 받아들이고 싶다는 말이다.


몸이 달라지자, 언어가 달라졌다. 나에게는 너무나 간단하게 보고 말할 수 있는 순간들이 그에게는 얼마나 절박하게 필요한 것인지 나는 깊이 알지 못했다. 그 또한 자신의 어두워진 마음에서 쏟아져 나오는 날 선 말들이 그의 곁에서 살아가는 나를 얼마나 세게 할퀴는지 미처 몰랐으리라. 우리는 같은 말을 쓰는 것처럼 보였지만, 전혀 다른 말을 쓰고 있었다. 우리가 오래도록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 온 이유를 알 것 같은 순간이었다. 그 이야기들은 닿은 듯하면서도 닿지 못한 채로 우리 사이에 둥둥 떠 있었겠지. 어쩌면 이제야 서로의 언어를 처음 배운 듯 우리는 조심히 말을 건네 본다. 고마워.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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