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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기 힘든 사람들>

도하타 가이토

by 이상희

“너무 큰 고통을 겪고 그 고통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시간이 필요하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닌, 그 자신의 몸이 살아갈 시간, 그 자신의 마음이 발 디딜 시간이.”

<그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중


남편과 내가 지난 5년을 그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며 다시 하루를, 다시 하루를 살아왔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하루 종일 둘이 뭐해?” 누군가 물었던가. 우리는 그런 질문 앞에서 우리의 하루하루를 떠올려보았지. 너무나 바쁜 그의 하루에 비하면 우리의 하루가 얼마나 소박하다 못해 지루한지. 그런데 막상 그 하루를 들여다보면 수없이 많은 위기가 버티고 있다는 걸, 그러니 우리 역시 절박한 시간을 살고 있다는 걸 끝내 설명하지 못했다. 아니, 우리 역시 여전히 ‘바쁘게 앞으로 나아가는‘ 하루에 더 익숙한 탓인지, 그 질문 앞에서 당황하고 움츠러들었다. (오해는 마시라. 그는 우리를 비난하기 위해 물어본 것이 아니니.) 우리는 막막한 우리의 현재와도 싸웠고, 동시에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이대로 정말 괜찮겠어?”라는 마음과도 싸웠다. 때로는 지나간 시간이 덮쳐오기도 했다. 겉으로는 무료하고 무의미하고, 그래서 도대체 둘이 뭐하는 건데, 라고 물을 만한 시간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그때 우리 삶 자체는 치열하고 끈질긴 전쟁터였다. 어느 쪽도 쉽게 포기하거나 놓을 수 없는.


간절히 삶을 원하면서도 매일을 원형으로 빙빙 도는 시간을 사느라 꼭 우리가 지워진 것처럼 느껴지던 순간들. 내가 썼던 ‘새로운 시간’이라는 말을 새삼 발음해 본다. 나는 아직 오지 않은 그것을 상상하며 썼었다. 다만 그 상상 속에서 나는 이토록 괴롭지는 않았지. 게다가 이 책의 저자처럼 ‘전문가’가 아닌 우리는 그저 ‘맨몸’으로 그 시간을 견뎠다. 중도 장애로 인한 중증의 우울을 앓던 남편과 그를 돌보던 내가 건너온 시간. 그것은 날것의 돌봄 그 자체였다.


“돌봄시설의 시간은 소용돌이처럼 빙글빙글 돌아갈 뿐입니다. 물론 돌봄시설에도 선이 있기는 합니다. 각 멤버들은 인생의 특정한 시기만 시설에서 보내니, 그런 점에서는 시작과 끝이 있는 선을 그리지요. 하지만 돌봄 시설 자체의 시간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 뿐입니다.

왜 그럴까요. 앞서 말한 이야기의 기본 구조에 빗댄다면 돌봄시설은 비상사태가 아니라 평형상태를 제공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멤버들은 모험을 하러 시설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안전한 기지와도 같은 일상을 찾아서 시설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있기 힘든 사람들> 중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몇번이고 우리 둘이 사는 집이 ‘돌봄시설’이라고 상상해보았다. 우리는 이곳에서 때로는 돌보는 사람이, 때로는 돌봄 받는 사람이 되어 빙글빙글 돌아가는 시간을 건넌다. 우리가 넘어지고 깨지고, 매번 ‘실패’라고 여겼던 어떤 순간들이 실은 가치 있는 것이었음을 배운다. 나는 돌봄을 경험하고 있다고, 그러니 조금은 그것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하나도 몰랐던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어떤 말로도 정의할 수 없어서 그저 낯설고 또 낯설기만 했던 그 시간, 경험, 감정, 기분이 이 책 안에 모두 기록되어 있었다. 책 안에서 그 모든 것들은 비로소 이름을 갖고 제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남편과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이제 막 “원형을 그리는 일상과 선을 그리는 삶의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지려는 참이었다. 동시에 지난 시간이 우리에게 깊은 상처로 기억되려는 중이었다. 남편과 나는 지난 5년 동안의 우리를 가슴 깊이 원망하고 있었다. 얼마나 부족했는지, 왜 그토록 괴로워했는지, 그렇게까지 했어야만 했는지. 결국은 자신에게로 돌아올 원망의 화살이 반원을 그리며 하늘 높이 떠오르기 직전에, 이 책이 나타난 거다. 그게 아냐. 잠깐 화살을 거둬. 그 시간은 너희에게 꼭 필요했어. “그저, 있을, 뿐”인 그 시간이 너희에게는 간절했지. 그 시간이 아니었다면 너희는 지금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거야. 원망하지마.


어쩌면 지난 5년의 시간을 종이 위에 남기는 일을 다시 시작해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너무 힘들다면 하지 않아도 괜찮겠지만, 이제 그건 절망이나 포기가 아닐 것이다. 그 시간은 우리 삶에 ‘그저, 있을, 뿐’이므로. 우리 역시 이 삶 속에 ‘그저, 있을, 뿐’이므로.


덧. ‘있기’가 힘들어 무언가를 ‘하기’시작하고, 그렇게 시작한 무언가에 점차 매몰되어가는, 어쩌면 우리 모두일지 모를, 그래서 친근하기만한 얼굴을 떠올렸다. 이 책은 ‘어떤 누구’가 아니라 ‘그저 있는 모두’에게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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