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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가 걷는 세상>

글쓴이 유영, 그린이 김다은

by 이상희

벌써 오래전 일이지만,

아이들에게 전쟁사를 가르칠 때면

‘평화’라는 말을 한 번도 발음하지 않고

그 말이 아이들 마음속에 닿기를 꿈꾸곤 했어요.


막상 수업하다 보면

몇 번이나 전쟁이 나쁜 거라고,

소중한 일상이 사라져 버리는 걸 상상해 보라고,

목에 핏대를 세우고 말았지만요.


사실 그때 저는 모든 전쟁을 떠올렸어요.

역사 속의 전쟁, 저 먼 곳의 전쟁, 지금 이곳의 전쟁, 당신과 나 사이의 전쟁, 내 안의 전쟁.


존재를 부정하려는 모든 시도 안에

‘그래도 된다’라고 생각하는 모든 마음 안에

이미 전쟁이 들어 있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곧 이런 생각이 따라왔어요.

그 말은 너무 불분명해.

시험에는 나오지 않지.

너는 전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어쩐지 부끄러워진 저는

년도 와 지명에, 누군가의 이름에 동그라미와 밑줄을 그으라고 말하고 말았어요.


그런 순간들은 잊고 싶지만 잘 안 잊혀요.


“‘감히 내가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도 될까?’, ‘머나먼 한국에서 살고 있는 나에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하나가 걷는 세상> 중


이 책의 닫는 글을 읽으며 그때의 제 마음이 위로를 받았어요. 잘 모르는 거 아니냐고, 그 아픔에 성실하지 못한 거 아니냐고 다그치고 검열하느라 정작 기억하고 있다는 말도 건네지 못할 때가 많잖아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도 어쩌면 그럴지도요. 매일의 삶에 허덕이느라 저 먼 곳의 이야기에는 성실하지 못했지요. 그게 부끄러워서 서둘러 화제를 돌리고 싶어졌고요.


하나가 걷는 세상을 읽는 동안에는 그런 눈치를 보지

않아도 괜찮았어요.

전쟁이 하나로부터 앗아간 것들을 기억하고, 가슴이 찌르르 아파지면,

하나가 레몬나무 아래로 돌아가서 평안하기만을 빌었어요.

그러니까 대체 평안이 뭐냐고 사납게 묻는 마음이 찾아오면, 자투리인형의 웃음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던 하나의 마음을 따라가면 된다고요.


전쟁은 결국 간절하게 평화가 필요하다는 걸 말할 뿐이겠지요.

하지만 그건 꼭 전쟁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말할 수 있는 것이라 믿어요.

그러니 전쟁은 사실 어떤 의미도 없는 것이지요. 없어도 되는 것이지요. 없어야 하는 것이지요.


인정해요.

제가 전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요. 아주 막연하고 가느다랗게 말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요.

.

.

.

세상에 내놓는 첫 번째 이야기를

이렇게 용기 있게 담아주신 유영 작가님께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주신 김다은 작가님께

감사와 존경을 보냅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각자의 레몬나무를 잃어버렸을 그 많은 이들을 생각합니다. 당신들의 고통을 배우고 기억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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