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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내뱉은 말>

존 헨드릭슨 지음, 이윤정 옮김

by 이상희

“말더듬에 대한 적응이 가장 쓸모없는 적응이라고 농담처럼 말해요”라고 그가 말했다. “이런 주장 있잖아요, ‘무엇이든 당신을 죽이지 않으면 당신을 더 강하게 만든다’. 정말 대단한 헛소리라고 생각해요. 그 말 정말 싫어요. (중략) 이건 더 나아지질 않아요. 그래도 노력은 하고 있다고요.” (155쪽)


올리비아 핫세는 자신의 얼굴에 몰두하는 남성들을 향해 매번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제 눈동자가 무슨 색이었죠?” 그 질문에 정확한 대답을 한 남자는 없었다고. 참 배부른 투정이 아닌가, 생각하던 건 옛날 말이고 요즘의 생각은 좀 다르다. 그것 역시 일종의 장애일지 모른다고.


‘단 하나의 단어’로 누군가를 설명하거나 기억할 수 있을까. 그건 굉장한 흡입력이 있어야 하는 일인 동시에 그것 이외의 모든 요소를 사라지게 만드는 잔인한 소거법이다. 예를 들면 이런 말들. ‘그녀는 참 예뻐’ ‘그는 말더듬이야’ ‘그는 전맹이야’ 누군가를 손쉽게 설명하는 동시에 흐릿하게 만드는.


존 헨드릭슨은 말을 더듬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을까. ‘그래도 행복하게 살았어요’였을까. ‘우리 좀 살아가게 내버려두세요’였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어쩌라고, 이게 우리다’였을까.


만약 그가 ‘나 좀 그렇게 쳐다보지 마. 네가 그렇게 쳐다보지 않아도 나 말 더듬인 거 다 알아’라고 말하고 싶었다면 굳이 많은 이들의 목소리를 따오지는 않았으리라. 자기만의 슬픔, 내밀한 사연을 들려주고 공감을 얻고 싶었다면 세상에 이토록 다양한 직업을 가진 말더듬이가 있다는 걸 알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왜?’라는 물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는 이들 모두가 ‘말더듬이’지만, 그들이 ‘말더듬이’일 뿐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으리라. 보세요, 이 사람들을 그저 ‘말더듬이’라고만 부를 수 있겠어요? 그게 맞아요?


며칠 전에 이런 피드를 올린 적이 있다. “그는 전맹이지만, 역시 전맹이기만 한 건 아니다. 그는 무엇보다 그냥 김두석이다. 그건 참 다행이다.”


그와 나는 자주, 삶의 모든 순간을 단 하나의 단어로 빨아들이려는 시도에 맞닥뜨린다. ‘그는 전맹이지만, 전맹이기만 한 건 아니’라는 말을 살기 위해 우리는 자못 비장하고 투쟁적이다. 그러다 문득 마주하는 건, 슬프게도 타인이 아니라 나의 얼굴이다. 내가 맞선 건 나 자신이다.


남편은 말했다. ‘자신을 놓아버리고 싶었다’고. 자신이 전맹이기만 한 게 아니라는 사실조차 버거웠다고. 전맹인 채로, 그 모든 불편함을 감당하면서, 전맹이기만 한 건 아님을 스스로에게도 증명해야 한다는 사실이 억울하고 화가 났다고. 그래서 포기해 버리려고 했다고. 그냥 ‘전맹’이기만 한 채로 살아버리고 싶었다고. 나는 눈물이 말라 찝찔해진 볼을 문지르며 말한다. 그랬겠다. 정말 그랬겠다.


아니. 나는 전맹이 아니어서 그의 마음을 알 수 없다. 알려고 애를 쓸 뿐, 아무리 상상해도 그 마음의 언저리에도 닿기 어렵다. 하지만 그가 그로 살기 위해 애를 쓰는 어떤 몸짓에서 서글픈 자화상을 보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갖고도 오래 슬프고 우울했다는 어떤 배우처럼. 우리는 자신이 되기 위해 애쓸 뿐이고. 그 길의 온갖 우여곡절은 ‘장애’라 불릴 것이다. 그러니 ‘그’와 ‘나’는 다르다는 말은 반만 맞다.


존 헨드릭슨은 말더듬이지만, 말더듬이기만 한 건 아니다. 김두석은 전맹이지만, 전맹이기만 한 건 아니다. 그건 어쩐지, 우리 역시 이 길고 지난한 삶을 살아갈 만하다는 말로 들린다. 해볼 만한 일이라는 말로 들린다. 괜찮다는 말로 들린다. 그건 참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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