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드라마 ‘우리 영화’였다. 좋아하는 배우가 두 명이나 나온다니 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지만,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면 그건 내가 멜로 드라마를 즐겨보지 않는다는 것. 그렇다 나는 남의 사랑 이야기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 야멸차고 메마른 여자인 것이다.
남편은 화색이 돌았다. ‘완전 사랑 얘기일 것 같지? 아, 기대된다’ 드라마가 시작하면 같이 봐달라고 말하던 남편의 들뜬 얼굴. 그는 첩보 영화를 보면서도 늘 ‘로맨스 레이더’를 켜두는 사람이다. 사랑 얘기 없는 이야기가 어디 있냐며. 보는 내내 이 사람 저 사람을 마음대로 엮어주다가 끝내 이어지는 커플 하나 없이 극이 끝나면 그에게 그 작품은 그저 ‘시시한 얘기’가 되고 만다. 지독한 사랑 탐색꾼이다. (사랑꾼 아님)
그런데 웬일인지, ‘뻔한 사랑 이야기’라며 혹평을 받는 이 드라마가 좋은 거다. 몰라, 매 순간이 애절하고 애달파. 이 이야기가 뻔하다는 사람한테는 ‘그럼 당신도 결국 죽는데 숨은 왜 쉬고 밥은 왜 먹느냐’ 따지고 싶어지는 거다. “죽을 날 받아놓은 사람이 무슨 염치로 사랑을 해?” 하는 대사 앞에서는 사실 우리가 모두 시한부가 아니냐며 주인공 대신 항변을 늘어놓는 거다. 그렇게 알고리즘을 타고 남궁민 배우의 이력을 훑다가 결국 ‘연인’이라는 드라마까지 보게 되었다. (이전까지 내가 본 그의 출연작은 ‘스토브리그’가 유일하다)
배우들의 몽골어 연기도 인상적이었고, 예쁜 한복에 눈 호강도 실컷 했고, 절개와 충심을 강조하다 못해 강요하는 시대정신과 끊임없이 불화하며 기어이 작은 틈이라도 만들어 내는 개인들의 서사도 좋았지만. 나는 그저 두 주인공의 ‘로맨스’에만 목을 매며 21화를 눈 빠지게 보았다. 다른 건 다 별 관심 없어, 길채랑 장현이가 만나게만 해줘. 맥락도 필요 없고, 유치해도 좋아, 둘이 마주 보게만 해달라고, 한집에서 살게만 해달라고, 그게 그렇게 어렵냐, 사는 게 얼마나 고달픈데 사랑하는 사람이랑 같이도 못 살게 하냐, 징징댔던 거다. 드라마 한 화가 끝나고 다음 화가 로딩되는 동안 태블릿 화면에 비친 약간의 불만 섞인 내 얼굴에 헛웃음이 나왔다. 뭐하냐, 지금.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하며 이들의 로맨스를 통해 깨달은 점들을 정리해 보았다.
사랑을 알아볼 줄 모르면 팔자가 사나워진다.
사랑하는 사람도 못 지키면서 뭘 지키겠다는 건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포기해서라도 뭔가를 지켜내겠다는 의지’라고 말할 때의 그 ‘뭔가‘는 ’나 자신‘을 의미한다. 결국 ‘나는 나만 사랑한다’라는 말을 복잡하게 한 것.
사랑하는 이들은 멀리까지 간다.
헐리우드에는 이터널 선샤인이 있고 한국에는 연인이 있다. 기억이 지워져도 사랑은 안 지워져.
그렇게 바다 앞에서 길채와 장현이 서로를 마주보다 안아주며 드라마는 끝이 났고.
나는 그 둘이 산 아래 작은 초가집에서 돌덩어리, 풀떼기처럼
봄이면 꽃구경, 여름이면 냇물에 발을 담그고,
가을이면 머루주를 담가 겨울에 나눠 마시는
사계절을 상상한 후에야 비로소 드라마 감상을 마칠 수 있었다.
남의 사랑 이야기에 눈물 콧물 다 흘렸으니 이제 나는 못할 일이 없다. 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