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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by 이상희


“내가 모를 것 같아? 아름답고 추한 거 나도 다 알아. 아름다운 건 추앙받고 사랑받지만 추한 건 미움받고 멸시받는다는 거 다 안다고.” (기억나는 대로 옮겨봄)


시각장애인이자 전각 예술인으로 이름을 날린 임영규는 40년을 묻어두었던 진실이 밝혀지자 자기 아들에게 항변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나를 무시하지 말라’는 피맺힌 절규.


시각장애인이 주인공이라며 들떠서 극장을 찾은 남편은 영화를 보는 내내 혀를 끌끌 차고 한숨을 몇 번이나 내쉬었지만,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왜 굳이 시각장애인을 주인공으로 했을까’ 질문을 품고 있었다.


임영규는 자신이 비록 보지 못하지만 아름답고 추한 것을 ‘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안다’라고 믿는 근거는 오로지 타인의 판단과 평가였다. 임영규 자신이 단지 ‘장님’이라는 이유 하나로 수없는 멸시 속에 살았으면서도 정작 자신이 누군가를 판단할 때조차 그는 자신에게 수없는 화살과 비아냥을, 때로는 이유 없는 폭력을 행사한 ‘그들’의 시선에 기댄다. 그들이 추하다고 말하면, 어느새 그 대상이 누구이든 ‘추하다’라고 믿어버리는 거다.


그래. 임영규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니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럴 만 하다거나 그럴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가 평생에 걸쳐 받아온 차별과 멸시가 그의 안에서 내면화되어 그의 자격지심이나 억하심정으로, 어깃장과 수치심으로, 공격성과 불신으로 이어졌다고 하자. 그러면서 어느새 자신을 공격할 수 있다고 믿는 그들의 권력(?)에 자신마저도 기댔던 거라고. 그렇다면 임영규를 제외한 그 많은 ‘보는’ 이들은? 그들이 내뱉는 말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정영희를 향한 사람들의 노골적인 폭언을 들으며 이 영화의 반전이 있다면 그 정영희가 기가 막히도록 아름다운 얼굴을 지닌 게 아닐까 상상했다. 아름다운 얼굴에, 불의를 참지 않는 정의로운 마음, 아픈 것을 돌보려는 다정한 심성까지 지닌 그녀를 그녀의 형제들도, 이웃들도, 하물며 사랑하는 남편마저도 시기하고 미워했으리라는 상상.


내 상상을 들여다보며 또다시 생각하는 거다. 그러니까, 아름다움이라는 건, 추함이라는 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임영규는 평생을 자신의 장애가 아름답지 못해서 멸시받았다고 믿었지만, 정말 그럴까. 아름다움과 추함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 무엇이 아름답고, 무엇이 추할까. 어떤 진실에 다가서려고 하기보다는 그저 그렇게 ‘믿는 것’에 의지하려고 하는 한, 더구나 그 믿음이 ‘여럿’의 힘에 의존하는 한, 우리는 영원히 어떤 아름다움에도, 어떤 추함에도 이르지 못하는 게 아닐지.


그러니 보지 못하는 임영규도, 볼 수 있는 그 많은 이들도 결국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정영희는 못생겼다, 예쁘지 않다, 바보 같다, 추하다, 괴물 같다. 그렇게 말할 때, 그들은 정영희의 어떤 실체에 닿아서가 아니라 그저 자기 안의 공허를 어루만지는 거다. 나도 그렇게 ‘말할 수 있’고 ‘평가할 수 있’는 위치 임을 상기하는 거다. 때로는 나도 정영희의 자리에 앉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을 비열한 웃음 뒤에 숨기면서.


낱낱이 아프고 불편한 영화였다. 내가 앉은 자리를 당연하게 느낄 수 없게 하는. 그리고 그건 참 좋은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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