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감과 붙잡힘
이상과 현실
사람과 사람
미움과 애정
질투와 동경
그놈의 비밀
은중과 상연을 보았다. 보는 내내 참 많은 상념이 따라왔다. 지난 인연의 얼굴들이, 그 속의 내가, 때론 푸릇푸릇하던 스무 살의 장면이 속절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이제는 마치 그런 내가 아닌 듯 살고 있지만, 아주 작은 흔적이라도 발견하면 언제든 그때 그 자리로 불려 가고 마는 청춘의 얼굴들. 은중과 상연은 10대부터 40대까지의 인연을 다루고 있지만 어쩐지 내게는 그저 청춘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지독하게 사랑하고 미워하고 상처받고 나가떨어지던.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사랑하러 떠나던 시간.
드라마를 보기 전부터 이미 여러 글을 보았다. 자신을 은중이나 상연에 빗대어 보는 글, 아무리 그래도 상연이가 너무 했다, 아니다, 은중이 같은 스타일이 실제로는 은근히 남한테 상처 준다, 등등. 그 많은 은중과 상연을 보며 되레 은중과 상연은 어떤 독립된 한 명의 캐릭터 같지 않다고 생각했다. 농도의 차이일 뿐, 혹은 시절의 차이일 뿐, 우리는 결국 은중이였다 상연이었다 하며 사는 거 같다는 생각.
그러면서도 의문은 남았다. 은중과 상연은 그저 극 중의 인물일 뿐이고, 그들의 이야기는 그저 지어낸 것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뻔히 다 알면서도 왜 자꾸 그들에 나를 빗대어보게 되는 걸까. 만약 상연이 삼십 대 이른 나이에 그만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대도, 혹은 사십 대 초반에 치명적인 병세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로 하지 않았대도 이 이야기에 이토록 몰입했을까.
나의 삶은 결국 은중과 상연이 들려주는 이야기까지 밀어붙이지 못하는 어디쯤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그건 어쩌면 다행일지도 어쩌면 지긋지긋한 평범함일지도 모르지. ‘나의’ 상연이는 어딘가에서 적당히 잘 먹고 잘살고 있을 지도, ‘나의’ 은중은 저렇게까지 용감하게 누군가를 품어 안지 못할지도 모른다. 적당히 못되고 적당히 찌질하게, 나이 사십쯤 되니 비겁한 것에도 적응한다며 동네 치킨집에서 마주 앉아 소주나 한잔하고 있을지 모른다.
다만, 은중과 상연을 보는 동안은, 우리 안에 여전히 살아 숨 쉬는 가장 좋은 것과 가장 나쁜 것을, 가장 미운 것과 가장 사랑하는 것을, 절절하게 돌아섰던 사랑을, 서늘하게 밀어냈던 우정을 떠올려보는 것이다. 여전히 누구도 완전히 용서하지도, 완전히 미워하지도 못한 채로 살아가는 중임을 비밀스럽게 놓아주고. 그들의 이야기에 푹 빠져서 나였다면, 그랬다면, 그때 우리는, 하고 상상해 보는 것이다. 그럴 때 나의 얼굴이 은중이면 어떻고 상연이면 어떤가.
은중과 상연은 그런 의미에서 완전한 드라마였다고 생각한다. 성장과 성숙, 아픔과 상처, 사랑과 미움, 그리고 죽음마저 함께였던 어떤 두 여자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완전해서. 부러웠다. 여전히 가야 할 길이 잔뜩 남은 나라는 여자를 가만히 안아주고 싶어졌다. 그들의 우정이 어땠든, 나는 삶으로 돌아와야 하지. 지금도 문득 서툴고, 때때로 어색한 나를 데리고, 내 몫의 우정을 살아야 하기에. 그 지난한 시간 안에서 내게 주어진 미움과 사랑과 환희와 눈물을 건너야 하기에.
다만 가끔 생각날 것이다. 그토록 깊이 미워하고 사랑한 그들을. 나 역시 끝내 그럴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