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우리 영화>

by 이상희

남편의 급성기 치료 기간은 상당히 긴 편이었다. 계절은 여름을 지나 어느덧 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는데도 그의 상태는 안정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담당 교수는 회진이 끝나고 병실을 나서다 말고 내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환자분.. 돌아가실 수도 있어요. 이런 말씀을 또 드려서 죄송해요. 하지만 지금은 어떤 것도 확신할 수가 없어요.”


황망한 마음으로 환자 침대 난간을 붙잡았다. 그와 대화라도 나누고 싶었지만, 그는 나를 알아보지도 못했고, 말도 거의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나는 그저 하루 종일 그의 손을 잡은 채 그의 곁에 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지난 5개월도 하루하루가 생과 사의 갈림길 위에 있었는데, 교수의 말을 들으니, 우리가 선 곳이 칼끝처럼 위태롭게 느껴졌다.


<우리 영화>를 보며 그때의 시간이 떠오르곤 했다. 사랑하는 이를 잃었다 얻었다 했던 그 시간이.


병원에서의 시간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남편은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음이가 죽을까? 요즘 드라마에서는 옛날처럼 현실성 없는 얘기는 잘 안 쓰니까 예정대로 죽을 것 같아. 그치?”한다. 그러다 또 말하지. “근데 현실성 없어도 좋으니까 안 죽었으면 좋겠다. 둘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나는 대답한다. “그러게. 나도 다음이가 안 죽었으면 좋겠어.“


드라마가 진행되는 6주 동안, 우리는 희망과 절망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갔다. 영화만 찍게 해주지, 사랑 좀 하게 해주지, 그냥 신약 개발되면 안 되나, 기적이라도 일어났다고 하면 되잖아. 이야기가 끝내 절망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걸 예감할수록 자꾸만 커지는 희망의 마음. 그리고 그건 죽음을 앞둔 다음과 그런 다음을 사랑하는 제하의 마음이기도 해서. 그들은 ”너무 살고 싶다”며 운다.


살아있음이란 죽음과는 너무나 멀어서, 살아있는 우리는 죽음을 앞두었던 그 시간을 때때로 잊고 지낸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시간이지만, 그렇다고 늘 그 시간에 머물 수만은 없다. 그것이 살아있다는 뜻임을 배웠다. 삶은 흐르고 우리 역시 그 삶과 함께 흘러 절대로 떠날 수 없을 것만 같던 병원 복도를 지나 여기까지 왔다.


살아있는 모든 날이 소중하다는 이 드라마의 메시지가 하나도 새롭지 않다고 해도. 그 말이 진실이라 해도. 나는 여전히 어떤 순간 앞에 서면 그날의 병실을, 나를 바라보며 죽음을 말하던 의사의 눈과 입을, 모든 걸 잃은 채 침대 위에 누워 있던 당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것 역시 진실이기에. 그리고 낮게 읊조린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 우리는 모두 시한부지.


그러니 언제 죽을지 몰라도 오늘을 “뻔뻔하게 살고” 사랑해도 좋다고. 우리 모두 그러는 중이니까. 어차피 죽을 걸 알아도 오늘치의 행복과 절망을 기쁨과 슬픔을 커피와 밥을 먹는 것이 삶이니. 정말 힘든 날이면 딱 하루씩만 살기로. 하루도 힘들면 반나절씩만 살기로. 그것도 힘들면 당장 ‘지금’만 살기로. 약속.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타오르는 여인의 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