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을 떠올리면 무한정하게 느껴지던 ‘시간’이라는 감각이 함께 따라온다. 하루나 한 달, 일 년 같은 단위말고 그런 단위 따위 가뿐하게 초월하던 청춘의 그 시간. 언제나 ‘다시’ 해볼 수 있으리라고 확신하던 순간들. 아니, 그런 확신조차도 거추장스럽던 태연함. 청춘의 시절에는 체력도 좋아서, 그 무한정하게 느껴지는 기다란 시간을 또 무한으로 늘리기도 했다. 밤새 누군가를 떠올리거나 그가 무심결에 말했던 책이나 영화를 찾아보거나 그가 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리거나 하던 시간 시간들. 청춘들은 청춘을 보내느라 허둥지둥 허겁지겁인데 청춘의 시간은 언제나 느긋하고 가득했다.
이 영화, <파반느>의 원작인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던 날도 그 기나긴 시간의 허리를 뚝 끊어내어, 간간이 찾아오던 불면증을 안주 삼아 아주 늦게까지 소설 속 남녀를 상상하고 또 상상했었다. 켄터키 호프(HOF 가 아니라 HOPE)집과 노란 가로등과 엘리베이터 안내양이 있던 시절의 백화점과 그, 그리고 그녀, 그리고 요한. 나는 그도 되었다가 그녀도 되었다가 요한도 되었다가 하면서 한 시절을 이 책과 함께 지나왔다.
그녀가 말로 설명하기 힘들 만큼 못생긴 여자고, 그는 또한 말로 설명하기 힘들 만큼 잘생긴 남자라는 설정이 가끔 헷갈리게 하지만, 내 생각에 이 소설은 그냥 사랑 얘기다. 청춘의 얘기고. 그와 그녀가 자신의 결핍을 통해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일. 서툴게 마음을 확인하고, 그러면서도 그 어려운 일을 자꾸 의심하고 되돌리고, 그러다 끝내는 헤어지고, 헤어지고도 서로를 잊지 못하고. 그러는 시간 속에 누군가는 생을 거듭 포기해 버리려 하고. 그 모든 게, 그녀가 못생긴 여자이고 그가 잘생긴 남자여서 겪는 일일리가. 다만 그녀가 못생긴 여자라는 설정은 소설 속 인물들에게가 아니라 읽는 이에게로 와서 끊임없이 묻게 하는 거다. ‘아주 못생긴 여자’를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게 정말 가능하다고 생각해? 대답은 물론 각자의 몫이겠고. (참고로 영화는 ‘못생긴 여자’를 연기하는 못생기지 않은 배우를 선택했다.)
영화에서 그녀는 그의 이름이 매달린 나무 앞에서 딱 한 번 말한다. 그날, 그를 보내지 말 걸 그랬다고. 오래 후회하고 자책했노라고. 아니. 그것만이 후회일리가. 머뭇거리던 서툰 사랑은 차라리 전부가 후회일테지. 요한이 그와 그녀의 이야기를 끝내 한 권의 소설로 완성해 냈을 때, 그녀는 말했다. ‘결말이, 너무 아름답네요’ 마치 그런 건 거짓말이라는 듯.
청춘의 사랑은 아마도 또 이별할 것이다. 청춘에게는 너무 많은 시간이 있어서, 자꾸 뒤돌아보기 때문이다. 그렇게 뒤돌아보며 자주 ‘말에서 내리기’ 때문이다. 그러다 결국 사랑하는 이를 안타깝게 놓쳐버리고,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나중에야 깨닫고, 그렇게 누군가를 마음에 묻은 채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실패와 아픔이 청춘을 말에서 내리게 할 때마다 청춘은 자신의 영혼을 데리고 가는 법을 배울 것이고. 영영 사라져 버린 한 시절과 한 사람과 한 순간을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가게 하는 법 또한 배울 것이다. 그와 그녀와 요한이 너른 초원에서 말달리는 장면을 보며 끝내 울어버린 건 말에서 내려야 할 때를 너무 멀리 지나쳐 왔다는 자각 때문인지도.
덧. 박민규 작가의 표절 사건을 처음 들었을 때 내 마음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허둥댔었다. 그를 미워하거나 단죄하는 일은 쉬웠다. 혹은 묵인해 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소설을 읽으며 건너온 나의 한 시절은, 그래서 내 마음대로 그와도 어느 정도 함께 했다고 믿었던 그때의 순전한 마음은 미움이나 묵인이라는 말로 손쉽게 설득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나에게 ‘분류 불가능’한 작가가 되었다. 좋아한다고도, 싫어한다고도, 좋지도 싫지도 않다고도 말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재밌는 건 그 후로 삶에는 ‘분류 불가능’ 폴더가 필요하다는 걸 배웠다는 것. 그리고 가끔은 이렇게 분류 불가능 폴더를 열어 무언가를 꺼내 이야기 해야 할 때가 찾아오기도 한다는 것. 여전히 ‘와와 하지 말고, 예예 하지 말라’던 그의 문장을 기억하고 있다. 그도 그 문장을 기억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