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란 사랑보다
여전히 형네 집에 얹혀 살고, 친구의 사업체(?)에서 부장으로 일하며 고리대금업을 하는 태일(황정민). 수금률 하나는 확실한 그는 휘발유를 삼켜서라도 떼인돈은 받고야 마는 남자다.
수협 직원이면서, 혼수상태인 아버지를 돌보는 호정(한혜진)은 "곱상한 외모와 대학까지 나온 빵빵한 학벌"에도 불구하고 각종 독촉장과 고지서 더미, 더구나 아버지가 남긴 사채빚까지 갚아야 하는 채무자인 여자다.
그리고 태일의 가족 - 마을버스를 운전하는 태일의 아버지, 이발소를 운영하는 형네 부부, 그리고 입만 열면 조사 부사로 욕을 해대는 조카가 있다.
태일은 언뜻보면 불량배 같은 인생이지만, 영화는 끈질기게 태일의 소탈한 모습을 부각시키며 그의 사랑을 응원해달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실제로, 2시간 정도 길이의 이 영화에서 태일의 소탈함과 따뜻한 면모를 뺀다면 설득력이 있는 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건 태일의 가족들이 조연 중에서도 꽤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가 비록 사채업자이고, 사람들에게 협박과 위협을 일삼으며 살아가고 있지만,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일말의 여지가 꼭 필요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호정에게 돈을 받으러 간 태일은 신체포기각서에 지장을 찍는 호정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고, 그날부터 태일의 구애는 시작된다.
어떤 포스팅을 보니, 호정은 태일이만 보면 소리를 질러댄다 고 하던데. 뭐 무리는 아니다. 반면에 호정을 바라보는 태일의 표정은 줄곧 저 모습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모르는 태일은 때로 윽박지르고, 위협적인 표정을 짓지만 그의 마음은 늘 저런 표정으로 호정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영화의 감성이 완성되는 건 호정과 태일의 짧은 사랑이 오해와 불행으로 삐걱대다가, 결국 태일이 불치병에 걸려 죽은 후다.
죽기 전에 태일은 아버지에게 말한다. "걔가 아버지가 없어. 그러니까 내가 없더라도 아버지가 걔 만나면 잘 좀 해죠. 아빠처럼." 라면이 그토록 서러운 음식이었나 싶게, 태일은 불어터진 라면을 먹으며 오열한다. 이제 정말 '살고' 싶었을 남자는 그렇게 이별을 준비한다.
스토리가 탄탄하지는 않지만, 영화는 태일이라는 인물이 가진 양면성(악독한 사채업자와 따뜻한 노총각)을 충분히 활용하면서 가족애와 더불어 연인에 대한 이루지 못한 사랑이라는 익숙한 주제를 풀어낸다.
하지만 방구를 부악 뀌고 "사랑해 씨발" 이라고 말하는 태일은 분명 흔치 않은 캐릭터다. 무시무시한 건달도 사랑에만 빠지면 달콤한 말을 줄줄 내뱉는 영화들과는 차원이 다른 솔직함이다. 그리고 그런 태일이 밉지 않은 건, 동네 어딘가에서 실제로 살고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황정민의 자연스러운 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유려한 말과 부드러운 가면을 쓰고 사랑 조차 '보여주기위해' 하겠다는 세태를 꼬집고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사랑이라는 감정은 그 어떤 것보다 솔직하고 적나라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사랑이라는 솔직함을 이런저런 핑계로 포장하고 감추지는 않는지. 태일은 부드럽고 능숙하지는 않지만, 솔직하고 친근하다. 폼나는 애인은 아니지만 호정은 사람들에게 감추고 싶은 부분을 태일 앞에서는 감출 필요가 없다. 사랑 받고 사랑 하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 '나'를 그대로 이해받고 싶어서일거다. 그런 의미에서 호정은 태일에게, 태일도 호정에게 서로의 가장 멋진 모습을 보여주느라 애쓰지 않는다. 대신 호정은 태일을 만나 더 많이 웃고, 한결 자연스러워졌으며, 태일은 호정을 만나 '마냥 신난다.'
짧은 사랑이 끝나고, 태일이 떠났다. 하지만 가족들에게도 호정에게도 다시 일상이 찾아온다. 잔인할 만큼 아무렇지 않게 굴러가는 세상과 시간 속에서 호정은 태일을 만나기 전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하루를 마무리 한다. 그리고 올라탄 태일 아버지의 마을버스 안, 라디오에서는 이문세의 "기억이란 사랑보다"가 흐른다. "내 삶 모든 곳에 그대가 있습니다."라는 디제이의 말처럼, 호정의 일상 모든 곳에 태일이 묻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조용히 오열하는 호정의 모습으로 영화는 끝난다.
사랑을 잃지 않으면, 모든 것을 가진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오열하는 호정을 보며, 저런 사랑을 해 본 태일이 불쌍하지는 않다는 건 이상한 걸까.
마지막 장면을 통해 영화는 삶도, 사랑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일깨운다. 그러니 지금, 곁에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라고. 삶도 사랑도 꾸미고 치장하기에는 어쩌면 너무 짧을지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