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삶을 훔쳐서라도 행복하고 싶었던 여인
공포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영화 '링'처럼 스멀스멀 스며드는 공포다. 귀신이 등장하고, 공포영화 특유의 음악이 흐르고 사람을 깜짝 놀래키는 그런. 다른 하나는 영화 '화차'와 같은 류다. 사람의 심리를 그 끝까지 파헤치고 헤집어서 '나는 아니다'라고 거부할 수 없도록 설득하는 것. 귀신도 없고 별다른 장치가 없어도 등골이 서늘하고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워지는 그런.
한 밤 중에 화장실 갈 때야 전자의 공포가 더 두렵지만, 더 오래도록 뇌리에 남는 건 후자쪽이다. 사람의 심리를 그 끝까지 따라가 파헤친다는 게 이토록 섬뜩하고 무서울수가.
그녀는, 불행했다.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가 끌어다 쓴 사채 빚은 도망간 아버지 대신 모조리 자신에게 돌아와서 신혼의 단꿈마저 빼앗겼다. 도망칠 수 있을거라 생각했지만 결국 사창가에 팔려간 그녀는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돼서 겨우 그 지옥을 탈출했다. 누구의 아이인지 모를 그녀의 아이가 죽은 날, 그녀는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나'로 살지 않겠다. 그녀에게는 그녀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사람이 필요했고, 그건 결국 그녀와 비슷한 입장에 처해있는 사람들이었다.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
화차를 보는 내내 영화에서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건 탄탄한 스토리와 연출력 덕분이다. 그녀의 약혼자가 그녀의 과거를 하나하나 찾아다닐 때, 그녀가 앉아 있던 자리에 그가 앉아 그녀의 모습을 상상할 때,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입장이 돼서 그녀를 이해하고 싶어진다.
그녀의 고통을 이해할수록, "나는 사람이 아니야. 쓰레기야." 라고 포기한 듯 중얼거리는 그녀가 안타깝다. 나를 규정하는 모든 것들을 빼앗기고도 한 명의 인간으로, '나'로 살아갈 수 있을까. 삶도 사랑도 모두가 나 아닌 타인들의 이야기인 것만 같은 박탈감과 현실적인 불행 앞에서 건강한 자존감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분명 많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그녀의 극단적인 선택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결혼을 약속한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이 모두 그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을 때, 내가 아는 것들이 그녀의 '실재' 혹은 '본질'이 아니라 빈 껍데기 뿐이라는 걸 알게 됐을 때 분노 보다는 안타까움을, 배신감보다는 동정을 느껴봐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말한다. 평범하게 살기 위해 스스로를 버리고 타인인척 해야 했던 그녀의 고통에 공감할 때, 우리는 그녀의 잔혹함을 눈감아주는 게 아니라 그녀의 본질에 눈뜨게 된다. 그 잔혹함이 실은 나약함이었다는 사실을.
점점 괴물로 변해가는 그녀는 결국 스스로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택한다. 영화는 엔딩크레딧이 오르기 직전까지 과연 누가 그녀를 욕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잔혹한 범죄를 감싸자는 얘기가 아니라 그런 범죄를 양산하는 사회구조,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묻는 것이다. 사회는 고도로 발전했지만 여전히 혼자인 사람들, 보여지는 것과 달리 외롭고 고독한 사람들이 스스로의 존엄성마저 박탈당할 때, 사회는 위험해진다. 그들이 스스로 삶을 포기하든, 타인의 삶을 훔치려하든, 원인은 한 가지다. 그들을 지켜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 자본이 그런 안전망을 만들어주지 못한다는 건 자명하다. 그리고 남은 희망은, 다시 사람이다. 마지막까지 그녀를 포기하지 않은 약혼자의 존재는 그녀의 마지막 순간에 자장가를 떠올릴 수 있게 해주듯이 사람을 보호할 안전망은 사람이 만들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