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회>

당신 인생의 명장면은 무엇입니까?

by 이상희

"제 인생의 명장면이죠."


밀회 마지막회, 혜원이 최후변론에서 한 말이다. 선재가 자신의 앉을 곳을 마련하기 위해 정신없이 걸레질을 하던 모습을, 그녀는 자신의 인생 최고의 장면이라 말했다.


'상류사회'에 진입하기 위해 자신의 20대를 모두 바친 혜원은 재벌가에서 삼중첩자의 역할을 맡고 있다. 그들의 치부를 감춰주고, 대신 뭇매를 맞고, 곤란한 일을 처리해주는 대가로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얻지 못했을 값비싼 집과 차와 옷을 가지게 된 그녀. 하지만 그녀 안에는 포기한 음악에 대한 열정과 얻지 못한 사랑에 대한 갈망이 남아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선재를 만나 다시 음악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고, 태어나 처음으로 타인에게 사랑까지 받게 된 혜원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 시작한다.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여겼던 일들이 견딜 수 없는 모욕과 치욕으로 느껴지고, 혜원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가난해도 내 삶의 주인으로 살 것인가, 부자인 노예로 살 것인가.


혜원은 자신이 누려온 것들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스무살 선재는 순수하고 아름답지만, 혜원이 누려온 것들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쥐가 나오는 단칸방에서 집주인이 버리고간 피아노를 십 년도 넘게 쓰고, 공고를 함께 졸업한 친구들과 치맥을 즐기는 게 낙인 선재에게 가기에 혜원은 선재의 말마따나 '여신' 같은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혜원은 조금씩 깨닫는다. 그 여신이란, 자신이 입은 옷, 자신이 든 가방,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보고 한 말이 아님을. 오히려 선재의 빛나는 재능을 편견 없이 알아봐 준 음악에 대한 열정,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결코 옳은 일이 아님을 알고 있는 한가닥의 양심이 내 준 빛임을.


혜원이 스스로를 부끄럽다고 여기게 된 계기. 조선족 아주머니와의 만남.

드라마 중반, 그런 혜원이 좀 더 극적으로 자신의 처지를 깨닫는 사건이 나온다. 혜원이 모시는 회장님이 치근덕대던 소머리국밥집의 조선족 아주머니를 만나면서 혜원은 드라마의 그 어느 장면에서도 볼 수 없었던 당혹스럽고 부끄러운 얼굴을 보인다. 회장님의 바람을 눈치챈 회장 부인의 지시로 조선족 아주머니를 찾아간 혜원은, "자기 인생의 주인은 자신이다. 돈 같은 걸로 날 어찌해보려고 해서 다신 안만나기로 결정했다. 내가 만날 사람은 내가 정한다."는 아주머니의 말에 절망한다. 그런데도 돈을 건네며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는 확실한 약속을 해달라는 혜원. 그러자 아주머니는 혜원의 얼굴에 물을 뿌리며 말한다. "최고급으로 꾸미고 앉아서 참 거지같이 말한다."고. 혜원이 황급히 물을 닦는 손길, 머리를 매만지는 뒷모습에서,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인간적인 절망이 느껴진다. 최저시급을 받으며 험한 일을 하면서도 인간으로서, 여자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겠다는 그녀 앞에서 스스로가 얼마나 작아졌을지.


모든 것을 버리고 감옥에 간 혜원과 그녀를 면회 온 선재.

혜원은 결정한다. 가난하더라도 내 인생의 주인이 되기로.


드라마를 다 보고 나면, 왜 부유한 마흔 살의 유부녀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스무 살의 청년이 만나 사랑해야 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드라마는 그들의 사랑에 초점을 맞춰 불륜이라는 멍에를 변명하기 보다는 혜원의 존재가 변화해가는데 초점을 맞춰 한 인간의 성숙을 보여줌으로써 절묘한 균형감을 잃지 않는다.


대궐 같은 집에서도 늘 불면증에 시달리던 혜원이 감옥에서는 코를 골며 마음 편히 자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자본이 주인이 된 세상, 혹은 욕망이 인간을 삼킨 세상에서 인간이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는 길은, 스치듯 지나치는 내 인생의 명장면을 놓치지 않는 것 뿐이다. 내 존재를 온전하게 사랑하는 것, 그렇게 사랑받는 것, 또한 그렇게 타인을 사랑하는 것만이 형체 없이 존재를 공격하는 자본과 욕망에 길들여지지 않는 유일한 길일테니까.



그래서 다시, 묻는다.

내 인생의, 그리고 당신 인생의 명장면은 무엇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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