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미술관 옆 동물원>

기대없는 사랑, 그렇게 로맨스는 완성된다.

by 이상희

중학교 때 주말이면 친구네 집에 모여서 비디오를 빌려 보곤 했었다. 과자를 잔뜩 사서 뜯어 놓고 최신 유행하는 비디오를 보며 뒹굴거리는 게 얼마나 재밌었는지. 어느 날에는 "심은하 나온대" 한 마디 때문에 <미술관 옆 동물원>을 빌려와서 보다가 우린 모두 잠들고 말았다. 별 사건도 액션씬도 없이 잔잔히 흘러가는 멜로 영화라니. 말괄량이 여중생들에게는 지루했나보다.


시간이 흘러 첫 사랑도 첫 이별도 모두 겪고 난 후 다시 보게 된 <미술관 옆 동물원>은 참 아기자기하고 포근한 영화였다. 항상 짝사랑만 하는 춘희와 사랑 앞에 솔직하고 망설임 없이 돌진하는 철수는 영화의 제목처럼 너무나 다른 사람이지만 두 사람은 사랑을 만들어 간다.




연애의 경험을 통해 가장 크게 변하는 게 있다면, 사랑이 뭘까에 대한 대답일 것이다. 사랑이 무작정 서로에게 끌리고 다가가는 것이라는 생각은 일면 타당하지만 또 한편으론 타당하지 않다. 사랑도 결국은 관계이며, 관계란 '감정'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뜨거운 감정이 사랑과 관계를 시작하는데 필요할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 더 정확하게는 그것에만 의지해서는 관계가 유지되기 힘들다.


풍덩빠지는 사랑을 꿈꾼다는 것은, 어쩌면 사랑을 향한 나의 이상과 꿈을 상대에게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 아직 잘 알지도 못하는 대상을 향한 나의 감정과 '아마도 그는 이럴 것이다' 라는 기대만으로 시작한 관계는 나의 감정이 변하고 기대가 채워지지 못하면 쉽게 끝나버리고 만다.


물론 그렇게 관계를 흘러가도록 경험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계속해서 나의 감정과 기대에 의지해 사람을 만나는 일은 자극적일수는 있지만, 편안하거나 의미있기는 어렵다. 편안하고 의미있는 관계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나의 감정과 기대가 상대의 본 모습을 보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상대에게 바라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니라 그저 나의 감정과 상상에서 비롯된 기대일뿐이라는 걸 깨달아야, 비로소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된다.


첫 눈에 반하지도 않는다니! 로맨스가 떨어진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진짜 로맨스는 나와 상대가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아닐까?




같이 지내는 내내 투닥거리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던 춘희와 철수는 그 기대없는 상황 속에서 비로소 진짜의 자신을 보여주었음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진짜의 서로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사랑이었음을.


그들이 사귀게 된다고 해도 춘희는 여전히 낮과 밤이 바뀐 채 살아갈 것이고 철수는 지저분한 춘희의 화장실 선반을 정리해줘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그런 모습은 서로의 기대를 무너뜨리지도, 감정을 식게 만들지도 못할 것이다. 그들의 사랑 안에는 순간적인 감정이나 기대보다는 상대의 이해할 수 없는 습관이나 성격에 대한 깊은 이해와 인정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풍덩 빠지는 사랑이 아니어도 <미술관 옆 동물원>은 충분히 로맨틱한 영화다.


사랑이란 게 풍덩빠지는 건줄만 알았지,
이렇게 서서히 물드는 건 줄은 몰랐어.


춘희의 대사처럼 말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