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준 시인의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시집은 치매 걸린 아버지를 보며 쓴 시집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읽었다.
가까이에서 작가 자신을 있게 해 준 아버지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며 그 행동 하나에도 언어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해 본다.
이 시를 통해 나의 아버지는 나에게 어떤 의미이고 어떤 존재였을까 생각하며 그 시절 나도 아버지를 기억이 아닌 글로 서술했었다면 하는 마음이 든다.
언니 이후 내리 아들 셋 낳고 얻은 딸을 어릴 때부터 애지중지하셨던 나의 아버지.
대여섯 살의 키 작은 내가 아버지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다니며 위를 쳐다보면 아버지는 우뚝 선 나무였다.
웃으면 선한 인상이 두드러지며 눈까지 함께 웃어주었다.
키 작은 내가 성인이 되어 바라본 아버지는 우뚝 선 나무처럼 크지 않았고 돌아가시기 전의 모습은 허약해 질대로 허약해지셨다.
힘든 항암 치료를 이겨내려 애쓰시는 중에도 자식들에게 기대기를 거절하시고 돌아가시기 전날까지도 혼자 화장실 문을 잠그고 들어가셨다.
자식들의 도움 좀 받으시라고 질타를 받으면서도 한 인간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려 하셨던 나의 아버지.
중학교에 입학한 날은 멀리 읍내에까지 직접 데려다주시며 지인인 영어선생님께 딸을 부탁하셨다.
아버지의 얼굴에 먹칠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열심히 하려 했지만 영어는 지금도 이 세상에서 가장 난해한 문자다.
언니 오빠들은 중학교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사회에 내 보내 스스로 자기 앞가림하게 했다.
그 시절 대학에 진학하는 자녀가 거의 없는 농촌에서 떼쓰는 막내딸의 요구를 무시하지 못하고 등록금 48만 원을 구해 입학을 시켜주셨다.
그나마 대학 다니는 딸이 뭐 한 가지라도 잘하면 동네분들에게 자랑하는 재미가 있으셨던 듯하다.
내가 아이들을 키워보니 자식이 잘하는 것이 있으면 마음이 뿌듯하고 그 사소한 것으로도 삶이 행복해진 것을 보면 말이다.
부모의 마음은 내가 부모님의 그 나이가 되었을 때 어느 정도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지만 이미 부모님들은 가시고 안 계신다.
대학 졸업식날 부모형제자매 모여 졸업을 축하하고 식사하는 잔칫날이었다.
사진 속 아버지는 학사모를 쓰시고 흡족한 모습으로 서 계셨다.
결혼하고 아기를 낳아 친정에서 몸조리할 때 밤낮으로 젖 먹이느라 피골이 상접해가는 딸에게 아기 흔들 침대를 슬며시 밀어주셨다.
그때는 손주를 위해 사 오셨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건 딸을 위한 흔들 침대였다.
마지막 돌아가시기 직전 임종 호흡을 하는 아버지를 시골집으로 모셨다.
임종을 알리는 연락을 받고 도착했을 때 아버지가 미동하지 않아 돌아가신 줄 알았다.
크게 "아버지" 하고 불렀을 때 아버지가 힘겹게 눈꺼풀을 힘껏 들어 올리고 다시 눈을 감으셨다.
마지막 가시는 때까지 아버지에게 키워주시고 아낌없이 사랑해 주셔서 감사했다고 끊임없이 이야기해 드릴 걸 하는 후회가 있다.
어느 것 하나 후회되지 않는 것이 있을까마는 많이 어루만져 드릴 걸, 많이 대화해 드릴 걸, 많이 찾아뵐걸, 껄껄껄하는 껄떡새가 되었다.
박연준 시인은 치매 걸린 아버지를 옆에서 보살피고 그 모습을 글로 쓰면서 아버지에 대한 이별 준비를 했으리라.
글을 통해 자신의 마음도 어루만지고 사랑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눈으로도, 마음에도 담아낸 박연준 시인이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