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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로토 May 15. 2024

오해된 나를 비켜갈 것이다

나는 오해될 것이다. 너에게도

바람에게도

달력에게도.


나는 오해될 것이다. 아침 식탁에서

신호등 앞에서

기나긴 터널을 뚫고 지금 막 지상으로 나온

전철 안에서

결국 나는

나를 비켜갈 것이다.


갑자기 쏟아진 햇빛이 내 생각을 휘감아

반대편 창문으로 몰려가는데

내 생각안에 있던 너와

바람과

용의자와

국제면 하단의 보트피플들이 강물 위에 점점이 빛나는데.


너와 바람과 햇빛이 붙잡지 못한 나는

오전 여덟 시 순환선의 속도 안에

약간 비스듬한 자세로 고정되는 중.

일생을 오해받는 자들

고개를 기울인 채

다른 세상을 떠돌고 있다.


누군가 내 짧은 꿈 속에

가볍게

손을 집어넣는다.


- 이장욱의 시 <오해>



십여 년 전에 딸이 이름을 바꿨다. 언니도 애들 고모도 이름을 바꿨다. 아주 예전보다 개명절차가 훨씬 간소화되어 신청하고 얼마 되지 않아 어렵지 않게 바꿀 수 있다 한다. 엄마가 지어준 이름을 20여 년 사용하고 난 후 딸은 자신의 인생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가차 없이 철학관을 통해 이름 짓고 개명하겠다고 통보한다. 이 어린 나이에 자신을 바꾸고 싶은 모습은 무엇이었을까. 환갑을 전후한 어른들이 이름을 바꾼 이유도 궁금하다. 자신의 살아온 어떤 모습을 부정하고 싶은 것일까. 자신의 한 생을 어떤 모습으로 리모델링하고 싶은 것일까.


스스로 자신을 포장하고 다듬는다. 얼굴을 성형하거나 보톡스 주사로 현실을 스스로 오해시키는데 애쓴다. 나이가 들어서 주름살만 펴는 줄 알았다. 젊은 나이에 더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 자연스럽게. 학벌에 대한 부끄러움을 학력으로 포장하기도 한다. 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나답게 살기 위해 몸부림친다.

 

타인에 의해 오해되어 가기도 한다. 도시철도 순환선의 속도 속에서 비스듬하게 내가 고정되어 가는 것처럼.  

직장에서 오랜 시간 함께 일한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의사이고 한 사람은 간호사이다. 협업하는 관계로 일해온지 20여 년이다. 그 세월만큼 돈독해지는 사이면 좋겠지만 묵묵히 살이낼수록 삶은 꼬인다. 오해를 풀기 위해 말을 보태면 무구한 조작이 더 우세해진다. 남루한 인생이 더 오해된다.


사람이 오해로 평가되는 것만큼 억울한 일도 없다. 외모는 볼 수 있지만 마음은 느낌이므로 마음을 보여줄 수도 없다. 입을 열어 가공하고 포장하면 덧입힐수록 본질이 감추어진다. 타인에게 이야기하면 듣는 사람의 해석이 가미되어 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엊그제 속상하게 하는 일이 있었다. 전하는 사람은 결과만을 이야기했는데 전해 듣는 사람은 이미 상대방이 어떤 생각을 했을지까지 유추해 버린다. 상상의 나래를 폈다. 상대방의 행동양식을 이해할 수 없다며 성토대회가 열렸다. 도마 위에서 무성한 입질로 한 사람을 매도하고 흠씬 두들겨주고 나니 흡족해졌다.  


후배 동료가 출근하자 또다시 간략하게 정리하여 나의 감정에 동조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전 일을 브리핑하였다. 속상하다고 말했다. 왜 그 사람은 앞에서는 말을 못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하나 모르겠다고 했다. 말을 전해준 사람과는 모든 면에서 잘 맞는데 뒷담을 하는 그 사람은 더 오래 함께 일했어도 평생 안 맞을 거라고 말했다. 


후배동료의 일침이 가해졌다. '말 전해준 사람 이야기는 절반만 사실이라고 걸러들으라면서요' '나도 뒷담화를 하며 살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충분히 뒷담화하는것 이해합니다. 앞담만 안 하면 문제없죠' ' 제가 오해받을 때 별것 아니라고 말하셨잖아요. 이것도 별것 아니에요. 그 당사자가 되니까 더 크게 느끼는 것뿐이에요'


나보다 어른스럽다. 언제 이렇게 성숙해졌지. 맞다 맞다 고개를 위아래로 세차게 흔들게 만들었다. 내가 또 오해했구나. 너를 오해했고 내가 오전 내내 뒷담 한 사람을 오해했구나. 나만 오해된 것이 아니다. 내가 오해되는 것만 생각했다. 내가 타인을 수준의 해석으로 오해하며 살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다. 신기하게도. 언제나 '나는 옳음'이라는 기준을 두고 살아왔다는 뒤늦은 깨우침. 


이처럼 순간의 진실을 마주하고 나에게 주어진 과업을 준수하며 살아가다 보면 삶은 조금씩 변화할 것이다.

이장욱 시인의 말처럼 나는 오해될 것이지만 결국 나는 나를 비켜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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