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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로토 May 16. 2024

시가 내게로 왔다

24년 5월 15일 석가탄신일, 스승의 날, 또 무슨 날로 명명된 날이다. 오롯이 쉬는 날이 생기면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서 뒹굴뒹굴 아무 생각 없이, 멍 때리기 대회처럼 지내보고도 싶다. 그러다가도 그 하루가 아깝다. 평소에 못한 것을 해보고 싶다. 


어제는 그 귀한 시간을 내게 기념해 주고 싶었다. 며칠 전부터 계획한 대로 서점으로 향했다. 인터넷으로 서점개장시간을 확인하고 문 열기 전에 출발하였다. 터미널 하며 백화점 하며 식당 하며 번화가에 있는, 이 도시에서 가장 큰 서점이다. 차를 주차하고 오로지 다른 곳에 눈 돌리지 않고 서점으로 직진하였다. 오랜만에 가는 곳이라 마음이 설레었다. 책을 뒤적이는 사람, 벌써 한자리 차지하고 않아서 책 읽는 사람, 그래도 한가하고 넉넉한 공간이 마음의 공간만큼 여유롭다.


내가 처음 만난 시집은 고등학생 때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된 세계명시다. 장사치가 학교마다 돌면서 판매하는 것을 산 것이다. 처음으로 듣는 릴케의 시, 롱펠로의 시 등. 아름다운 목소리의 소유자가 녹음한 시는 잔잔한 물소리나 새소리를 배경으로 흘러나왔다. 대학 때는 시보다 더 시적인 연애를 하느라 시집은 사지 않았다. 친구가 선물한 시집 한 권이 다였고 그나마 한두 편 읽다 말았을걸. 그때는 친구나 연인들에게 시집 선물은 가장 보편화된 것이었다. 


직장 생활하면서 기인 냄새가 나는 류시화의 시집 한두 권 사 본 것이 전부다. 삶 깊숙이 침투한, 내밀한 향이 나는 시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겉멋은 들어 철학적인 느낌이 나는, 내 것과 동떨어진 삶을 동경하였다. 내 손으로 시집을 사본 것도 20대로 끝났다. 이십 대 중반에 삶의 최전선으로 인생 부대가 옮기면서 영화도 아이들 영화만 강제 관람해야 하는 시기이듯이, 책도 동화와 동시 위주로 읽게 되었다.


먹고사는 것이 치열했을 때는 나를 들여다볼 시간이 없었다. 아니 방법을 몰랐다. 일에 매몰되어 척박한 땅을 일구느라 마음의 강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러나 원래 있었던 물줄기는 다시 순리대로 물이 흐르기 마련인가 보다. 40대가 된 어느 날부터 책이 보였고 내 발로 서점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때는 이 도시의 대형서점 인심이 풍부하여 몇 시간이고 의자에 앉아 책을 볼 수가 있었다. 고른 책 한 권을 다 읽고 다른 책 한 권을 사 오는 재미가 쏠쏠했다.


고통스러운 때일수록 시에서 위안을 찾고 안식을 얻었다는 은유작가의 '올드걸의 시집'을 읽으면서 시집을 사보고 싶었다. 작가가 안내해 주는 시들이 은유되는 것도 좋았고 사유의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도 좋았다. 특히 보석 같은 시구들이 함축된 언어로 정제되어 어릴 적 시냇가의 맑은 물속에 있던 돌멩이을 집어 든 느낌이었다.


시집코너로 직행했다. 몇 달 전에 나태주 작가, 정호승작가, 한강 작가의 시집을 샀던 그 자리를 가늠하면서. 매대 위에 배를 드러내고 누워있는 책들만 눈으로 스캔하였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도 자주 등장했던 이육사, 한용운 시집을 훑어보고 한두 번은 들어봤음직한 책들을 들어 살펴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다가와 허리를 숙여 매대 아래의 책을 꺼낸다. 나의 눈길도 자연히 아래로 갔다. 아, 이곳에도 시집이 숨어 있었구나. 쪼그리고 앉아 훑어보다 한 권을 집어 들고 읽었다. 앉을자리를 찾아봐도 예전의 풍족했던, 인심이 묻어나던 넉넉한 독서공간은 없었다. 걸으며 시집 한 권을 읽는데 짠한 마음도 들었다 웃음도 났다 삶 깊숙이 침투한 언어들이 가슴에 꽂혔다. 


예전처럼 책 한 권 공짜로 읽은 가성비를 경험하며 세로로 세워져 있는 시집책장으로 가서 안도현작가, 김용택 작가의 시집 두 권을 골라 나왔다. 주차비 사전 정산을 하는데 할인을 제하고도 9,600원이 나왔다. 서점이라는 공간이 주는 지적인 느낌을 만끽하고 이름 모를 시인의 시집을 사지도 않고 선 자리에서 다 읽은 값이다. 내 또래 시인의 시집을 슬며시 제자리에 끼워 넣으며 미안했던 마음값을 서점에 치렀다. '시간은 돈이다'라는 격언을 몸소 체험하며 책 한 권 내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면서도 얌체처럼 행동하다 뒷덜미를 잡혔다. 


시집을 읽으면 시인들의 색깔이 보인다. 어릴적 정형화된 시들만 생각하다가 이제는 틀을 벗어난 시들도 보게 된다. 사랑스러운 시구도 있고 이것도 시구나 하는 것도 있다. 알맹이만 쏙 빼놓은 말들, 이야기들. 자연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집안의 풍경을 보여주기도 한다. 방안의 풍경을 넘어 내 안의 이야기를 널어놓은 모습이 시였다. 큰 모습에서 작은 모습으로, 다양한 모습을 하고 시가 내게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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