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느라고 애들 쓴다
오늘은 시도 읽지 말고 모두 그냥 쉬어라
맑은 가을 하늘가에 서서
시드는 햇볕이나 발로 툭툭 차며 놀아라
김용택의 시 <쉬는 날>
직장에서는 쉬는 날이지만 일주일에 한 번 겸임으로 간호대학 학생들 수업이 있는 날이다. 어제 문자통보를 받았다. 간호법 제정 관련 궐기대회차 4학년들만 서울 간단다. 그래서 보강날짜 잡아 다른 날 수업하라고. 이런 날은 다시 날 잡아 수업할지언정 공짜 휴일이 주어진 것 같아 기분 좋다. 쉬는 날이 생긴 것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뒹굴뒹굴 놀아도 좋다.
새벽 5시에 일어나 글쓰기를 하였다. 요즘 새롭게 짜인 글쓰기 시간인데 이 시간이 없었다면 맘만 먹었지 한 자도 쓰지 못했을 것이다. 게으름을 덕지덕지 달고 사는 나는 어느 시스템에 가두지 않으면 계획의 반의 반도 이루지 못함을 알기에 강제적으로 계획실행하는 것을 달갑게 받아들인다.
글 한 꼭지를 완성하고 흡족하게 발행한다. 오늘이라는 쉬는 시간이 이렇게나 많이 남아있으니 기분이 좋다. 아무거나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무계획의 시간이 주어진 자유를 만끽한다. 여느 아침에는 출근시간인 7시에 뚝딱뚝딱 음식을 만들어 나만의 아침 정찬을 먹는다. 황후가 부럽지 않다.
혈당이 오르는 소리가 들린다. 남들은 자연스럽게 내분비계가 작동하여 혈당 불을 끄겠지만 나는 운동을 통해 소화시켜야 한다. 살다 보니 새롭게 생긴 친구다. 사느라고 애를 쓰다 보니 내게 새롭게 생긴 혈당 스파이크라는 친구가 다가와 있었다. 어릴 때는 좋아하는 친구하고만 골라 사귀어도 되었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내가 원하는 관계만이 인연은 아니었듯이 어느덧 내 옆에 조용히 다가와 있으니 안아줄 수밖에.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식후 한 시간 이내에 반드시 걷거나 뛰어야 하므로 근린공원으로 직행했다. 모자 쓰고 얇은 긴팔의 운동복으로 피부를 가리고 보통걷기, 빨리 걷기, 파워워킹을 번갈아가며 하고 들어오니 땀이 범벅이다. 쉰내가 풀풀 나지만 만족스러운 냄새다. 남이 하면 불륜이지만 내가 하면 사랑이듯이 내 안에서 풍기는 냄새는 향긋하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마저 읽었다. 어느 때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한번 읽었던 책이라 쉽게 내용이 다가왔다. 그때는 등장인물이 하도 많고 한 사람을 부르는 이름도 여러 가지라 헷갈렸는데 이제 제법 줄 긋기가 잘 되었다. 두께도 다른 책들의 두 배다.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 '인생의 베일'에 이어 영국 작가들의 책을 연이어 읽게 되는 5월이다. 이 책들을 통해 19세기와 20세기에 걸친 유럽의 문화를 엿볼 수 있었다. 시대적, 공간적 배경이 비슷하니 결혼 풍속도, 남성 우월주의도 비슷하였다. 이런 보편적인 문화 속에서 독특함이 묻어나는 주인공들을 대하면 사이다 같은 청량감이 느껴진다.
점심 식사를 지중해식 샐러드로 간단히 마치고 나서는 한강 작가, 김용택 작가, 안도현 작가의 시집을 꺼내어 읽으며 노닐었다. 김용택 시인이 쉬는 날 시도 읽지 말고 쉬라고 했는데, 시드는 햇볕이나 발로 툭툭 차며 놀아라 했으니 이렇게 간절히 원하시니 시인의 말씀을 따를 수밖에.
요즘 주식시장이 핫하므로 유튜브를 열어 열기를 느껴보았다. 주가가 오르지 않는 주식도 매도하고 거인의 등에 올라타기 위해 매수도 하고. 등을 바닥에 대고 뒹굴거렸다. 엔비디아 실적이 잘 나와 천비디아가 되는 것도 목격하고 내 주식은 얼마나 잘 올라가는지 확인하다 스르르 잠도 들고. 비자발적 장기 투자자로 등극시킨 차이나전기차의 파란불은 눈을 감아본다.
이른 저녁을 먹고 근린공원을 가볍게 뛰었다. 오늘은 오후 6시면 만나는 트랙 위의 사람들과 목례로 눈인사도 나누었다. 여유가 또 다른 인성을 만든다. 빠른 걸음으로 오늘의 운동 요가를 하러 간다. 차를 마시며 차담을 나눈다. 명상까지 마무리하고 집에 돌아와 직접 만든 두유 한잔으로 단백질을 보충해 주었다. 쉬는 날 맑은 하늘가에 서서 시간을 발로 툭툭 차며 놀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