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지는 인스턴트 홍수 속에서 나만의 요새 짓기

나의 취향을 알게 되면, 그것은 든든한 안식처이자 은신처가 된다.

by 밍봄

OTT와 개방형 동영상 플랫폼의 등장으로 우리는 문자 그대로 ‘콘텐츠 홍수’의 시대에 살고 있다.

매일 새로운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이 나오고 매월, 매주 새로운 영화가 개봉한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틱톡에는 평생을 봐도 다 보지 못할 만큼 어마어마한 양의 콘텐츠가 쏟아지고 있다.


부자든, 부자가 아닌 사람이든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공평한 조건은 딱 하나, 하루가 24시간이라는 거다. 24시간 중 일하는 시간, 잠자는 시간, 사람들과의 약속시간을 빼면 시간이 얼마 남지 않는다. 그러니, 효율적으로, 나의 취향에 맞는 영상들을 취사선택 해야 한다. 이렇게 선택지가 많은 세상일수록 내 취향을 갖는 것의 중요성은 더더욱 커진다. 내 취향에 맞는 영상들을 얼마 없는 시간 동안 쏙쏙 골라봐야 만족감이 더 커지고 삶이 풍성해짐으로.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 속에서 취향을 잃어버릴 확률이 더 많다. 의식적으로 내 취향은 뭐지?라고 나의 취향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으면 내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된다. 분명 사람은 각자의 우주를 갖고 있는데, 각자의 세계가 분명히 존재하는데, 내가 어떠한 우주를 갖고 있는지도, 어떠한 세계가 내 안에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돼버리는 것이다.

의미 없는 스크롤질, 쇼츠, 릴스와 같은 짧은 콘텐츠로 즉각적인 만족을 얻고 끊임없이 정보를 소비하는 우리. 이 과정에서 깊이 있는 사고와 집중력이 약화됨과 동시에 나에게 의미 있는 정보를 소비하는 것이 아닌 그저 시간을 흘려보낸다. 시간이 흘러간다 줄줄줄-


이런 세상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세상이 언제 이렇게 인스턴트 음식처럼 변해버린 것일까? 뭐든 빨리빨리, 그리고 더 짜고, 더 맵게.’


이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살면, 이러다가 무색무취의 인간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며 위협감을 느꼈다. 아무 매력도 없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라니, 적어도 나만은 나의 가장 친구가 되어주면서 살아야 하는데 제일 친한 친구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어떤 우주를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니, 말도 안 된다.


그때부터 나의 취향을 갈고닦기 시작했다. ‘나를 살게 하는 것들‘의 목록을 만들었다. 그리고 매달, 이달의 시상식을 열기 시작했다. 그달에 본 드라마부터, 소비한 것들, 갔던 장소, 만난 사람들, 이달의 음악, 이달의 책, 이달의 문장 등을 적어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내 취향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달의 시상식을 매달 열면서 반성과 회고를 같이 하며 개선점을 찾게 되었다.

‘아 내가 이번 달에는 책을 덜 읽었구나, 이번 달에 읽은 책은 소설분야에 치중되어 있었네? 뭔가 회피하고 싶고 아무 생각을 하고 싶지 않은 달이었나?’라고 돌아보기도 하고, ‘이번 달엔 이런 음악에 빠져있었구나’를 알게 되기도 하고, ‘이번 달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났네, 나만의 시간이 너무 없었다’라고 나를 돌아보기도 했으며, ‘나는 이런 문장에서 이번 달에 힘을 받았구나’라고 나를 하나 더 알아가기도 했다.


이 과정들과, 나를 알아가기 위한 여러 방법들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의 취향은 꽤나 확고하고, 마이너 기질이 있으며, 자극적인 걸 별로 좋아하지 않고 고요함을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하나를 좋아하면 끝까지 파보는 덕후기질도 있고, 좋은 것과 싫은 것이 명확한 경계를 가진 사람이었다. 내 취향은 뾰족하고 선명한 색깔을 갖고 있었다.


쏟아지는 인스턴트 콘텐츠들의 사이에서 난 나만의 방식으로 나의 취향을 담은 콘텐츠들을 찾아내었다. 인스턴트와는 거리가 아주 먼, 롱폼이자 무자극의 잔잔한 영상들을.

시류를 쫓아 인스턴트 인간이 되기보단, 나의 취향을 설계하고 취향의 것들로 삶을 채워나간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채우고 , 내 삶을 선명하고 다채롭게 하는 것들을 가득 주워 모아 내 삶 안으로 담아낸다. 다람쥐가 도토리를 잔뜩 모아 입안에 빵빵히 담아내듯이.


무언가를,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다는 건 어쩌면 굉장한 재능 중 하나다. 꼭 그만큼 삶이 넓고 깊어진다. 싫어하는 것들은 금방 잊어버리고,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을 늘려가면서 살고 싶다고 매 순간 생각한다.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이 늘어날 때마다 싫어하는 것들이 나를 침범해 올 때 숨거나 도망갈 수 있는 요새를 짓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나는 매번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을 업데이트한다. 나의 취향과 대비되는, 내가 싫어하는 것들이 나를 침범해 올 때 좋아하는 것들의 요새에서 맘껏 숨어있고 이 요새로 도망갈 수 있도록.


칼날 같은 빗방울도, 송곳 같은 벼락도 내게 상처 입힐 수는 없다. 나에겐 요새가 있으니까.

나를 아프게 할 것들은 내게 올 수가 없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굳세게 요새의 문을 걸어 잠겄으니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만들어진 이 요새는 나에게 아주 든든한 안식처이자 은신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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