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낙원, 도망친 곳에 천국은 없다며?
나는 사랑이 무서웠다. 그래서 도망치곤 했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던데, 그래서 이곳은 낙원이 아닌가?
친구들은 매번 내게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넌 참 신기한 게, 너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엄청난 똥차야. 똥차 중에서도 똥차만 골라.
근데 또 너를 좋아해 주는 사람은 벤츠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부정하고 싶었지만 너무도 맞는 말이어서 나는 차마 부정할 수가 없었다. 중학교, 고등학교의 학창 시절 내내 난 누군가를 좋아했고, 좋아함을 넘어서 사랑이란 감정까지 도달했다, 아주 순식간에.
열렬히 사랑했다. 나의 미숙했던 시절 내내.
내가 좋아하던 그들은 하나같이 똥차였다. 이루 말할 수도 없이 형편없었던 그들로 인해 나의 순수하고 투명했던 사랑은, 하나같이 다 흙먼지를 뒤집어쓰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나에게 흩날렸던 흙먼지는 나의 순수했던 마음을 헤집어놓음과 동시에 사랑에 대한 두려움까지 보내왔고, 이는 내 마음속에 안착하여 꾸준히 내 사랑을 헤집어놓곤 했다.
사랑하는 게 무섭다. 정확히 말하면, 아무것도 아닌 사이에서 나의 호감과 사랑을 먼저 표현하기 두렵다. 사랑은 용기 있는 자가 쟁취한다는 말이 있다. 용기가 없는 난, 내가 원하는 사랑을 쟁취할 수가 없다.
중학교 1학년, 좋아한다는 게 어떤 감정인 지를 알려줬던 그, 이성으로부터 받은 첫 충격과 상처 또한 줬다.
처음으로 엄청나게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좋아하는 마음과 설레는 감정을 가득 담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빼빼로 직접 만들어 선물하기’에 도전했다. 다이소에서 틀을 사고, 초콜릿도 비싼 초콜릿으로 마트에서 사서 집으로 와 뜨거운 불 앞에서 열심히 초콜릿을 녹였다. 미숙한 솜씨지만 그래도 정성을 담아 빼빼로를 완성했고, 예쁜 포장지에 담아 설레는 마음으로 내일을 기다렸었다.
그렇게, 다음날. 학교를 가서 그 아이에게 빼빼로를 전달했다.
내향형인 나에게 정말 큰 용기였다. 두 볼을 발갛게 물들인 채, 학교에서 그에게 빼빼로를 전달했다.
나는 그가 좋아할 줄 알았지만,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그는 본인을 놀리며 자기도 먹어도 되냐고 얘기하는 친구들에게 다 먹으라며 그냥 통째로 줘버렸다.
” 필요 없어, 너 먹던가. “
그렇게 내 용기와 정성은 싸그리 무시당했다. 나를 가리키며 차였다고 얘기하며 나를 놀리던 그의 친구들. 며칠 동안 난 우리 반 장안의 화제였다.
사실 그땐 너랑 나랑 사귀게 된 첫날이었는데 말이야. 난 우리가 사귄 지 1일째인, 역사적인 첫날에 그렇게 조리돌림을 당했지 뭐야. 그리고 친구들이 우리가 사귀는걸 눈치챘다며 나에게 헤어지자고 하던 너. 그 상처는 거의 15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마음속에 깊게 파여 남아있더라.
그것이 너의 부끄럼의 표현이었을까? 아니면 친구들에게 민망해서 그런 거였을까?
학창 시절 내내, 그리고 성인이 되고 나서도 이따금 반추해 보았지만 난 결국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너와 나의 사랑은 물음표만 남긴 채 1일 만에 끝나버렸다.
고등학교 3학년, 성격이 참 좋았던 골든리트리버 댕댕이 같았던 그, 바람을 폈다.
내 남자친구였던 그는 어느새 다른 이의 남자친구가 되어있었다. 비밀연애를 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나와 그녀를 동시에 사귀었다. 어느 날, 나와 사귀고 있었던 그가 같은 반이었던 P양이랑 사귄다고 반에 소문이 돌았다. 흥미로운 이슈에 그곳은 순식간에 열광과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원래 남의 연애가 가장 재밌는 법이니까. 특히 입시에 대한 고민과 걱정으로 가득 차있고 공부로 시작해 공부로 끝나는 하루를 보내는 고등학교 아이들에게는 ‘연애’라는 주제는 여느 나이보다 더욱 흥미로울 터였다.
하이톤의 목소리로 호들갑을 떨며 ‘진짜야? 진짜 너 G랑 사귀어?’라고 물어보는 친구들에게 그녀는 발그레한 얼굴로 ‘그렇게 됐다’며 인정을 했다.
그 말에 안 그래도 뜨거웠던 반의 분위기는 더욱 후끈 달아올랐다.
그런 분위기에 나 또한 그 소식을 알 수밖에 없었고, 마침 자리에 앉아 수학문제를 풀고 있던 참이었기에 실시간으로 그 말을 듣게 되었다.
나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상황에 풀고 있던 수학문제를 내려놓은 뒤, 이야기를 하는 P양과 그녀의 친구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처음에는 P양이 거짓말을 하는 줄 알았다. 나와 사귀고 있던 그는 쾌활하고 배려심도 있으며 둥글둥글한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남녀노소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놀기 좋아하고 남자를 좋아하는 아이 었기에, 나는 당연히 P양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줄 알았다. 그를 좋아해 일부러 그런 분위기를 조성하여 사귀게 되는 큰 그림을 그리는 줄 알았다. 전날까지도 G와 나, 우리 사이의 문자는 달달했고, 그 어떠한 헤어짐의 신호도, 싸움이슈도 없었기에.
친구가 G가 너를 자꾸 쳐다본다고. 쟤 왜 자꾸 너 쳐다봐? 라며 그가 나를 보며 눈치를 보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이 소문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이 놈이 바람을 폈다는 사실을.
그날 밤, 나는 G군과 만났다. 만나자마자 그는 내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런 소문을 듣게 해서 미안하다고.
그 말에 나는 왜 그녀와 네가 사귄다고 소문이 나게 된 건지, 그 소문에 왜 그녀는 너와 사귀게 됐다고 말을 한 건지에 대해 설명부터 하라고 얘기를 했다. 네가 그녀와 친한 건 알겠는데 뭘 어떻게 했길래 그런 소문이 떠도냐고.
나의 말에 그는 정말 미안하다면서, 본인도 그런 소문이 날 줄 몰랐다고 말을 하는데 이때부터 불안함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녀가 자기한테 자꾸 호감표시를 했고, 처음에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딱 잘라냈지만, 그럼에도 자꾸만 자신한테 대시를 해오는 걸 보다 보니 마음이 점점 약해졌고 덩달아 호감이 생겼다고 한다. 게다가 네가 비밀연애를 원해서 비밀연애를 했지만, 자신은 비밀연애를 하고 싶지 않았고 대놓고 공개연애를 하며 사랑을 하고 싶었는데 그녀가 본인이 원하는 바를 만족시켜 줄 수 있을 것 같아 사귀게 되었다고, 미안하다고 이야기를 했다. 정말 염치없고 미안하지만 아직도 너를 그 친구보다 더 많이 좋아하기에 네가 용서만 해준다면 난 지금처럼 너와 연애하며 지내고 싶다고도 했다.
결론은 온갖 자기변호를 섞어가며 , 나는 너를 여전히 사랑한다고 이야기를 하지만 결국 결론을 바람을 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비밀연인이고, 그녀는 공식적인 연인으로 삼고 싶다는 말이었다.
사귄 건 내가 먼저고 내 남자친구였는데 결국엔 누군가의 남자친구로 알려져 있는 이 상태에선, 그녀와 그가 헤어지고 내가 사귄다고 밝혀져도 내가 그를 뺏었다고 생각이 들 테니까 문제였고, 그의 말처럼 ‘어차피 먼저 사귄 건 나였으니 켕길 게 없으니 그가 누구랑 사귀는지를 사람들이 알고 있든 말든, 나는 여전히 그와 사귀며 관계를 지속하면 된다’는 마음은 더더욱 없었다. 그러니, 결국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정이 많이 떨어지기도 했고. 나에게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래서 알았다고, 그렇지만 헤어지자고 난 더 이상 이 관계를 지속하고 싶지 않다고 말을 했고, 우린 그렇게 헤어졌다. 분노를 많이 보이지도 않았다. 그를 나무라지도 않았다. 담담하고 차분해서 전혀 아무렇지 않아 보일 정도였다. 겉으로는.
속은 썩어 문드러가는지도 모르고.
헤어지고 나서 3년 내내 계속 동고동락하며 지내온 나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 문자로 이 사실을 말했다. 사실은 나 걔랑 사귀고 있었고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고 헤어졌다.
친구는 그 얘기를 들으며 사귀고 있었냐고 놀라면서도 뭔가 그럴 것 같았다고 얘기를 하며 바람핀 놈은 맞아도 싸다며 뺨이라도 쳐주지 그랬냐고 대신 분노를했줬지만 나는 끝끝내 괜찮은 척을 했다.
처음에는 억울한 마음이 불쑥 올라왔었다. 내가 먼저 사귀기 시작했고 여자친구는 난데 모두에게 이 사람의 여자친구는 다른 사람으로 알려지게 된 게 억울하고 슬펐다.
그리고, 찝찝했다. 뭔가 난 잘못한 게 없는데 내가 뭔가 잘못한 느낌이었다. 바람을 피운 건 얘였는데 내가 함께 바람을 핀 느낌이 들었다. 정작, 탓을 하자면 바람피운 놈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데도 대시를 했던 그녀의 잘못이었던 건데, 그럼에도.
분노도 났다. 바람을 핀 그에게 먼저 화가 났다가 결국엔 그녀에게도 화가 번졌다. 아무리 비밀연애여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얘기하는 게 아니고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정도는 얘기를 해줄 수 있는 거 아닌가? 싶었다. 분노와 함께 서운한 마음이 들었었는데 그로부터 5년 이상 지난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귀찮았던 거다. 얘는.
여자친구가 있다고 말하면 누구냐고 알려달라고 보챘을 거고, 왜 지금까지 말 안 했냐고 호들갑을 떨었을 거고, 우리 반이냐고 대체 누구냐고 추궁했을 거다. 그럼에도 안 알려주면 반에다가 대놓고‘ 야야 얘들아!! G가 여자친구가 있대!!!! ‘라고 소리쳤겠지. 그냥 그 과정들이 피곤하고 귀찮았던 거다, 얘는.
지금이야 이런 생각 들지만 이 당시에는 이런 생각을 못했기에 사귀는 사람 있다고 명확히 얘기하지 않은 게 서운했고, 분노했다. 속으로. 그녀는 과연 눈치를 못 챘었을까? 내가 G랑 그렇게 서로 투닥거리고 뒤돌아서 마주 보며 대화를 하는 걸 보곤 했는데 눈치도 빠르면서 과연 눈치를 못 챘을까, 눈치챘는데도 모른척한 것 같다는 결론에 다다르면서 그녀가 더 미워졌고 더 화가 났다.
그럼에도 담담하고 차분하게 이별을 고했던 이유는, 그 상황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현실 같지 않아서였다. 꿈을 꾸는 듯했고, 오히려 꿈이 더 선명할 것 같았다. 사람이 너무 당황하면 현실로 느껴지지도 않고 그 당시엔 아무 감정도 안 느껴진다는 말이 있지 않나, 딱 그 심정이었다.
마치 이별뒤에 몰려오는 후폭풍처럼 담담하게 그에게 이별을 고하고, 우리의 관계가 종지부를 찍고 나서야 감정의 폭풍이 뒤늦게 휘몰아치며 온갖 감정의 폭풍우 속으로 나를 가두었다.
그렇게 나는 그와 관계의 마침표를 찍었고, 그 이전에도 공부를 안 하던 건 아니었지만, 이별을 한 이후에는 오로지 공부에만 매진하며, 중간중간엔 친구와 담소를 나누고 장난도 치는 등 떨어지는 낙엽에도 꺄르륵 웃어대는 그런,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귀엽고 소중했던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는 내 삶에서 나가게 되었지만, 내 삶은 이미 친구들이 충분하게 채워주고 있었기에 그 하나 빠진다고 내 삶이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또는, 대학이라는 가치와 목표가 내 삶에서 너무 중요했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수도.
이렇게, 누군가를 열렬히 좋아하면서 상대의 바닥을 많이 보았다. 그러면서 더더욱 사랑이 무서워지고 누군가에게 마음을 준다는 것이, 누군가를 내 세계 안으로 넣는다는 것이 더욱 두려워졌다.
그럼에도, 연애가 끊기지는 않았었다 19살 수능 끝난 후부터.
나와 같은 학교를 나온 한 살 어린 후배가 쪽지로 고백을 하며 전화번호를 적어놨었고, 그 절절하고 진정성 있는 마음에 감동해 긍정의 대답을 줬고, 그는 내 남자친구가 되었다.
그와 헤어지고 나서 얼마 안돼서, 같은 교양을 듣는 타과의 같은 학번 남자애로부터 고백을 받았고, 얼굴도 꽤 괜찮고 성격도 좋아 마침 내 눈에도 들어오던 그였기에 이번에도 긍정의 대답을 했고, 우린 그렇게 7년을 사귀어왔다. 나의 20대 초중반을 함께했고, 20대 후반도 함께하고 있다.
그땐 자각하지 못했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사랑에 있어서 무의식적인 방어기제로 도피를 택해왔다. 내가 먼저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았고, 좋아해도 고백하지 않은 채 마음을 접었다. 대신,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골라 만나왔다.
별로인 사람이 아니라면, 그리고 나를 많이 좋아하는 게 눈에 보이면 일단 사랑이란 스타트라인에 같이 섰다.
현재의 이 사람과도 마찬가지였다. 좋아하는 마음이 나보다 앞서있는 상대를 바라보며, 나와 함께하자고 용기 있게 손 내미는 상대의 손을 붙잡았고, 어느새 우린 사랑이라는 필드에서 같이 달리고 있다.
서로 다른 템포를 가진 두 명이, 상대의 걸음보다 내가 빠르면 나의 걸음을 늦추고, 내가 느리면 종종거리며 빨리 뛰어가기도 하면서 서로의 박자를 맞춰왔다.
다양한 박자는 각기 다른 느낌을 전달하며, 전체적인 분위기를 형성한다. 그와 나의 박자는 서로 달랐고, 우리의 다양성은 서로에게 다른 느낌을 전달했고, 우리의 박자가 합쳐져 전체적인 분위기를 형성했다.
그와 내 박자의 조화로운 결합은 우리의 사랑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우리 사랑에 흐름을 만들었으며 이 두 박자가 서로 보완하고 조화를 이루면서 사랑을 노래하는 우리의 음악은 비로소 완전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훌륭한 음악은 리듬과 박자의 정묘한 조화를 통해 듣는 이에게 깊은 감동과 즐거움을 선사하듯이,
우리가 함께 연주하는 사랑이라는 노래는 서로의 리듬과 박자가 정묘한 조화를 이루며 감동과 즐거움을 선사해 우리 사랑의 유효기간을 늘렸다.
사랑으로부터의 도망침이 아니러니하게도 사랑을 만들어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마음을 주는 게 무서워서,
내 마음의 크기와 같지 않은 상대를 바라보는 게 두려워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보다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을 만나는 선택으로 도망쳤다, 아주 이기적 이게도.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나의 두려움이, 나의 도망침이, 사랑을 만들어내는 시작점이 되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사랑의 결함은, 그 결함을 채워주는 사람을 만나면서 형태를 잃게 되었다.
대신에, 사랑이라는 노래를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온전하고 완전하게 우리 둘만이 연주할 수 있는 사랑을 노래한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말, 이제는 안 믿는다.
나는 도망친 그곳에서, 새로운 낙원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