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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한별 May 1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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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노 요코 지음, 이수미 옮김/샘터사

추천 대상 : 사노 요코 덕후

추천 정도 :

메모 : 사노 요코 새로운 전자책이 나왔길래 바로 구매! 사노 요코의 책을 읽다보면 '아 맞어 나도 이런 생각 했었는데' 하고 감탄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솔직함과 천진함을 사랑하게 된다. 우리 할머니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발췌


나는 복잡한 인간상을 다양하게 그려냄으로써 악이나 신앙의 근원을 파헤친 도스토옙스키를 인간이라면 죽기 전에 반드시 읽어야 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결혼하여 아이가 태어난 후로는 아이를 업고 요리하면서 읽었다. 변소에서도 물론 읽었다. 침대에 반드시 책을 들고 누웠고 잠들 때까지 읽었다. 늘 잠이 부족했다. 재미있어서 책을 놓을 수 없으니 난처했다. 아침까지 읽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는 동안 깨달았다. 어려운 책을 읽으면 잠이 온다는 것을. 나는 장르를 따지지 않았다. 뭘 읽든 곧 빠져들었다. 야마다 후타로를 읽기 시작하면 야마다 후타로만 읽었다. 시바 료타로를 읽을 때는 힘들었다. 내가 읽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쓰는 것 같았다. 주체를 못하고 자꾸자꾸 샀다가 읽지 못해 처박아둔 책도 많다. 언제까지 살지는 모르지만 노년 이후에도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다.


재작년 여름, 향년 93세의 나이로 엄마가 죽었다. 죽기까지 10년 이상 치매였다. 엄마가 병에 걸리기 전엔 나와 엄마 사이가 좋지는 않았다. 나는 엄마를 사랑한 적이 없었다. 죽은 사람은 모두 좋은 사람이다. 치매란 생과 사를 잇는 다리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엄마는 점점 다른 인격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그걸 인격이라 할 수 있다면 말이다. 엄마가 정신을 놓은 후 우리는 평생의 갈등과 화해했다.


나는 몸을 움직여 하는 일이 진정한 노동이라는 것을 절감했다. 내가 책상 앞에서 한 노동은 알기 어렵고, 자식은 은혜를 모른다.


누구에게서 태어날지 아무도 선택할 수 없다. 그것이 가장 큰 운명이다. 가지고 태어난 성질의 핵심적인 부분은 바뀌지 않는다. 그게 더 큰 숙명인지도 모른다


엄마에게 진실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진실보다 어떻게 보이는지가 더 중요했다. 어쩌면 엄마를 살아가게 만드는 힘의 원천인지도 몰랐다


우리는 엄마에게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필사적으로 공부했는지도 모른다. 여동생이 말했다. “엄마랑 같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야.” 하지만 남녀 사이는 모른다. 아버지와 엄마는 좋은 부부였다. 여자끼리가 아니라서 그런가?


열세 살의 건방진 친구가 “나쓰메 소세키는 《산시로》 《그 후》 《문》의 순서로 읽는 거야” 하고 지껄이기에 시키는 대로 했는데, 소세키를 읽고 감동하려면 그에 걸맞은 인생이 필요했다. 시간만 허비했다. 그럴 바엔 차라리 남자랑 노는 편이 훨씬 나았다. 멋을 잔뜩 부리고 거리를 싸돌아다니는 청춘이 훨씬 즐겁지 않았을까?

서양은 젊음의 힘을 숭상하는 반면, 동양에는 연륜을 존중하고 노인을 공경하는 문화가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늙어가는 멋진 노인의 표본이 늘 존재했다. 나는 그런 노인이 되고 싶다.


어른이 되면 그냥 놀라기가 어렵다. 나는 그때 온갖 사람의 마음에 놀라는 ‘마음’ 전문가인 선생의 넓고 깊은 인격에 충격을 받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면 남자가 뒤로 물러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건 사노 씨가 진실을 말하기 때문이에요. 모두 진실을 싫어해요. 진실은 말하면 안 돼요.” 왠지 무척 부끄러웠지만, 무엇이 진실인지 아닌지 알기 어려웠다.


살아 있는 인간이 발하는 매력이나 인품에 대해서는 손으로 만지고 냄새를 맡고 목소리를 듣고 이 눈으로 보지 않으면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거다.


예술과 신앙은 물과 기름처럼 서로 밀어낸다. 예술이란 버리려야 버릴 수 없는 자아가 낳는 것이다. 신앙이란 자아를 버려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던가? 예술은 거대한 진실과 거대한 거짓을 모두 품는다. 죽으면 인간성은 사라지지만, 표현된 것은 남는다. 재능이 크면 클수록 재능과 인격의 관계성은 옅어지는 것 같다. 나는 살아 있는 료칸 스님을 알고 싶었다. 예술과는 관계없는 평범한 아이의 모습으로 료칸 스님과 놀고 싶었다. 더 나이 들면 손주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그리운 인품을 지닌 한 스님이 계셨다고.


내 눈은 아들이 네 살일 땐 네 살 아이들에게로, 아들이 열 살일 땐 열 살 아이들에게로만 향했다.


아이를 위한 글은 새빨간 거짓말이어야 한다. 그 새빨간 거짓말에 이 세상을 정확히 꿰뚫는 ‘진실’이 담겨 있어야 한다. ‘진실’은 곧 현실이다.


아이 집단에 대해 더 이상 알아야 할 것이 없을 텐데도 여전히 애정을 갖고 세세하게 지켜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나는 감화되었다. 일본의 아이들이, 아니, 지구상의 모든 아이들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언제 읽어도 영원한 아이들의 세계. 반짝이는 빛 속에서 긴장을 풀고 다시 한 번 어릴 적 마음을 되찾는다.


저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기 인생을 살고 있다. 그 사실이 나에게 전달되었고, 나는 머나먼 나라 사람들의 삶에 공감했다. 어느 나라 사람이든 좋다. 아무것도 몰라도 좋다는 걸 알았고, 모든 걸 아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아는 것에만 반응하며 살아가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계는 아름답다. 내 마음이 아무리 가난해도 세계는 아름답다.


지금 후회하고 있다. 젊을 때는 활자 안의 청춘이 아닌 살아 있는 청춘을 즐겼어야 했다. 천 권의 책 속의 연애보다 단 한 번이라도 온몸으로 경험하는 연애가 훨씬 더 풍요롭다. 현실 연애에 돌입한 순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따위 이 세상에서 소멸했다. 시시한 책을 만나면 얼마나 시시한지 알아보려고 끝까지 읽었다. 읽으면서 욕하는 게 좋았다. 훌륭한 책을 읽으면 다른 사람에게 공감을 얻고 싶어 억지로 빌려주었다. 그래서 훌륭한 책은 내 수중에 없다. 누구한테 빌려줬는지 잊어먹기 때문이다. 되돌아보면 나는 책으로 이루어진 꿈속의 섬에 서 있었던 것 같다. 내 인생도 섬처럼 보인다. 과거에 빛났던 시절도 내려 쌓이는 시간 속에 묻혀 어스레해졌다. 예순일곱쯤 되면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하겠지. 나는 바른 자세로 책을 읽은 적이 없다. 어릴 때는 등에 동생을 동여맨 채 다다미에 배를 깔고 엎드려 읽었고, 어른이 되어서는 전철 안에서, 혹은 스파게티를 삶으며 읽었다. 대부분의 책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침대에서 읽었다. 지금 할머니가 되어 하루 종일 침대 안에서 책을 읽으니, 아~ 정말 행복하다. 내겐 단 하나의 쾌락이었다. 그래서 나는 늘 행복했다.


나는 활자만 읽으면 되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젊은 애들이 듣지도 않으면서 계속 음악을 틀어놓는 것과 마찬가지, 그러니까 배경 음악 같은 것이다.


소세키를 마흔 넘어 다시 읽고 깜짝 놀랐다. 중학생 때 뭘 알았을까? 시간 낭비였다.


‘오래된 연못, 개구리 뛰어드는 물소리.’ 그저 첨벙 하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일본인이라면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고요하고 깊은 숲의 냉기를, 물소리가 정적에 녹아들기까지의 시간을 차분히 느낀다. 아아, 살아 있다, 살아 있기에 첨벙하는 소리에서 영원을 느낀다. 어둠 속에서 장어가 첨벙하고 튀어오르는, 이세상의 것인지 저세상의 것인지 모를 한순간으로 인해 살아 있다는 사실의 불가해함을 실감한다.


부부는 안에서는 쉽게 깨지지만 밖에서는 아무리 찌르고 부서뜨리려 해도 절대 부서지지 않는다. 처자식 있는 남자와 불륜관계를 맺는 아가씨, 당장 그만둬요. 고생만 하고 얻는 건 없습니다. 부부는 사랑이 아니라 정으로 살기 때문이다. 사랑은 세월이 갈수록 옅어지지만 정은 세월과 함께 끈끈해진다. 부부란 아마도 사랑이 정으로 변화하는 순간부터 성립되는 것이리라. 정은 습관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생활은 곧 습관이다.


미운 감정이 어느 정도 포함되더라도, 그 미운 마음이 정을 강하게 만든다. 정이야말로 오히려 말로 표현하는 게 불가능하다. 밤에 이혼하자고 했다가 아침이 되면 정기예금에 대해 의논하는 것이 부부다. 참으로 영문을 모르겠다. 그런데 부부는 영문을 모르는 게 좋은 거다.


나는 아이가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만 가지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남자 아이든 여자 아이든. 거기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갈 힘을 얻고, 돈도 벌고, 상대를 지킬 마음도 생긴다. 타인과 원만하게 지낼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기까지 나는 무엇을 했던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아들이 귀여웠을 뿐이다. 어리석고 추한 엄마 행세를 했을 뿐이다.


나는 옛날부터 잘 잊는 편이었다. 아마 내게 있어서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기 때문이리라. 아무래도 좋은 일이 지나치게 많은 일생이었다.


사노 씨의 글을 읽고서야 비로소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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