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대상 : 하루키 빠여서 꼭 다 읽어야겠다는 사람
추천 정도 : ★ ★
메모 : 하루키를 좋아하는 사람이지만서도 1Q84 이래로 이 사람 소설은 뭐가 뭔지 통 모르게 되었다. 하루키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내용이 없다, 너무 가볍다 라고 말하지만 나는 하루키가 폭력에 대응하는 개인, 혹은 연대를 다루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기사 단장 죽이기도 전체적인 내용은 그러한데 확실하게 감이 안 잡힌다. 난 이제 점점 하루키가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키에 대해서 호오를 말할 수 있을까도 잘 모르겠다. 이제 정확히 말하려면 해변의 카프카까지만 좋아한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해변의 카프카는 어느 쪽을 펼쳐서 읽어도 흥미진진했었는데 이제는 관성으로 읽고 있다 ㅠㅠ 그래도 좋아했었던 작가였으니까.
개인적으로 작품 내 오마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이번 편은 더 취향이 아니었다. 하루키가 위대한 개츠비 빠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ㅠㅠ 본인의 창작물에도 이용하다니. 위대한 개츠비는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그 소설의 빼어난 구조나 마지막 문단의 압축성 때문에 큰 감동이 밀려오는데, 다자키 쓰쿠루도 그렇고 1Q84도 그렇고 기사단장 죽이기도 그렇지만 끝까지 읽고 나면 '그래서 작가는 대체 뭘 이야기 하고 싶었던 거지' 라는 의아함이 든다.
정말 개인적으로는 하루키의 평소 생각이(소설 내에서 드러나는) 뇌과학과 유사하다고 느꼈다. 소설 내에서 신체가 정신보다 우위를 점한다고 강조하는 소설가는 하루키밖에 못 봤다. 그리고 현실과 비현실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무엇이 현실이 될지 알 수 없다든가, 무의식이나 자유의지에 대해 자주 이야기 한다든가, 메타포 혹은 은유에 대해서 줄기차게 이야기 한다는 점이 뇌과학에 관심이 있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정확히 몇 명이 희생되었는지 세부적인 수치는 역사학자들 사이에도 이론이 있지만, 어쨌든 엄청난 수의 시민이 전투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다는 것은 지울 수 없는 사실입니다. 중국인 사망자 수가 사십만 명이라는 설도 있고, 십만명이라는 설도 있지요. 하지만 사십만 명과 십만 명의 차이는 과연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삼촌에게는 인간성을 회복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거야.
"제군은 나를 그 구덩이에서 꺼냈네. 그리고 지금, 제군은 나를 죽여야 해. 안 그러면 고리가 닫히지 않거든. 열린 고리는 어딘가에서 닫혀야 하는 법이네. 다른 선택지는 없네."
- 위 문장은 하도 해변의 카프카의 장면과 유사해서 발췌. 사실 이렇게 유사한 문장이나 장면은 너무나 많다.
내가 돌아온 세계가 내가 떠났던 세계와 같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나는 물론 내 인생을 살고 있지만, 그 안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은 나와 상관 없는 데서 멋대로 결정되고 진행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싶어. 다시 말해 나는 언뜻 자유의지를 지니고 살아가는 것 같지만, 정말로 중요한 일은 무엇하나 직접 선택하지 못하는지도 몰라. 임신해버린 것도 그런 현상 중 하나가 아닐까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