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하고 처음으로 혼자 여행 왔다. 혹시나 하고 남편에게 같이 갈지 물어봤지만 단번에 거절당했다. 이래놓고 막상 나 혼자 여행을 가면 남편은 심심하다느니 게임할 맛이 안 난다느니 징징거린다. 예의 상 하는 말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들어도 썩 기분이 좋아지진 않는다.
그토록 기대했던 여행인데 막상 전날이 되니 가기 귀찮아졌다. 남편과 나는 로스트 아크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남편은 내가 여행 간 동안 만렙을 찍을 거라고 해서 짜증났다. 여행을 계획하지 않았더라면 나도 만렙을 찍었을 텐데, 하고 생각하면서 혼자 도쿄로 왔다.
로스트 아크와 남편은 내버려두고 혼자 도쿄로 온 이유는 카드캡터 체리 전시회를 보기 위해서였다. 직장에서 내가 이런 이유로 도쿄를 간다고 하자 누군가는 “한별님도 덕후셨나요” 라고 말했다. 머글 기준에서는 이해 되지 않는 이유일 수도 있지만 올해 도쿄에서 스누피 박물관, 점프 전시회를 보면서 좋아하는 주제에 대해 전시회가 열린다면 가는 게 무조건 이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에서는 주로 유화 전시회를 다녔는데 거의 공간 내에 유화가 걸려 있는 게 전부였다. 그에 반해 도쿄에서 본 스누피 전시회나 점프 전시회는 캐릭터 전시여서 그런 건지 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전시회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전시의 구성이나 기획이나, 자그마한 디테일까지 모두 사랑스러워서 보고 나면 행복의 에너지가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카드캡터 체리 전시회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다녀오자고 생각했다. 카드캡터 체리는 나에게 여러 모로 특별한 만화이다. 나에게 유년기는 멀리서 보면 행복이겠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불행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부모님은 부정하실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그랬다. 어렸을 때는 오히려 잘 자각하지 못했는데 그 때의 어린 내가 내 안에 세포의 핵처럼 남아 있어서 종종 그때 내가 상처받았던 것들에 대해 떠올리게 된다. 그에 반해 카드 캡터 체리의 세계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것이다. 아무도 서로 상처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서로가 서로의 행복만을 염원하는 상냥한 세계. 나는 체리를 보면서 나에게는 없는, 이미 가질 수 없게된 이상적인 세계와 자아상에 빠져들었다.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데 노스텔지어를 느낀다는 것이 성립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여행을 오기 전에는 갑자기 빨강머리 앤을 몇 권 읽었다. 앤은 불행을 겪었지만 거기에 고착되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나간다. 읽고 나서 보니 빨강 머리 앤이나 카드 캡터 체리나 꽤 이상적인 여자아이의 자아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유형의 인물들이 시대를 바꿔가면서 재생산된다. 비록 나는 그렇게 자라진 못햇지만 그들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어딘가에 그런 세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만해도 위로 받는 것이다.
도쿄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호텔에 던져두고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모리타워로 갔다. 이번 전시회의 컨셉은 마법에 걸린 미술관이다. 미술관 각각의 영역에는 여러 가지 마법이 걸려 있다. 어떻게 미술관이 마법에 걸리게 된 건지 케로가 설명해주는 짤막한 애니메이션이 나오고, 그 다음에 꽃의 마법에 걸린 에어리어가 나온다. 관람객이 자연스럽게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하면서 컨셉에 빠져들게 하는 방식이 좋았다. 그 외에도 좋았던 포인트는 많았지만 다른 관람객을 위해 너무 자세하게 쓰지 않겠다. 마지막으로 전시회가 끝나면 직원분이 체리가 그려진 카드를 한 장 주는데, 'THANKS' 라고 적혀 있었다.
전시회를 보고 나서는 전시회를 보고 기분 좋아진 마음을 진정 시키려고 근처의 카페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주인 내외 분이 손님이 올 줄 몰랐던 것처럼 놀랐다. 카페는 작았고 손님은 젊은 남자 한 명밖에 없었다. 주인 내외와 친한 손님 같았다. 나는 창가에 혼자 앉아서 커피와 토스트를 먹었다. 버터 토스트라고 해서 달 줄 알았는데 버터의 짠 맛이 났다. 원래 버터는 짠 건데 왜 달 거라고 생각했을까. 비가 조금씩 오기 시작하고, 나는 안락한 곳에서 바깥을 바라보았다. 창은 덩굴 같은 것으로 뒤덮여 있어서 잎사귀가 흔들리는 사이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을 구경할 수 있었다. 카페 내부는 따뜻한데 창 근처에 환기구가 있어서 바깥의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안락한 곳에서 밖을 구경하는 것은 왜 이렇게 기분을 좋게 만들까? 창문이 프레임과 닮아서 그런 건지 지금밖에 볼 수 없는 영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다려도 비는 그칠 것 같지 않아서 비를 맞으면서 호텔로 돌아갔다. 다행히 많이 오지는 않았다. 호텔 창문을 열자 보라색과 분홍색을 반짝이는 도쿄 타워가 보였다. 이 풍경을 보기 위해 하룻밤에 2만원을 더 지불했다. 막상 보니 마음에 들어서 혼자 과실주를 홀짝 거리며 도쿄타워를 구경하다가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