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월간별문

바톤 터치 라이프

by 강한별

세상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오가는데 왜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없을까. 어리석게도 그렇게 생각했다. 내 이십대를 관통하는 이야기는 체호프의 단편소설 <우수(憂愁)>였다. 가련한 마부는 손님을 태울때마다 자기 아들의 죽음에 대해 말하려고 하지만 들어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고, 결국 마부는 말을 어루만지며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이야기이다.

나는 이 이야기의 이미지와 내가 느끼는 것이 왜 이렇게 유사할까 생각했다. 귀찮음을 참고 친구의 하소연을 그렇게 들어줬는데 나는 왜 하소연을 할 수 없을까. 어리석었지만 정말 그랬다. 무릇 인간이라면 주고 받음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여겨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이십대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순진해서 이를테면 성서에 쓰여진 내용을 보고 당연히 이렇게 살아야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여기에서 성서는 비유적인 표현이지 나는 종교인은 아니다.

살아온 나날이 길어질수록 인간관계는 너무도 어렵게 느껴지고 인생에 대한 태도를 어떻게 견지해야 할지 어려워서 법화경도 보고 숫파니파타도 봤다. 그런데 나를 구원해준 것은 종교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언니네 이발관 이석원의 에세이에서였다.

연애란 이 사람한테 받은 걸 저 사람한테 주는 이어달리기와도 같은 것이어서 전에 사람한테 주지 못한 걸 이번 사람한테 주고 전에 사람한테 당한 걸 죄 없는 이번 사람한테 푸는 이상한 게임이다. 불공정하고 이치에 안 맞긴 하지만 이 특이한 이어달리기의 경향이 대체로 그렇다.


이석원의 에세이 <보통의 존재>에 나오는 이 글은 연애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문장들의 주어를 연애로 읽지 않고 인간관계로 받아들였고 드디어 내가 가진 의문들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세계는 생각보다 정당하고 공평하게 만들어져 있지 않고, 일대일의 관계가 아니라 다수와 다수가 얽혀있는 것이라 누군가에게 배우고 받은 것을 그 사람이 아닌 다른 이에게 선물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시스템을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인간은 합리적이지 않으니까 이렇게 어처구니 없는 일을 반복한다. 인터넷에서 피땀눈물을 ‘P;ㅠ’로 표현한 것을 보면서 인간은 피땀눈물이 아니라 피와 살, 그리고 감정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감정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렇게 공평하지 않은 판단을 하는 것이다. 나도 예외가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도 안쪽으로 굽는 팔이 있고 누군가를 더더욱 좋아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쳐다보는 것도 싫어하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다.

가끔은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 때도 알았더라면, 이 회사에서 배운 걸 이전 회사에도 해줬더라면, 하고 생각한 적도 있는데 남편은 그 말을 듣고 현실성 없는 이야기를 한다고 했다. 따져보면 그런 것이 불가능했던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현재의 내가 있는 것인데 이렇게 자주 바보같은 생각을 하곤 한다. 그래서 지금은 또 누구에게 바톤을 건네주게 될지. 혹은 그래도 웬만하면 나에게 바톤을 넘겨준 사람에게 다시 바톤을 넘겨주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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