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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한별 Apr 15. 2019

자기만의 방

https://ridibooks.com/v2/Detail?id=998000233


추천 여부 : 추천

추천 대상 : 약 백년 전의 여성, 그리고 지금의 여성이 궁금한 사람

메모 : 정말 유명한 책인데 이제야 읽었다. 아직 과정을 지나는 중이라고 생각하지만 약 백 년 전에는 여성이 도서관에 출입도 할 수 없었던 점을 감안하면 세계는 느리지만 꾸준히 혹은 격동적으로 변하고 있다. 읽다보면 가슴 아픈 부분이 굉장히 많았다. '픽션 속의 여성'에서 벗어나 픽션을 창조하는 여성이 되기까지는 오백 파운드의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것을, "세상 그 어떤 힘도 제게서 5백 파운드를 빼앗을 수 없어요. 음식과 집과 요리는 영원토록 저의 것이에요." 라는 외침을 읽으면서 그동안 버지니아 울프가 겪어야했을 괴로움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저는 주제가 사소하든 거창하든 절대 망설이지 말고 온갖 종류의 책을 써달라고 여러분께 부탁하고 싶어요. 저는 여러분이 무슨 수를 쓰든 충분한 돈을 스스로 마련해서 여행을 하고, 빈둥거리고, 세상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고, 책을 읽으며 몽상을 하고, 길모퉁이를 거닐며 생각의 낚싯줄을 강 속 깊이 드리울 수 있기를 바라요" 라는 호소어린 당부로 끝나는 이 책은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지니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울프의 상상력의 한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가령 여성용 소설(애초에 소설 수요에 성별을 나눈다는 게 이제 무의미하게 느껴진다)은 여성은 항상 방해 받을 만한 집안일, 육아가 많기 때문에 짧게 끊어 읽어도 되어야 한다든가. 아예 여성이 집안일을 하지 않거나, 육아를 하지 않거나, 아니면 반려자와 분업할 수도 있다는 건 고려되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가장 근본적인 메시지는 2019년의 인간이 읽어도 의미가 있기 때문에 이 책을 추천한다.


(버지니아 울프의 뛰어난 문장력과 문학에 대한 이해도-나같은 범인이 읽으면 깜짝 놀라게 되는- 역시 이 책의 미덕이다.)




발췌


여성과 픽션에 대한 이야기를 부탁했는데, 자기만의 방이 무슨 상관이냐고 물으시겠지요? 이제 설명해볼게요.


상냥한 신사 한 분이 얼른 나오시더니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여성은 대학 소속 연구원과 동행하거나 소개장을 지참하지 않고는 도서관에 출입할 수 없다고 나지막이 말하며 돌아가라고 손짓을 했어요.


소설가들은 하나같이 점심 모임이 늘 재치 있는 말이나 지혜로운 행동으로 기억에 남는 시간인 양 묘사하는 묘한 버릇이 있어요. 하지만 무엇을 먹는지는 언급하는 법이 거의 없지요. 수프와 연어, 오리 고기 등을 언급하지 않는 건 소설가들의 관습인데, 마치 수프와 연어, 오리 고기 따위는 전혀 중요치 않다는 듯, 아무도 시가를 피우거나 와인을 마시지 않는다는 듯이 굴지요.


“최소 3만 파운드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영국과 아일랜드와 식민지 전체를 통틀어서 이런 형태의 대학은 하나뿐이라는 점과 남자 학교들이 얼마나 쉽게 막대한 자금을 마련하는지 고려하면, 그리 큰 금액은 아닙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여성이 교육받기를 원하는 이가 얼마나 적은지를 고려하면, 상당한 액수입니다.” ­레이디 바버러 스티븐, 《에밀리 데이비스와 거턴 대학》


우선 돈을 버는 일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고, 돈을 벌었다 해도 그 돈을 소유할 법적 권한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시턴 부인이 동전 한 푼이나마 소유할 수 있게 된 건 불과 48년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전 몇백 년 동안 여자가 번 돈은 모두 남편 소유였어요.


어느 한쪽 성(性)의 평안과 번영, 다른 성의 불안과 가난, 전통이 작가의 마음에 미치는 영향, 전통의 부재가 미치는 영향 등을 생각했어요.


한 해 동안 여성에 관한 책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아세요? 그 가운데 남자가 쓴 책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나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많이 논의되는 동물은 여러분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아세요?


성(性)과 성의 본질에 대해 의사와 생물학자들이 흥미를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만, 마음씨 착한 수필가나 솜씨 좋은 소설가, 석사 학위가 있거나 없는 젊은 남자 등 여자가 아니라는 점 말고 다른 자격은 아무것도 없는 남자들까지 성―여기서는 여성―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둔다는 사실은 놀랍고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었어요.


실제로 그들은 사적인 인간관계에서는 타인을 존중하고, 헌신적이며 모범적인 경우가 많아요. 교수가 여성의 열등성을 조금 지나칠 정도로 강조할 때 그가 진정 염려하는 바는 여성의 열등성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우월성이었을 거예요.


고되고 힘겨운 끝없는 투쟁이에요. 살아가려면 엄청난 용기와 힘이 필요해요. 그리고 착각의 동물인 우리 인간은 다른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답니다. 자신감이 없으면 우리는 요람 속 갓난아기와 다를 바가 없어요.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더할 나위 없이 귀중한 이런 자질을 가장 빨리 만들어내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건 바로 다른 이들이 자기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지난 몇백 년 동안 여성은 남자의 모습을 실제보다 두 배쯤 크게 비추는 신비하고 달콤한 능력이 있는 거울 역할을 해왔어요. 여성의 그런 능력이 없었다면 대지는 여전히 늪과 밀림뿐이었을 거예요.


그렇게 보면 남자들에게 그토록 자주 여자가 필요한 이유도 어느 정도 이해가 돼요. 그리고 남자들은 왜 그토록 여성의 비판에 민감한지, 남자들에게 여성이 이 책은 형편없다거나 이 그림은 시시하다고 말하면 왜 남성이 똑같은 비평을 했을 때보다 훨씬 큰 고통을 일으키고 훨씬 큰 분노를 자아내고야 마는지도 설명이 돼요. 여성이 진실을 말하기 시작하면 거울에 비친 모습이 작아질 테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자신감이라는 자질 또한 줄어들 테니까요


그 두 가지―투표권과 돈―가운데 제게는 돈이 훨씬 더 중요해 보였어요. 그전에는 신문사에 허드렛일을 구걸해서 당나귀 품평회나 결혼식 기사를 쓰며 생활비를 벌었어요.


원치 않는 일을 계속해야 했고, 노예처럼 아양을 부리고 아첨을 떨어야 했는데, 늘 그럴 필요야 없었지만 그렇다고 잠자코 있기에는 감수해야 할 위험이 너무나 컸어요. 그러다 보니 숨기면 죽은 것과 다름없고, 대단치는 않지만 그 주인에게는 소중한 어떤 재능이 소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와 더불어 저의 자아와 영혼도 죽어버릴 것 같았어요.


세상 그 어떤 힘도 제게서 5백 파운드를 빼앗을 수 없어요. 음식과 집과 요리는 영원토록 저의 것이에요. 그 덕에 수고와 노동이 끝났을 뿐만 아니라, 증오와 비통함도 사라졌어요. 저는 이제 남성을 증오하지 않아도 돼요. 그 어떤 남자도 저를 해치지 못할 테니까요. 남자에게 아첨할 필요도 없어요. 남자에게서 받아야 할 것이 없으니까요. 그렇게 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인류의 절반인 남성에 대해 미묘하게 다른, 새로운 태도를 갖게 되었답니다.


결국 그런 가치는 변할 테고, 한 세기 뒤에는 틀림없이 완전히 달라져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저는 집 앞 계단을 오르며, 1백 년 뒤 여성은 보호받는 존재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요. 필연적으로 여성은 한때 여성을 거부하던 모든 활동과 직무에서 제 몫을 담당하게 될 거예요.


아이 보는 하녀가 석탄을 운반하고, 가게 주인 여자가 기차를 운전할 거예요. 여성이 보호받는 존재일 때 관찰한 사실에 근거한 가설들―예를 들어 (마침 군인 한 무리가 거리를 행진 중이었어요.) 여성과 성직자와 정원사는 남보다 오래 산다는 속설은 모두 사라지겠지요. 여성을 보호하는 대신 남성과 같은 직무와 활동에 노출시키고, 군인과 선원과 기관사와 부두 노동자가 되도록 내버려두더라도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이른 나이에, 훨씬 빨리 죽는 일은 없을 테고, 여성의 수가 줄어든 나머지 예전에 ‘나, 비행기 봤다’고 자랑했듯이 ‘나, 여자 봤다’고 자랑하는 일도 없을 거예요. 저는 문을 열며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보호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사라지면 무슨 일이든지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그런 인물은 픽션 속 여성일 뿐이에요. 트리벨리언 교수가 지적한 대로 현실 속 여성은 감금되고, 두드려 맞고, 방 안에 내던져졌지요.


여성은 상상 속에서는 세상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실제로는 철저하게 비천한 존재예요. 시집을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여성에 대한 이야기뿐이지만, 역사책에서는 그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어요.


문학 작품 속 여성은 대단히 기발하고 의미심장한 말과 생각들을 내뱉기도 하지만, 실생활에서는 제대로 읽고 쓰지도 못하는, 그저 남편의 소유물일 따름이지요.


그런 분들 덕분에 우리는 얼마나 생각을 덜하면서 살 수 있는지! 또 그분들이 다가갈 때마다 무지의 영역은 또 얼마나 줄어드는지! 고양이는 천국에 가지 못하고, 여성은 셰익스피어 희곡을 쓰지 못한답니다.


어떻게 그런 천재적 재능이 여성들에게서 출현할 수 있었겠어요? 그러나 노동계급에서도 천재가 태어나듯, 여성 가운데서도 틀림없이 천재가 있었을 거예요.


익명성은 여성의 핏속에 흐르고 있어요. 베일 뒤에 숨고 싶은 욕구가 여전히 여성을 지배해요. 지금도 여성은 자신의 평판에 대해 남성만큼 신경 쓰지 않으며, 묘비나 표지판 옆을 지나더라도 자기 이름을 새겨넣고 싶은 충동에 휘둘리는 일이 거의 없지만, 앨프나 버트, 체스와 같은 남자들은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자기 이름을 써넣고야 말고, 아름다운 여자 혹은 개가 지나는 모습을 볼 때면 본능적으로, ‘스 시앵 에 타 무아(Ce chien est à moi)’[프랑스어로 ‘저 개는 내 거야’라는 뜻]라고 중얼거리지요.


그러나 저는 텅 빈 서가를 보며, 여성에게는 이런 어려움이 한없이 더 컸으리라고 생각했어요. 무엇보다 19세기 초까지도 조용하고 바깥 소리가 들리지 않는 방은커녕, 자기만의 방을 갖는 것조차 부모님이 특별히 부유하거나 신분 높은 귀족이 아니라면 어림없는 일이었으니까요.


여성은 단순한 무관심이 아닌 적의에 맞서야 했어요. 여성에게 세상은 남성을 대할 때처럼 네가 쓰고 싶으면 쓰도록 해, 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고, 그건 저한테도 마찬가지예요. 그 대신 세상은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어요. 글을 쓴다고? 네가 그런 걸 써서 무얼 하려고?


그런 글들은 19세기에도 여전히 소녀의 활기를 빼앗고, 소녀의 작품을 지독히 비하했을 거예요. 그런 주장―너는 이건 못해, 저건 할 수 없어―은 항상 존재했고, 늘 저항하고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었어요.


‘여자가 작곡을 하는 건 개가 뒷발로 걸어 다니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잘하지는 못하지만,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기는 합니다.’”6 역사는 그렇게 한 치도 다름없이 반복된답니다.


블루스타킹[문학을 좋아하는 여성을 경멸적으로 이르는 말]


훌륭한 글재주가 있는 여성조차 책을 쓰는 일이 어리석은 일이며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을 만한 일이라고 믿을 정도니, 당시 여성의 문학 활동에 대한 반대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지요.


굉장히 열심히 일한 덕분에 살아가는 데 충분할 만큼 돈을 벌었지요. 이러한 사실은 벤 부인이 쓴 그 어느 작품보다, 심지어 〈내가 만든 천 명의 순교자〉나 〈승리의 환상 속에 내려앉은 사랑〉 같은 그녀의 걸작보다 큰 의미가 있답니다. 덕분에 마음의 자유가,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음이 원하는 대로 작품을 쓸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기 때문이에요. 애프라 벤이 해낸 일이니 어린 소녀들도 부모님에게 가서, “용돈은 안 주셔도 돼요. 저도 글을 써서 돈을 벌 수 있으니까요”라고 말할 수 있었어요.


“그녀가 어떻게 그 모든 일을 했는지 생각하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녀가 드나들 수 있는 독립된 서재가 없었으니 가족과 함께 쓰는 거실에서 거의 모든 작품을 썼을 텐데, 그러다 보면 온갖 일상사의 방해를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제인 오스틴)


그때 나는 시야의 한계 너머까지 볼 수 있었으면, 이야기로 들었을 뿐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생기 가득하고 번화한 여러 지역과 도시와 세상 이곳저곳을 볼 수 있을 만큼 시력이 좋았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그때 나는 진짜 세상을 더 많이 경험하기를, 나와 비슷한 이들과 더 많이 교류하기를, 내가 닿을 수 있는 곳 너머에 존재하는 다양한 인물들과 어울리기를 갈망했다. 페어팩스 부인의 좋은 점, 아델의 장점도 모두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종류의 미덕도 존재할 거라고 믿었고, 그런 믿음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누군가 이런 나를 비난할까? 틀림없이 많은 이들이 비난할 테고, 나는 불평이 많다는 평판을 얻겠지. 그래도 어찌할 수 없다. 어느 하나에 오래 마음을 두지 못하는 건 내 천성이니까. 때로는 흔들리는 마음에 괴로운 적도 있었다. ……평온한 삶에 만족해야 한다는 말은 헛된 소리일 뿐이다.


우리는 《빌레트》 《에마》 《폭풍의 언덕》 《미들마치》와 같은 좋은 소설들이, 점잖은 성직자 집안에서 일어날 법한 일이 인생 경험의 전부인 여자들이 그 점잖은 집안 거실에서 쓴 작품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해요.


“……여성 소설가들이 탁월한 경지에 오르려면 여성의 한계를 과감히 인정해야 한다.”9 이 발언을 보면 사안의 요점이 명확히 드러나요. 이 문장이 1828년 8월이 아닌 1928년 8월에 쓰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말씀드리고 나면,


당신이 대학 행정관일지라도 나를 잔디밭에서 내쫓도록 내버려두지 않겠어. 당신네 도서관에 자물쇠를 채우려거든 마음대로 하시지. 그렇지만 내 마음의 자유에는 대문도, 자물쇠도, 빗장도 절대로 채울 수 없어.


픽션 속 여성들의 화려한 면면을 얼른 떠올려보니, 여성 간의 관계가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너무 많은 것이 생략되었고 표현해보려는 시도조차 없었어요. 지금껏 제가 읽은 책 가운데 여자 두 명이 친구로 등장하는 책이 있었는지 열심히 떠올려보았어요.


여성을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은 사랑뿐이었어요. 시인은 열정적이거나 가혹할 수밖에 없었어요.


저는 창문 안으로 고개를 들여놓으며, 마음이란 참 신비한 기관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마음에 전적으로 의존하면서도 마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니까요.


얽매이지 않는 마음과 자유로운 육체와 자신감이 자연스럽게 드러났어요. 한 번도 방해를 받거나 반대에 부딪힌 적 없고, 태어날 때부터 어떤 영역이든 원하는 대로 마음껏 뻗어나갈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부여받았으며, 좋은 자양분을 섭취해가며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란 자유로운 마음에서 물질적 풍요가 느껴졌어요.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었어요.


생각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책은 마음의 표면에 아무리 세게 부딪힌다고 해도, 마음을 꿰뚫지 못해요.


그렇더라도 저는 첫 문장은, 자신의 성별에 대한 생각은 글을 쓰려는 모든 이에게 치명적이다, 라고 쓰겠다고 말하며, 책상으로 다가가 ‘여성과 픽션’이라는 제목이 쓰인 종이를 집어 들었어요. 순전히 남성적이거나 순전히 여성적이기만 하면 치명적이므로 우리는 여성적 남성 혹은 남성적 여성이 되어야 해요.


지적 자유는 물질적인 것들에 좌우돼요. 시는 지적 자유에 좌우되고요. 그리고 여성은 지난 2백 년뿐만 아니라 세상이 열린 이래 줄곧 가난했어요. 여성의 지적 자유는 고대 아테네 노예의 아들보다도 못했어요. 그러므로 여성이 시를 쓸 가능성은 조금도 없었지요. 그것이 바로 제가 돈과 자기만의 방을 그토록 강조하는 까닭이에요.


그래도 여러분은 여성이 책을 쓰는 일에 왜 그토록 큰 의미를 부여하느냐며 이의를 제기하실지도 모르겠어요. 제 말에 따르면 책을 쓰는 일은 엄청난 노력이 드는 일이고, 그 때문에 친척 아주머니를 죽여야 할지도 모르고, 오찬 모임에 늦거나 아주 좋은 동료들과 심각한 논쟁을 벌여야 할지도 모르는데 말이에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조금은 이기적인 의도가 있었어요. 교육받지 못한 영국 여성이 대부분 그렇듯, 저 역시 책 읽기를 좋아하고―그것도 아주 많이 읽기를 좋아하지요. 요즘 들어 저의 독서 식단이 조금 단조로워졌어요. 역사엔 전쟁 이야기가 너무 많고, 전기엔 위대한 남성이 너무 많이 나오고, 시는 점점 빈곤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픽션은, 그러나 현대 소설 비평가로서 저의 무능함은 충분히 드러났으니 소설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도록 할게요. 그래서 저는 주제가 사소하든 거창하든 절대 망설이지 말고 온갖 종류의 책을 써달라고 여러분께 부탁하고 싶어요. 저는 여러분이 무슨 수를 쓰든 충분한 돈을 스스로 마련해서 여행을 하고, 빈둥거리고, 세상의 과거와 미래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고, 책을 읽으며 몽상을 하고, 길모퉁이를 거닐며 생각의 낚싯줄을 강 속 깊이 드리울 수 있기를 바라요. 저는 결코 여러분을 픽션에만 한정시키려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이 저를, 또 저와 비슷한 몇천 명을 기쁘게 하고 싶다면 여행과 모험, 연구와 학문, 역사와 인물, 비평과 철학과 과학에 대한 책을 쓰세요. 그렇게 하다 보면 여러분은 틀림없이 픽션 기법에도 기여하게 될 거예요. 책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니까요. 픽션은 시와 철학과 함께 훨씬 더 나아질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여러분께 돈을 벌고 자기만의 방을 가지라고 말하는 건 현실성과 함께 살아가라고, 활기찬 삶을 살아가라고 당부하는 것과 같아요. 그런 삶이 누구에게 가르칠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여성이 여성에게 이야기할 때는 아주 불쾌한 무언가를 소매 속에 감추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여성은 여성에게 엄격해요. 여성은 여성을 싫어하지요. 여성―여러분은 이 낱말이 지겨워 죽을 것 같지 않아요? 저는 그래요. 그러면 이제 우리는 한 여성이 여러 여성에게 읽어주는 강연문은 특별히 더욱 불쾌한 무언가로 끝나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기로 해요.


그렇지만 저는 글 한 줄 쓰지 못하고 어느 네거리에 묻힌 이 시인이 아직도 살아 있다고 믿어요. 그녀는 여러분과 저 그리고 설거지를 하고 아이를 재우느라 오늘 밤 이곳에 오지 못한 수많은 여성의 안에 살아 있어요.


개개인의 짧은 삶이 아니라 진정한 삶이라 할 수 있는 우리들 공동의 삶―매년 5백 파운드의 수입과 자기만의 방을 마련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쓰고자 하는 바를 그대로 쓸 수 있는 용기와 자유로운 습성을 갖는다면, 또 가족이 함께 사용하는 거실에서 벗어나 인간을 서로의 관계뿐만 아니라 현실성과 관계 속에서 바라보고 하늘이든 나무든 모든 사물을 그 자체로만 본다면, 아무도 떨쳐낼 수 없는 밀턴의 악령 너머를 본다면, 또 우리가 매달릴 수 있는 팔은 없으며 혼자 힘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현실성으로 이루어진 세상이지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진 세상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당당히 직면한다면 언젠가 기회는 찾아올 테고, 셰익스피어의 누이동생인 죽은 시인은 스스로 몇 번이나 내던진 육신 속에 다시 깃들 거예요.


부유한 부르주아 지식층 출신인 울프의 계급적 한계 때문에 여러 가지 비판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자기만의 방》은 초기 여성주의 운동을 대표하는 저작물로서 지금까지도 널리 읽히고 사랑받는 여성주의 텍스트로 자리 잡았다.


울프는 여성 작가가 성공하려면 ‘자기만의 방’, 즉 정신적·경제적 자유가 보장되어야한다고 생각했다. 이 ‘자기만의 방’은 단순히 물질적으로 독립된 공간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남성 중심의 문학 전통에서 독립된 여성 문학, 더 나아가 문학의 본질을 왜곡하는 외부 조건에서 자유로운 풍요롭고 균형 잡힌 정신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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