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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한별 Apr 19. 2019

조금은 기대해도 괜찮지 않을까

뮤지컬 라이온 킹

내가 뮤지컬을 보고 싶게 만든 사진


현실에서는 주위에 사람이 없는지 살피고 혼자 노래를 부르며 길을 걷곤 하지만 뮤지컬에서는 대화를 하다가도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기이한 일이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이 픽션이라는 게 갑자기 체감되는 순간이다. 내가 뮤지컬이나 뮤지컬 영화를 잘 보지 않는 이유는 이런 이유였다. 그래서 사실 본 뮤지컬이라고 해봤자 캣츠 정도이다. 예전에는 누가 뮤지컬을 추천해도 조용히 웃기만 했는데, 몇 장의 사진을 보고 뮤지컬 라이온킹이 너무 보고 싶어졌다. 당장 티켓을 예매하려고 했지만 놀랍게도 남은 표가 전혀 없었다. 언젠가 기회가 있겠거니 하고 나는 인터넷 창을 껐다.


그리고 몇 개월 지나서, 나는 도쿄에서 뮤지컬 라이온킹 광고를 보게 되었다. 혹시나 해서 티켓을 찾아보니 바로 다음 날 좌석이 있었고 가장 좋은 좌석인데도 한국보다 6만원 가량 저렴했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바로 표를 예매했다. 나는 뮤지컬이 영어로 진행될까 일본어로 진행될까 궁금해하면서 극장을 찾아갔다. 브로드웨이 작품이라서 영어일 수도 있다고 추측했는데 내가 너무 뮤지컬에 문외한이었던 것 같다. 한 시간 일찍 출발했는데도 저녁 시간의 도쿄는 정말 사람이 많았고 결국 십분 정도 늦게 도착했다. 혹시라도 안 들여보내주면 어떡하지 걱정하면서 뛰어갔다. 다행히 10분 정도 대기하면 입장 가능하다고 알려주셨다. 기다리는 동안 스크린으로 써클 오브 라이프를 봤지만 그땐 이 뮤지컬이 어떤 것인지 아직 체감되지 않았다.


극은 일본어로 진행되었다. 나는 줄거리만 알아듣고 세부적인 표현을 전부 이해하진 못했다. 그래도 대사의 수준이 어렵지 않았다. 여러 명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하나의 장면을 그려가는 것을 보면 항상 눈물이 난다. 혼자서는 만들 수 없는 장면이고 그것을 위해 노력했을 시간, 정성을 상상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내가 이상한 건지 모르겠지만 왜 매스 게임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동물의 움직임을 표현하기 위한 장치나 움직임도 놀라웠다. 이런 게 예술이겠지. 각각의 동물마다 장치는 다르게 디자인 되었으며 디테일한 표현을 위해 세심하게 설계된 듯하다. 대사를 하는 동안에만 턱이 움직이고, 동물의 눈 깜빡임이나 특유의 동작이 숙달된 연기자를 통해 나타난다. 정말 표정이 보이는 것 같다. 배우들이 장치를 일일히 움직이면서, 장치로도 연기를 하지만 장치를 조정하는 본인도 연기를 하는 것이 신기했다. 예를 들면 장치로 자주(무파사의 신하 역할을 하는 새)를 연기하면서 동시에 자주를 연기하는 몸도 자주처럼 보이는, 내가 잘 모르는 세계의 일이었다. 배경을 연상시키기 위한 무대 연출도 대단했다. 이런 식으로도 표현할 수 있구나 하고 감탄했다. 나는 지극히 텍스트적인 사람이고 시각적인 요소를 어떻게 구성해야 한다는 감이 없기 때문에 더더욱 놀라웠다.


인간의 움직임으로 어떤 감정을 전달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잘 생각해보면 무척 신비한 일이다. 무파사가 죽어서 암사자들이 슬퍼하는 장면을 눈에서 눈물 같이 보이는 천을 뽑아내는 행동으로 연출하는데 언뜻 보면 이상해보일지 몰라도 보는 순간에는 굉장히 슬프게 느껴졌다. 스카와 하이에나는 역동적으로 움직이는데 반해 암사자들은 너무 슬퍼서 아예 움직이지 못한다든가. 연기란 참 대단하다.


개인적으로는 무파사가 왕으로서가 아니라 심바에게 아버지로서 이야기 할 때만큼은 무파사 가면을 벗은 채 이야기 하고 나중에는 다시 가면을 써서 왕으로 돌아감을 보여준 연출이 좋았다. 배우들의 연기가 모두 나무랄 데 없이 좋았지만 나는 티몬과 품바, 하이에나가 맘에 들었다. 티몬과 품바는 디즈니 라이온킹에서 방금 뛰쳐나온 것 같았고, 두 사람의 합이 정말 정말 잘 맞았다. 하이에나 특유의 비열함이나 하찮음도 잘 표현되었는데 나중에 커튼 콜에서 너무나 하이에나와 거리가 멀어보이는, 특히 여성 한 분이 키가 조금 작은 편이었는데 연기하는 동안은 다른 하이에나만큼이나 크게 보였어서 신기했다.


일본의 공연 문화가 그런 것인지 내가 우연히 그런 경험을 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공연장은 정말로 정숙했고, 입장 전에 핸드폰 전원을 끄는지 직원이 직접 확인한 후 가방에 넣는 것까지 체크한 후 입장 할 수 있었다. 몸이 뻐근해서라도 약간은 움직일만 한데 일체의 미동도 없어서 나는 긴장한 채로 공연을 봤다. 나중에서야 슬픈 장면이 나왔을 때 어디선가 눈물을 참는 소리가 나길래 그렇죠, 슬프죠. 저도 슬퍼요 라고 생각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뮤지컬을 거의 안 보는 사람이라 보통의 커튼콜을 모른다. 모두 박수를 쳤고 나도 열심히 박수를 쳤는데, 그 조용하던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자리에서 한 두 명씩 일어나더니 기립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도미노라도 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일어서서 박수를 쳐서 결국엔 다 같이 기립박수를 쳤다.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행복한 얼굴로 서로의 손을 잡고 감사의 인사로 화답했다. 내가 놀란 부분은 배역이 다양했는데 예상보다 배우가 적었던 것이다. 준주연을 제외하고는 모두 여러 배역을 소화한 거겠지. 배우들의 얼굴은 매우 행복해보였다. 극을 보고 있는 동안은 연기자가 연기하는 극을 보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데 그때 내가 누군가 열심히 노력하고 준비한 극을 봤다는 것을 깨달았다. 커튼이 여러 번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면서 커튼콜이 계속 이어졌다. 그동안 박수는 오랜 시간동안 이어졌다. 처음에 배우들은 배역을 내려놓은 얼굴로 인사를 하다가, 커튼콜이 반복되자 게 중에는 다시 캐릭터로 돌아가 맡은 캐릭터로서 인사를 하는 배우도 있어서 재밌었다.


이렇게 정신적으로 큰 감응을 주는 경험을 하고 나면 세상에는 나쁜 일도 슬픈 일도 많지만 인간은 이런 것도 할 줄 아니까, 아름다운 것도 만들 줄 아니까 조금은 인류에게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진다. 더 바라자면, 이런 류의  고전 스토리를 재창작한 콘텐츠가 현대와 맞지 않는 가치관을 벗어나 시대에 걸맞는 사상으로 나아갔으면 한다. 내년이면 2020 원더키디인데도 이 뮤지컬의 기본 구조를 떠받들어 주는 것은 혈통의 신성성이고 심바는 오직 무파사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정통한 왕으로 인정 받는다. 심바를 세 번이나 전부 이기고 “이번에도 나의 승리네" 라고 말하던 현명하고 강인한 날라가 왕이 되는 스토리도 한 번 쯤은 보고 싶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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