善의 씨앗을 퍼트려 萬物(만물)을 움트게 하라(16)
善과 惡이 공존하며 하나 되는 세상(16)
세상은 善한 사람만 모여 사는 세상도 없고, 반대로 惡한 사람만 모여 사는 세상도 없다. 선한 사람도 惡의 인연을 만나면 惡한 일을 할 수 있고, 惡에 과보를 받을 수 있다. 반대로 惡한 사람이라도 善한 인연을 만나면 善한 일을 할 수 있고, 善의 과보를 받을 수 있다.
善과 惡이 공존하며 하나 되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길은, 우선 나 자신부터 모범을 보이며 선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악행을 하는 사람을 보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만류할 수 있어야 하고, 선행을 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잘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도와주며, 자신도 상대와 같이 선행을 본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惡한 사람을 善한 사람으로 인도할 수 있을 때 惡이 점차 줄어들면서 善한 사람이 많은 세상이 되도록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 그래야 善과 惡이 공존하면서도 선의 나무들이 더 무성하게 자라 善의 숲을 이루어 온 인류에 퍼져나가 아름다운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가게 되는 것이다.
혹자는 나는 종교가 없으니 나와는 상관이 없다거나, 나는 다른 종교니 상관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무조건 부정하기보다는, 한 발 물러서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 그래야 현상을 보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분별력을 기를 수 있다.
우리는 四聖六凡(사성육범)이라는 열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즉 네 가지는 성인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고, 나머지 여섯 가지는 범부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네 가지 요소 중 첫 번째는 부처님의 요소를 갖고 있기 때문에 가끔은 부처의 행동을 할 수 있고, 두 번째는 보살의 요소를 가지고 있기에 보살의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그다음은 각 성문<설법을 듣고 四諦(사제 : 고집멸도)의 이치를 깨달아 아라한의 되고자 하는 불제자>과 연각(스스로 도를 깨달은 성자)의 모습을 말한다. 이렇게 우리는 네 가지의 성인의 요소를 갖고 살아가고 있다.
그럼 六凡(육범)은 무엇인가. 흔히 육도라고 하는데 지옥, 아귀, 축생, 인도, 천도, 아수라의 여섯 가지 요소를 말함이다. 이 열 가지 요소를 가지고 살면서 상황에 따라 어떤 요소가 밖으로 표출되느냐에 따라 성인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악인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다.
(참고:무비스님의 지장경 강의)
결국 좋은 사람, 착한 사람이라고 해서 항상 좋은 일만 하는 것도 아니고, 악한 사람이라고 해서 항상 악한 행동만 하는 것도 아닌 것이다. 예를 들면, 악한 일을 자주 행하는 사람도 가끔은 떨어진 물건을 주워 주인에게 돌려줄 수 있으며, 어르신이 리어카에 짐을 가득 싣고 언덕을 올라가는 것을 보고 뒤에서 밀어드릴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열 가지 요소가 어떤 인연을 만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열 가지를 기술했지만 우리는 상황에 따라 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다.
因緣과 그에 대한 果報의 감응은, 한 치의 오차도 없고 어그러짐이 없다. 因果를 무서워해야 善을 쌓고 福을 짓는 행위를 하게 된다.
善行을 하는 사람은 봄 동산에 풀과 같아서, 그것이 자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福이 날마다 자라날 것이고, 惡行(악행)을 하는 사람은 칼을 가는 숫돌과 같아서 그것이 닳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날이 갈수록 점점 복이 없어져 간다(명심보감). 그러니 善行을 쌓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죽음은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인생의 중대한 일이기에, 특히 환자를 다루거나 돌보는 사람(의사, 간호사, 돌봄 인력, 가족, 친지 등)은 자신이 환자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고 생각하고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을 내어 죽는 이가 편안한 마음으로 극락왕생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정성껏 도와주어야 한다. 이런 행위가 큰 福을 짓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善을 쌓고 福을 짓기를 바란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잘못한 일을 반성하고 참회하는 것을 먼저 해야 한다. 이것이 善을 쌓고 福을 짓는 출발점이다.
선행과 악행의 결과는 당장 나에게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인연이 무르익으면 감이 빨갛게 익듯이, 善行과 惡行 역시 인연이 무르익어 때가 되면 반드시 그 결과가 미치게 마련이다. 다만 과보를 받는 데는 기한이 정해지지 않았을 뿐이다.‘선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악한 일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권선징악 역시 동일한 의미이다.
살아생전에 왜 善行을 하라고 하는지, 어떤 것이 큰 선이고 작은 선인지를 다음의 사례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어떤 것이 큰 선이고 작은 선(大小)인가?
옛날에 위중달(衛仲達)이라는 사람이 한림관(翰林館)의 직책을 맡고 있었는데, 염라대왕의 명부(冥府:사람이 죽은 뒤에 심판을 받는 곳)까지 끌려갔다. 주무 담당관이 귀졸(鬼卒)한테 분부하여 그가 이승에서 행한 선과 악행에 관한 두 가지 기록을 가져오도록 명했다.
보내온 두 가지 기록을 보니, 惡行(악행)에 관한 기록은 뜰에 가득 쌓였는데, 善行(선행)에 관한 기록은 한 두루마리로 겨우 젓가락 크기에 불과했다. 그런데 저울을 꺼내 두 기록의 무게를 달아보니, 뜨락을 가둑 채우던 惡의 기록이 오히려 가볍고, 젓가락 크기만 하던 것이 더욱 무거웠다. 이를 본 중달이 이렇게 물었다.
“소인은 나이가 아직 마흔도 채 안 됐는데, 제 죄악이 저렇게 많을 수 있습니까?” 이에 담당관이 대답했다.
“한 생각이 바르지 못하면 실제로 실행에 옮기지 았았어도, 악행을 저지른 셈이 되어 이것이 곧 죄악이 되니, 꼭 악행을 범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래서 이번에는 중달이 젓가락 크기만 한 족자에 쓰인 것이 무엇인지를 묻자 담담관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조정에서 일찍이 삼산(三山:복건 성 복주부)에 돌다리(石橋)를 놓는 큰 토목 공사를 계획한 일이 있었는데, 그대가 황제께 상소를 올려서 다리를 놓지 말도록 간하여 백성을 부리고 재산을 축내는 일을 면하게 시도한 적이 있었다. 이것이 상소문 초고이다.
이에 위중달이 말했다.
제가 비록 상소문을 올렸지만, 조정에서 저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아 그 일이 시행되지 않았거늘 어떻게 이처럼 무게가 많이 나가는 공덕이 된다는 말씀입니까?
그러자 담담관이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
비록 조정에서 그대의 간언을 듣고 따르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대의 그 일념(一念)이 이미 만백성을 노역에서 면하도록 하겠다는 생각이 간절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조정에서 그때 그대의 간언을 받아들였다면 그 선한 공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더욱 컸을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뜻이 천하 인민의 복리를 도모하는 국가의 앞날을 위한 생각에 있다면, 그 선행이 비록 작은 것이라도 공덕이 매우 크다. 반대로 오직 한두 사람을 위한 것이라면, 비록 아무리 큰 일이라도 그 공덕이 작게 된다.
참고) 원황 지음, 운명을 뛰어넘는 길
우리나라에서 상영되었던 “신과 함께”라는 영화는 불교의 인과응보 사상을 표현한 경우라 판단된다. 단순히 재미로 보는 경우도 있지만, 살아있을 때 지은 善과 惡행이 죽어서 염라대왕 앞에 가면 業을 보는 거울에 죄상이 모두 드러나게 되어 그에 상응하는 심판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지공 선사는 인도태생으로, 중국 원나라 때 유명한 승려였다. 그의 인과법문에 따르면, 죄악을 지어 죽어서 지옥에 들어가면, 염라대왕 앞에 업경대(善과 惡의 업을 비춰주는 거울)에서 죄상이 모두 드러나며, 부모와 육친이 연루되어 함께 고난을 받게 된다고 하였다.
어찌 죄업을 함부로 지을 수가 있겠는가? 응과응보를 믿지 않고 반성함이 없이, 오뉴월 메뚜기 날뛰듯 전통으로 이어왔다며 불법적인 악행을 저지르는 정신 나간 또라이 집단, 이들의 지시에 따라 축생이 되어 부림을 당하며 악행을 저지르는 무리들은, 머리 숙여 마음속 깊이 반성하고 반드시 참회해야 할 것이다.
인연이 도래하면 이런 정신나간 또라이 집단이나 무리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항상 반성하고 참회하며 경각심을 갖는 기회로 삼아야 福을 짓는 기회가 될 것이다.
여경(餘慶)은 선한 일을 많이 행한 보답으로 그의 자손들이 받는 경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음덕(蔭德:조상의 덕)과 같은 의미이다. 그러니 자손들을 위해 음덕을 쌓는 일을 평생토록 꾸준히 해야 가정이 편안해질 것이다.
아울러 善과 惡이 공존하며 하나 되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은, 우리 모두가 함께 노력하여 善의 기운이 온 인류에 퍼져 나아가게 함으로써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데 선도자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