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루야 미노루 vs 이토 준지 귀인이거나, 괴인이거나.
내게 가장 박제하고 싶은 공간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CNN’이라고 대답하겠다. 애틀랜타에 있는 방송국 말고, 경성대 앞에 있던 전설의 만화가게 CNN. 그곳에서 내 20대의 가장 포근한 시간들을 보냈다. 만화와 라면과 과자가 있는 곳. 책 한 권에 300원!! 이걸 한 시간 동안 읽든, 하루종일 읽든 뭐라고 하지 않는 곳이었다. 3000원짜리 라면을 시키면 주인아주머니가 가끔 공깃밥을 서비스로 주시는. 작은 가게가 아니었다. 거의 100평 가까이 되는 대형 만화가게였다. 스타벅스의 익명성과, 단골가게의 따뜻함과, 말도 안 되는 가성비를 지닌 곳. 왜 cnn인지는 아직 명확히 모릅니다만. 방송국만큼이나 주요하고 다양한 소식을 ‘만화’라는 매체로 전하는 곳이어서가 아닐까요. 아 주인아주머니한테 진작에 물어볼 걸. 그럼 이렇게 궁색한 소리 안 해도 될 텐데.
만화방에 온 첫날, 첫 책으로 후루야 미노루의 ‘Lets go!! 이나중 탁구부’를 읽었는데 그 순간 이곳에 아주 자주 오게 될 거라는 걸 직감했다. 후루야 미노루는 중학 시절 탁구부를 지냈던 경험을 살려 이 만화를 그렸다고 하던데 도대체 무슨 경험을 한 것인지 심히 의심스러운 에피소드가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만화를 좋아했는데, 평소에 긴 흐름의 스포츠 만화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내게 이것은 혁명적인 청춘물, 그 자체였다. 주인공들은 탁구를 사랑하고, 우정, 꿈, 사랑에 울고 웃는다. 다만 우리가 아는 우정, 꿈, 사랑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 청춘 3 대장을 무작정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아주 음침하고 변태스럽고 황당할 거란 각오를 조금만 한다면 당신은 주인공들과 함께 미쳐가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걸 보면서 낄낄대고 있으면 주변 사람들이 깔보지 않습니다. 심지어 슬금슬금 피하기까지. 일종의 호신술이죠.
그뿐만이 아니다. 이걸 계속 보다 보면 친구들이 아무리 이상한 짓을 해도 화가 나지 않는다. 일종의 수련이기도 한 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책을 안 볼 이유가 없다. 구할 수 있으면 당장 어떻게든 구해서 보시기를. 당신의 인생은 어떤 방향으로든 향상된다. 그리하여 후루야 미노루는 나의 첫 번째 귀인(이라 쓰고 괴인이라 읽어도 무방)이 된다.
줄거리를 소개하려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중학 탁구부 6명의 일상이 주된 이야기인데, 큰 플롯도 중요한 목표도 없다. 마에노, 이자와, 다나까, 다나베, 다케다, 시노시타, 이 6명을 소개하고 설득하는 것이 줄거리이자 곧 만화의 목표다. 그래도 가장 감동적인 장면 몇을 소개하자면, 지독한 액취증으로 유명한 혼혈 다나베군의 일화. 그가 겨드랑이를 퍼득거리거나 민소매를 입을 때 사람들은 ‘다나베 경보’를 외치며 숨을 참지만 그 누구도 ‘너는 액취가 심하다’라는 사실을 말해주지 않는다. 그가 상처 입을까 봐 말이다. 전교생이 모두 조금씩 자신의 목숨과 맞바꾸며 그의 순수성(다나베는 무척 착하다.)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심지어 탁구 대회에서는 다나베의 액취를 적극적으로 활용, 팀의 승리를 이끄는 전략적인 사고도 잊지 않는다. (다른 팀원들은 코마개를 하고 있다) 누군가의 단점을 따스히 감싸주고, 오히려 장점으로 승화시키는 교훈.
두 번째는 할머니 탁구선수에 관한 것으로 그녀는 젖가슴이 배꼽까지 늘어져 있다. 스스로 그런 것들을 개의치 않는 쿨한 성격이라 노브라로 다니는데, 가끔은 그런 호방함이 지나쳐 젖가슴을 쟁반으로 사용하기도, 탁구채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런 것들이 여성의 신체를 희화화한다는 느낌이라기보다는, 진짜 고수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자신의 신체를 초월한 사람의 노련함이랄까. 아무튼 헛소리를 늘어놓는 것 같지만 지금 이걸 쓰는 내 얼굴이 무섭도록 진지한 것과 마찬가지로 후루야 미노루 역시 이걸 장난으로 그리진 않았다. 후에 그는 자신이 개그만화에만 한정된 사람이 되는 게 무서웠는지 두더지 같은 진지한 만화를 그리기도 했다.(소노 시온이 영화로 만들기도.) 하지만, 하지만! 이런 그림체도 그릴 수 있구나 하는 것 이상의 감흥은 느끼지 못했다. 팬이란 의외로 냉정한 것이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다른 귀인(역시 괴인) 이토 준지. 후루야 미노루가 양지에서 웃으며 뛰어다니는 천재라면, 이토 준지는 지하실에서 히죽거리는 천재의 느낌이다. 낮에는 스스로 지하실에 갇혀 있다가 밤이 되면 동네에 나와서 괜스레 느리게 걸어 다니며 남의 집 창문을 훔쳐볼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실제로 인터뷰를 보니 뭐랄까. 그냥 순해 보이는 공대생 같았다. 심지어 살짝 미남이다. 고양이를 좋아하고, 아내를 무서워한다.
처음 접한 작품은 단편집 1편에 있는 ‘악령의 머리카락’인데 머리카락이 그렇게 무서운 신체인지 처음 알았다고나 할까.(그전까지는 머리카락을 생각하면 전지현의 엘라스틴 광고를 떠올렸다.) 주인공들의 등장도 너무나 충격적인데 일단 처음에는 다들 실루엣이나, 뒷모습으로 나온다. 미남미녀 특유의 그 아름다운 태에 안심하는 순간 그들은 천천히 뒤돌아 본다. 근데 눈이 다 사백안이다. 제정신이 아닌 미남 미녀보다 무서운 게 있나요. 너무 무서운데 눈을 못 감잖아요. 그래도 조금은 잘 생겼거든. 그리고 결국은 그 조금 남아있는 아름다움의 마지막 조각까지 다 파괴해 버리면서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다. 만화가가 되기 전 직업이 치과 기공사라고 하던데. 조그만 것을 오랫동안 보고 있는 것의 위험성을, 그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 집요함과 장인 정신을 공포로 옮겨 놓으면 이토 준지의 만화가 되는가 싶었다. ‘토미에’와 ‘사거리의 미소년’이 내 맘 속의 캐릭터인데. 국내에서는 아마 소용돌이가 유명할 것 같다.(한국에서도 영화로 리메이크되었기 때문에) 그중 토미에에 대해 잠깐 얘기해보고 싶다.
토미에는 누가 봐도 아름다운 소녀이다. 당장 유튜브에 토미에 메이크업 커버를 쳐 보시라. 수십 개의 영상이 나온다. 그녀는 극강의 미모만큼이나 극단적인 근성의 소유자인데 지옥에서 돌아온 스토커 마냥 남자들을 쫓아다니며 유혹한다. 아 일단 토미에는 인간이라고 보기 어렵다. 귀신이라고 보기도 좀 애매하다. 재생능력이 월등히 탁월한 초자연 존재 정도로 해 두자. 암튼, 그렇게 유혹을 해서 그 남자가 자신을 좋아하게 되면 소매를 걷고 남자의 발작버튼을 꾹 꾹 누르는 것이다. 그럼 남자는 무언가에 홀린 듯 토미에를 살해한다. 그리고 다음 날, 그 토미에는 살아 돌아오지. 조금 기괴한 모습으로. 가만 생각해 보면 얘처럼 불쌍한 애도 없다. 남자들은 자꾸 자기를 죽이려고 하지, 성격은 안 좋아서 계속 사고 치지, 심지어 죽지 않는 영생의 몸이라 이 일을 계속 저지르고 당하고, 저지르고 당하고. 도대체 사주에 무슨 살이 꼈길래. 보통 호러 장르와 미인은 악어와 악어새처럼 상생 관계이긴 하다. 비명을 지르는 미인, 도끼로 살인마를 해치우는 미인을 사람들은 보고 싶어 한다. 하지만 토미에는 그 미인들과 다르다. 이토록 뻔뻔하고 사람을 돌게 만드는 미인은 이 장르에서 처음일 것이다. 이런 미남 미녀들이 이토 준지의 단편집에 수두룩하게 나온다. 클리쉐가 주는 편안함을 짓이겨 공포로 만드는 사람. 이토 준지는 그런 작가다. 정도를 모르는 사람. 점을 한 열다섯 개만 찍어도 되는데 천오백 개를 찍어서 느껴지는 공포를 선사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내가 후루야 미노루와 이토 준지를 귀인이라 느끼는 이유는 선을 넘어도, 충분히 근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줘서 그렇다.
넘는다, 제대로.
애매하게 말고, 제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