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린치의 '블루 벨벳'
어른들이 넌 뭘 좋아하냐고 물을 때. 계몽사에서 나온 ‘월트 디즈니 전집’이라고 대답했다. 공식적으로는!
비공식적으로는, 누군가 집에 놓고 간 ‘선데이 서울’ 류의 가십성 잡지를 탐독하곤 했는데 주현미의 숨겨진 대학원 애인이 누구인지는 관심 없었고, 조그맣게 실리는 한 쪽짜리 범죄소설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 글들은 기이하고 미스터리했다. 한 번은 화성연쇄살인을 다룬 글을 읽었는데, 화성이라고 해서 sf 범죄물인 줄 알았다가 경기도 화성이라고 해서 무척 놀랐다. 아무튼 나는 그때부터 좀 기괴한 것, 이상한 것들을 좋아했다. (멀미 때문에 책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해서, 전원 속에서 고전을 읽는 소녀를 상상하셨다면 서운합니다. 힝.)
나의 행보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더욱 박차를 가했다. 옆 동으로 큰 고모네가 이사를 왔기 때문이다. 고모 집에는 3형제가 있었는데 그중 막둥이 오빠는 매일매일 비디오를 빌려보는 영화광이었다. (유학을 갔다 왔다고는 하나, 무엇을 공부했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나는 그 오빠가 맘에 들었다. 그가 빌려오는 비디오는 죄다 공포물이었기 때문에. 모든 금기의 집합체였던 그 작품들을 나는 참으로 성실하게 보았다(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어른들은 어린이가 시청하는 공포영화에 관대하다. 야한 것만 엄격함). 그리하여 나는 "얘는 무서운 걸 좋아해, 참 희한해. 막 피나고 그러는 거 보면 안 무섭니?"라는 소리를 지겹도록 들으며 컸다.
나는 정말 무섭고 잔인한 영화를 좋아하는가? 전혀. 내 마음에 남은 영화들을 떠올려 봤을 때 사지 절단이 주요 클라이맥스가 되는 스플래셔 장르인가 하면 전혀. 일단 그것들은 몇 번만 봐도 대충 패턴을 알겠어서 지루하고, 남의 팔다리가 썰리는 장면에 미학적인 쾌감을 느낄 만큼 가학적인 성격이 아니며, 무엇보다 난 피를 보면 헛구역질을 하는 사람이다. 그럼 왜 오해받을 만한 장르의 영화를 주구장창 보고 있는가. 나는 초. 중. 고 시기 동안 도대체 무엇을 찾고 있었는가.
아름답고, 슬프고, 무섭고 동시에 섹시한 꿈, 같은 영화. 그러니까 한 번도 여기에 딱 맞는 영화를 본 적은 없지만 적어도 내가 찾는 건 저런 정서를 포함한 영화였다. 거기에 가장 근접한 장르가 공포였을 뿐. 어쩌면 내가 원하는 영화는 내가 직접 만들어서 봐야 하나보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스무 살이 넘어 나는 그 영화를 찾았다. 제목은 ‘** **’, 장르는 ‘데이비드 린치’다(그렇다. 그가 곧 장르다. 제목은 잠시 후에).
데이비드 린치 감독을 처음 알게 된 건 고2, 여름방학이 되기 전이었다. ‘로스트 하이웨이’라는 영화가 개봉했는데 팸플릿이 너무 근사했다. 전형적인 금발의 팜므파탈과 초현실적인 플롯의 조합이라니. 마침 엄마의 친구분이 극장 일을 하고 계셔서 자주, 몰래 청불 영화들을 관람하곤 했는데(나의 영웅, 창식이 아저씨) 혹시 이 영화도 그럴 수 있겠냐고, 저에게는 인생이 달렸다고 부탁드렸더니. "수연아, 이건 안돼!! 이건 애들 보는 영화가 아냐. 솔직히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겠어서 아저씨는 중간에 나왔다"라고 하셨다.
진짜 심장이 두근거려 터지는 줄 알았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얼마나 이상하길래. 1년 후, 고3 겨울방학에 비디오 가게에서 어른인 척하며 이 영화를 빌렸다. 보통 이런 상황에선 실망할 확률이 높은데, 어떤 실체도 오래된 상상보다는 빈약하기 때문이다. 아니 그런데! 이 영화는!! 데이비드 린치였구나, 십 년 넘게 찾아 헤맨 내 감독. 이게 어떤 느낌이냐면, 엄마가 날 놀릴 때마다 했던 굴다리 밑에서 널 주워 왔으니 니네 엄마 찾아가라의 그 엄마, 다리 밑에 날 놔두고 간 친모를 찾은 느낌인 것이다(그 엄마가 또 맘에 쏙 드는 거다).
하지만 ‘로스트 하이웨이’는 ‘** **’의 주인공은 아니다. 그러니까 린치에게는 그 이상이 있었고 이 영화는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내가 가장 자주 보고, 또 소망했던 영화는 바로 '블루 벨벳’(86년 제작)이다.
당신이 데이비드 린치를 알고 있다면 ‘블루 벨벳’이 그의 필모그래피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대중적인 영화라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린치를 모른다면 아마도, 당신이 여지껏 본 영화 중 가장 기괴하고 난해한 영화일 것이고, 높은 확률로 당신은 이 영화를 안 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모른다.
사실 내게는 어떤 사람과 친해질 수 있을까 하는 기준이 몇 있었는데, 그중 가장 정확한 기준이 바로 이 영화였다. 일단 자연스러운 계기를 만들어 ‘블루 벨벳’을 보여준다. 상대방이 이 영화를 좋아하는가. 그럼 우리는 친해질 수 있다(2차로 떡볶이를 먹으러 가자). 싫어하는가. 이유를 일단 들어보자. 감독이 변태인 것 같다거나 주인공이 미친놈이라는 원색적인 이유가 나온다면 약간의 거리가 필요하다(성격 차이로 헤어진 경우). 하지만 내용 자체가 이해가 안 된다고 하면 상냥하게 설명을 해 보자(설명이 끝나거든 밧줄은 꼭 풀어주기). 내 인생 영화가 되었어라고 말하는가. 저녁에 고백할게.
이렇게 적고 보니, 사이비 신도들이 새로운 신도들을 영입할 때 하는 가스라이팅 같기도 하다. 있잖아(부드럽게 팔짱), 이 영화는 2008년 미국 영화 연구소 (AFI)에서 선정한 10대 미스터리 영화 중 하나야. 그리고 아카데미 알지. 미국에서 제일로 유명한 시상식. 거기 감독상 후보작이었잖아. 진짜 이거는. 몰라서 모르지, 알면은 황홀한 영화다 너? 린치라이팅의 시작이다(실제로 1년에 1명 정도 영입되고, 5명에게 손절당하는데 이 정도면 평균타율). 다만 린치는 자신을 신이라 칭하지 않는다. 헌금도, 제사도, 감금도 없다. 그는 당신의 불면증을 포함한 질병을 고칠 수 없다. 한 밤에 자신의 침소로 들라는 요구도 하지 않지. 다만 린치가 약속하는 것은, 아름다운 악몽, 깨고 나면 하루종일 괜시리 슬프고 그리운 악몽이다. 린치의 영화 중에서도 블루 벨벳을 특히나 애정하는 이유에는 주인공인 제프리의 영향이 크다.
귀를 쫒는 소년. 제프리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다. 평화로운 마을(월트 디즈니 속 세상처럼) 룸버튼이 소개된다. 제프리는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단 소식을 듣고 고향인 룸버튼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산책하던 중, 사람의 잘린 귀를 발견하게 된다. 보통은 줄행랑치겠지만 그는 귀를 집어 들어 요리조리 살펴보고 경찰에 신고한다. 심지어 경찰이 못 미더워, 그 사건을 파헤치려 위험을 감수하기까지 한다. 그 과정에서 동네 ‘슬로우 클럽’이라는 곳에서 노래하는 ‘도로시’라는 여성이 이 잘린 귀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제프리는 이 사건을 맡은 형사의 딸, 샌디와 함께 자신만의 수사를 시작한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나온다. 도로시가 슬로우 클럽에서 ‘블루 벨벳’을 부르는 장면이다.
옆자리에는 나를 좋아하고 사건을 도와주기까지 하는 금발의 인싸 여학생이 앉아있지만, 제프리는 속절없이 도로시에게 빠져든다. 그녀의 노래하는 모습은 아름답지만 슬프고, 관능적이면서도 두렵게 느껴진다. 이 순간 나도 ‘귀를 쫓는 소녀’가 된다. (이 장면은 사실 이상하다. 도로시의 옷은 컷 전환과 함께 다른 옷으로 바뀌고, 뒤에 서 있던 세션들도 갑자기 증발된다. 시간 순서상 말이 안 되고, 어떤 이는 감독의 실수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런 연출은 도로시의 미스터리함을 배가시킨다. ) 그리고 제프리는 도로시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많은 위험을 감수하고, 명분이 수단을 설득하리라 믿게 된다. 가택 잠입 및 관음. (이 영화는 86년도 작입니다. 좀 봐주십쇼. 요즘 영화라면 어림없죠!)
잘린 귀를 다시 기억해 보자. 그 잘린 귀의 본체가 도로시의 남편이라는 사실과, 그것을 잘라낸 프랭크라는 남자가 그녀의 남편과 아이를 인질로 그녀를 유린하고 있었다는 대목은 악몽에 가깝다. 도로시에게 깊은 연민과 매혹을 동시에 느끼는 제프리는 그 악몽 속에서, 자신을 죽이러 온 친부와 대적하듯 사력을 다해 싸운다(이 영화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해석하는 견해도 상당히 많다). 로이 오비슨의 ‘인 드림스’가 프랭크 일당 중 한 명의 립싱크로 흘러나올 때 우리는 그 친부, 아니 프랭크가 적당히 미친 범죄자가 아니라, 지옥에서 온 또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In dreams I walk with you
In dreams I talk to you
In dreams you're mine
이 가사가 나올 때, 프랭크는 무척 괴로워하며 슬퍼한다. 자고로 빌런의 미덕이 어느 정도의 복잡함이긴 하나 결국 클라이맥스(그러니까 죽기 전)에서는 자신의 마음을 미주알고주알 다 말해주는데 프랭크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사실 아까 그 ‘슬로우 클럽’에서 도로시가 ‘블루 벨벳’을 부를 때 프랭크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가 도로시를 바라보는 눈빛이 음탕했냐 하면 아니었다. 그는 소년의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이 영화에서 소년과 악당은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팜므파탈과 모성의 대상도.
그리고 약간 머리가 아파지려고 하는 즈음에 선물처럼, 해피엔딩이 선사된다. 프랭크는 고향으로 돌아갔고(제프리의 지옥행 총알 티켓, 편도), 도로시의 아이는 돌아온다(남편은 죽었다. R.i.p). 그리고 긴 악몽에서 깬 제프리는 샌디와의 썸을 끝내고 커플이 된다. 마지막 대사는 이렇다. 샌디가 한다.
"정말 이상한 세상이야, 그렇지?" (응, 끝내주게 이상했어).
만약 이 영화가 맘에 들었다면, 이후에는 ‘멀홀랜드 드라이브’ -> ‘로스트 하이웨이’ -> ‘트윈픽스 시리즈’ 순서로 보면 좋을 것 같다(이유는 비밀, 궁금하면 보기). 그리고 어느 날 저녁 내 고백을(아니, 싫다고만 하지 말고).
어떤 일은 머리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그냥 체험되는 것이라는 걸 린치의 영화로 알게 됐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을 소망할 수 있다는 것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린치가 아니라면 나는 소망하던 그 세계에 영원히 들어설 수 없었을 것이다. 비슷한 곳조차도. 그래서, 데이비드 린치는 하나의 장르라고 얘기했다. 올해로 린치는 77세가 되었다. 유튜브에서 날씨 중계를 아마도, 취미로 하고 있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