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쓰메 소세키식 사랑 고백.
임신을 한 이후 주변 사람들의 입덧 후기를 많이 찾아보았다.
‘하루종일 막히는 도로 한복판을 시속 100미터로 이동하는 기분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차에서 10개월 동안 못 내리는 거죠.’
햐…이거 큰일이구나. 나는 멀미도 심한데 입덧도 더 유별난 거 아닐까, 왠지 비장한 마음이 되었다. 그래서 뭘 했냐면 읽을 책을 잔뜩 사 모았다. 임신 기간 동안 어디 가지 말고 책이나 읽자. 그럼 자동으로 태교도 되겠지. 그러니까 나쓰메 소세키를 알게 된 것은 입덧에 대한 공포와 태교라고 해도 좋다. 그러나 웬일인지 나는 입덧을 하지 않았다. 구토 한 번이 없었다. 이 산뜻한 10개월을 위해 그동안, 멀미라는 할부값을 미리 낸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만세!!
입덧에 대한 공포가 사라지자 태교에 대한 의욕이 생겼다. 이른바 열린 태교 프로젝트. 그리고 책장에서 가장 먼저 골라낸 책은 ‘인간실격’! (그렇다. 다자이 오사무다.) 첫 문장은 ‘부끄럼 많은 생애를 살았습니다.’ 이후에는 정말 부끄러운 내용들이 많이 나온다. 아무리 열린 태교라지만, 이건 너무 열렸다. 다시 책장을 살펴보았더니
다자이 오사무, 무라카미 류 등의 탐미주의 소설들
범죄 심리학 관련 서적.(혹시나 프로파일러 되고 싶을까 봐)
몬테 크리스토 백작 전권, 퍼트리샤 하이 스미스와 조이스 오츠 캐럴의 스릴러 소설들.
김승옥의 무진기행과 기형도의 시, 장정일의 책 등
우울한 청춘서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입덧을 대비해 사놓은 책들)
영원히 읽지 않을 것 같은 과학 벽돌책.
이런 책들을 잘도 사모았네, 싶은 책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이 책들을 읽어주고 난 뒤 과연 어떤 아이가 나올 것인지 문득 두려워졌다. 태어나자마자, 한숨을 쉴 것 같고 말이다. 조금 더 닫힌(보수적인) 태교가 필요했다. 다급한 마음으로 ‘입덧을 대비해 사놓은 책들 칸’으로 눈을 돌리니 태교에 어울릴 법한 동물친화적인 소설이 한 권 꽂혀 있었고 그렇게 나는 나쓰메 소세키를 만나게 된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 10장 남짓을 소리 내어 읽는 식으로 태교를 했는데 한참 읽다 보니 고양이가 인간을 깔보는 내용이었다. 태교에 적합한가? 잠깐 고민하다가 아예 없는 얘기도 아닌데 그냥 읽자. 이렇게 ‘그냥’ 나쓰메 소세키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쓰메 소세키를 읽었던 그 10개월은 참으로 좋았다. 조금은 열린 듯, 닫힌 중도 태교 성공.
그렇다면 나쓰메 소세키는 누구인가.
근현대 일문학의 아버지이자, 1000엔 지폐 도안의 주인공.(2004년 이후로 노구치 히데요 세균박사로 바뀜)
어느 나라건 지폐에 들어가는 인물은 호불호가 없는 나라의 자랑일 텐데, 소세키가 그런 인물이었다니 알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진다.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하나 같이 태평하고 한가해 보이기 때문이다. 가방끈은 길지만, 돈은 못 벌어 궁색하고, 생각은 날카롭지만 행동은 없어 실속이 없고. 그래서 존경을 받기도 하지만, 미움도 받고. 무해하지만 위협적이지는 않은 그런 한가한 지성인을 소세키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옆집에 사는, 한가하고 한심해 보이지만 말이 좀 통하는 아저씨가 사실 노벨상 후보에 거론되는 사람이라고? 이 알 수 없는 배신감.
하긴 그는 거의 100년 전, 사람이다. 그럼에도 지금 옆집에 사는 사람처럼 느껴진다는 점은 그의 글이 시대를 통과해 인간의 본질을 꿰뚫었기 때문일 것이다. 백 년을 앞선 한가함이라니. 냉소라니. 메이지 시대에, 런던유학을 다녀온 소세키는 실제로 접한 외국생활과 일본에서 수용한 서양 문물에 대한 차이점을 누구보다 체감한다. 그의 눈에는 체질에도 맞지 않는 외국 문물을 악착같이 받아들이려는 자국민들이 마땅치 않았던 모양이다. 그의 소설에 자기 자신을 비롯한 사회에 대한 자조적인 유머가 많이 나오는 이유다.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을 때, 가르치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조용히 폭로하는 사람도 있다. 전자는 선생이 되고, 후자는 작가가 되려나.(사실 소세키는 평생 둘 다였다. 작가와 선생은 이상하게 하나의 세트다.) 소세키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시발점에는 평생 그를 괴롭혔던 신경쇠약이 있겠지만(글 테라피 느낌으로) 소설을 계속 유지한 동력은 이런 사회에 대한 못마땅함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못마땅함은 당연히 관심과 애정에서 나온다.
소세키는 부모가 쉰이 다 되어가던 무렵에 낳은 막둥이였다. 부잣집이었지만, 그가 태어날 때쯤 이미 가세가 기울어 가고 있었고, 복잡한 사정으로 양아버지와 친아버지를 오가며 살았다. 누구 호적에 넣을 것인지, 양육비를 누가 댈 것인지는 철저하게 경제의 개념에서 다뤄졌다. 예를 들면 나쓰메의 친 아버지는 이미 대를 이을 아들이 있으니 나쓰메를 부양하지 않으려다가, 나중에 장남, 차남이 연이어 사망하고 나쓰메가 학문에 재능을 보이자 그를 호적에 받아들였다. 이후 나쓰메가 성인이 된 후 소세키라는 필명으로 유명해지자, 양아버지였던 자가 갑자기 나타나 지속적인 부양비를 요구했다. (이 이야기가 궁금한 사람은 그의 자전적인 소설 ‘한눈팔기’를 보시라.) 그의 글이 한가해 보이지만,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쓸쓸해 보이는 것은 바로 이 유년기 때문이 아닐까. 마음을 누일 자리가 없는 어린이가 똑똑하기까지 하면 이런 글이 나오는 것일까. 왠지 미안하다. 그 시기의 나쓰메 어린이를 응원하고 싶다. 미치지 마라, 힘을 내라. 너는 곧 1000엔 지폐의 주인공이 된다.(좋은 거란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상황이야말로 예술가가 탄생하기에 가장 용이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불안을 견디기 위해서는 도피할 공간이 필요할 테고 예술은 가장 안전한 도피처다. 재능은 쓸쓸함과 함께 무럭무럭 자란다. 그리고 그런 재능은 다른 이들에게도 훌륭한 방공호가 되어준다. 책, 음악, 영화라는 형태로.
아이를 무사히 출산한 이후에도 나는 가끔 소세키를 읽었는데 요즘은 주로 12월에 읽는다. 그즈음이면 입시학원 강사로서의 초조함(입시가 끝나고, 결과를 기다리는)+결국 내 작업은 올해에도 완성하지 못했구나 하는 자괴감 때문에 몹시 가라앉기 때문이다. 재재작년에는 ‘풀베개’ 재작년에는 ‘산시로’를, 올해는 '마음'을 읽었다.
풀베개는 한량 여행기다. 외딴곳에 가서 나무나 돌멩이를 구경하며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사람의 이야기인데 첫 장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살기 힘든 것이 심해지면 살기 편한 곳으로 옮겨 가고 싶어 진다.
어디로 옮겨 가도 살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시가 태어나고 그림이 생겨난다.
그 해에는 유난히 열심히 했는데, 결과가 생각한 만큼 안 나와서 우울했다. 나는 저 문장 뒤로 숨었다. 아늑했다. 그 문장은 내게 도망갈 생각을 하지 말고, 뭐라도 만들어 보라는 격려를 하는 것 같았다.
아늑함으로 치자면 재작년에 읽었던 ‘산시로’ 역시. 이 책은 흔히 말하는 소세키의 ‘연애 3부작’ 중 첫 번째 작품으로써 썸붕의 원인을 고차원적으로 되짚어보는 플롯을 가지고 있다. 원하던 사람과 이어지지 않고, 그 원인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임을 알지만, 자존심만 남아서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아주 걸출하게 똑똑하고 손쓸 수 없이 바보인 젊은이가 나오는데, 어찌나 아늑한지. 이렇게 똑똑하건 나처럼 평범하건 결국 젊을 때는 다 등신이구나!! 하하, 나만 그런 게 아니네. 이것 참 통쾌하다. 뭐 이런 종류의 아늑함이다.
이제 슬슬 연애 3부작의 나머지 작품들인 ‘그 후’와 ‘문’을 다시 볼까 한다. 두 작품은 공통적으로 금지된 사랑을 다루고 있다. 내가 아는 선에서는 가장 무’자극’한 불륜극이다. 아무런 액션도, 의지도 없어 보이지만 끊임없이 괴로워하는 주인공들이 나온다. 한가해 보이지만 마음속에 슬픈 소리를 가득 담고 있는 사람들과 연말을 보낼 생각을 하니 벌써 아득, 아니 아늑해진다.
아니 계속 아늑하다고 하는데, 도대체 이 감각에 왜 그리 집착하는 것인가. 그것은 내가 비가 불고 태풍이 치는 밤에 이부자리에 폭 싸여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렇다. 새벽까지 깨어 있다가 바깥에서 들리는 사이렌 소리와, 누군가의 발소리와, 고양이 소리를 들으며 꺄무륵 잠이 드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아주 긴 꿈을 꾸고 일어난다. 꿈이어서 다행이라고, 어차피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니 이어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중얼거린다. 자신의 마음을 구경하면서 겉도는 느낌은 서글프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속에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 그러니 그들은 이해해 줄 것만 같다. 내가 그들을 이해했듯이. 집단 상담과도 같은, 아늑함이다.
그냥 이 글을 빨리 끝내기가 싫어서 한 대목만 더 써보자면, 소세키가 ‘I love you.’라는 영어 문장을 ‘달이 참 밝네요.’로 번역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사랑한다는 문장을 이렇게 번역하고 싶다.
‘당신은 참 이상한 사람이군요.’
당신 소설 속 이상한 주인공들 덕분에 큰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젊은 시절의 나도 이상하긴 했지만, 비할 바 아니지요. 그리하여 나는 보너스처럼 젊은 날의 나도 사랑해 보려 합니다. 아니 이미 하고 있습니다. 이 마지막 문단은 그저 헤어지기 싫어서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사람 같습니다. 한심해도 어쩔 수 없지요. 어쩔 수 없군요. 평안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