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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명의 이수연 Oct 11. 2024

백치와 악령 사이의 part 1

도스토예프스키!

 2002년, 사람들은 그 해를 가장 뜨거운 축구를 본 해로 기억하겠지만 나에게는 가장 차가운 영화를 만난 해였다. 그 영화는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이었다. 영화를 반복해서 보는 것 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인터뷰를 찾아보던 중 인상적인 구절을 두 군데 발견하였다.


 첫째로는 박찬욱 감독이 이 영화를 최고의 상업영화라 생각하고 만들었다는 것. 이 영화는 본격 ‘하드보일드’ 영화로써 주인공들이 다 죽는다. 그리고 그런 결말을 ‘정’의 민족인 한국 관객들은 질색팔색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흥행영화라고 생각하며 신나게 시나리오를 쓰는 박찬욱 감독을 떠올리면 아무래도 좀 위험한 사람이 아닌가.. 싶고. 흠흠.(하지만 위험해야 새로운 걸 만들어 내니까요.)


 둘째는 이 영화를 찍을 당시 조연출에게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을 읽어보라 했다는 것이다. 왜일까. 평소에도 박찬욱은 ‘표절을 할 거면 고전에서 하시라. 그럼 사람들이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실전팁을 알려주셨던 바. 이번에는 어떤 부분에 영향을 받으셨을까 궁금해하며 책을 사러 갔다. 살면서 그렇게 두꺼운 책은 처음 봤다. 심지어 1.2권으로 나뉘어 있었다.(그러니까 두꺼운 책 2권이다.) 주변 친구들에 비해선 이런저런 책을 많이 읽는 편이었지만 문학소녀는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문학소녀의 전형은 따로 있었다.


  중학교 때 반에서 늘 1등을 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녀는 쉬는 시간에 ‘폭풍의 언덕’이나 ‘안나 카레니나’ 같은 두꺼운 책을 즐겨 읽었다. 그녀는 주말이 가장 즐겁다고 했다. 아침에 교회를 다녀와서, 오후에는 ‘죄와 벌’을 읽으며 쉬는 주말. 그러면서 너도 고전을 읽어야 한다고, 그게 얼마나 재밌는지 모른다고 눈을 반짝 거리며 얘기했다. 진짜 눈이, 너무 반짝거려서 나도 모르게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섰던 것 같은데. 아무튼 이런 벽돌책은 그들(눈이 반짝거리는 단발의 문학소녀들)의 몫이었다. 두려워. 이렇게 두꺼운 내용을, 이토록 복잡하고 비슷한 이름들을, 이토록 산만한 내가 소화해 낼 수 있을까. 반에서 1등 하는 애들이나 이해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주희야, 잘 지내니.


 그런데, 도스토예프스키 선생님. 당신은 꽤 제법이더군요. 주말에 쉬기 위해 ‘죄와 벌’을 읽는다는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풀네임으로 10자가 넘는 이름들도 200페이지 정도 읽다 보면 익숙해진다. 그의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호기심이었지만 그것을 이어나간 것은 순전히 재미였다. ‘악령’ 속 니힐리스트(허무주의)들의 건조한 생각들은 내 마음을 흔들었다. 캐릭터를 이렇게 그릴 수도 있구나. 완전히 나쁘거나, 완전히 선하지 않아서 진짜처럼 느껴졌다. ’복수는 나의 것’ 속 인물들처럼 악령 속 캐릭터들도 선악이 공존하는 묘함이 있었다. 각자의 사정과 신념에 따라 그 경계를 왔다 갔다 하고, 나는 결국 ‘납득하였습니다.’라고 외치게 된다.(이후 인터뷰에서 박찬욱 감독은 ‘악령’ 속 ‘숲 속 살인장면’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함.)


 이후로 그의 다른 책들도 조금씩 읽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책이 두꺼워서 그런지, 각 작품을 읽었을 때의 시기와 분위기가 그대로 기억이 나는데, 예를 들면 ‘까르마조프의 형제들’은 대학원 1학년 때 읽었다. 그의 작품 중 가장 대작인만큼 3권으로 이루어졌다. 수업이 없는 날을 통으로 비워서 하루종일 읽었던 것 같은데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한 자리에 앉아서 읽었던 날도 있었다. 중간에 끊어 읽으면 이름을 다시 외워야 할 것 같아서 그랬던 거긴 하지만, 다시는 그렇게 책을 읽을 수 없을 것 같다. 아니, 없다. 이제는 더 이상 20대의 허리가 아니기 때문에. 아, 책이 두꺼우니까 손목도!! 그러므로 여러분, 진짜 중요한 사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 읽으실 거면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시작하십시오. 얼마 전에 ‘백치’ 다시 읽다가 도수치료받으러 갔어요. (전자책으로 보면 된다고요. 아, 그렇네. 저도 알죠. 전자책. 그런데 그 두꺼운 책이 얼마 안 남았을 때의 아련함을 아실는지요. 당신들은 아직 할 수 있잖아요.)


 그리고 그의 책을 좋아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해 보았다. 왜 이다지도 위안이 되는가. 죄와 벌, 지하생활자의 수기, 가난한 사람들. 이토록 비극적이고 우중충한 주인공들을 나는 왜 자꾸만 찾아가게 되는지. 왜, 삶이 유배 같다는 생각이 들 때면 이 두꺼운 책들과 함께 칩거를 하게 되는지. 한 문장 한 문장 소리 내어 읽다 보면, 형량이 줄어들고, 죄가 사해지는 것 같은지. 책이 끝날즈음의 외출에서 맡게 되는 공기내음은 왜 그 전과 다른지. 생각해야 했다.


 왜냐하면 나는 영상원 전문사를 졸업하고 이렇다 할 커리어 없이(물론 뭘 좀 쓰긴 했지만) 몇 년째 스탠바이 상태였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삶이 유배 같았기 때문에. 그런데 형량이 얼마나 되는지, 죄목은 무엇인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유배였다. 다음은 그 생각의 결과다.


첫째로는, 그냥 책이 두꺼워서다. 해냈다는 묘한 성취감. (어쩌면! 나도 교양인일지 몰라!라는 생각 포함)

둘째로는, 19세기 러시아 이야기를 읽다가 현실로 돌아오면,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일들이 가볍다 못해 낭만적으로 느껴져서.

셋째로는, 아주 형편없는 주인공들을 아주 공들여 세심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인물의 가장 약한 부분과,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부분도. (물론 치사하고 악한 부분도 공들여서)  그러니까 보통 나는, 주인공에 몰입해서 읽기 때문에 누군가 이렇게 말해주는 것 같다. 너에게도 있지, 이런 부분들이. 형편없는 인간이기만 한 건 아냐. (그리고 지금 니 옆을 스쳐가는 저 사람에게도. 니가 싫어하는 그 인간에게도.) 그래서 결국 인간에 대한 미움을 조금 내려놓게 된다.


 도선생님의 작품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백치’다. 31살, 홍제동 빌라에서 자취를 하고 있을 시기였다. 그곳이 어떤 곳이냐면 지하철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10분 이상 오르막을 오르고도, 내려서 또 오 분동안 걸어 올라가야 하는 엄청난 고지대다. 월세가 싸고, 조용하고, 공기가 맑은 것 같았지만 출퇴근이 너무 힘들 것 같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일단 왔으니 집이나 보자라는 맘에 들어갔더니 통창으로 엄청나게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우리는(룸메이트가 있었다.) 이곳에서 3년 이상 살았다. 천국 같은 여름과, 지옥 같은 겨울이었다.


 진짜 중요한 말씀 하나 더 올립니다. 만약 당신이 여름에 집을 구한다면, 이 집처럼 바람이 마구 불어서 시원한 집이라면. 더군다나 통창이라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겨울에 얼어 죽을 수 있습니다. 주인집에서 보일러 고장은 절대 아니라고 했지만, 무언가 고장이 난 게 분명했다. 낙천적으로 생각하면, 도스토예프스키를 읽기 최적의 장소라고나 할까. 한겨울에는 바깥보다 집이 더 추웠기 때문에 나는 그저 침대 안에 들어가 그 시절 가장 친한 친구였던 ‘지구’를 껴안고 지냈다. (지구는 까만색 슈나우져였고, 그 집에서 유일하게 따뜻한 존재였다. 유일하게 고장 나지 않은 무엇이었다. 따듯하고 다정한 지구와, 백치가 없었다면 그 겨울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백치에 관한 이야기는 2편으로.

첫 독은 열린책들 버젼으로. 페이퍼북이라 나중에 곰팡이가 올라왔다.


+브런치 해시태그 어떻게 하는 건가요. 도스토예프스키도 박찬욱도 쓸 수 없다고 하고. 악령도 백치도 없고. 그래서 남은 게 러시아와 대학로라는 기이한 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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