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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명의 이수연 Oct 14. 2024

백치와 악령 사이의 part 2

도스토예프스키!

두 번째도 열린 책들 버전. 인연이네요.


 백치는 간질병에 걸려 오랫동안 요양을 가 있던 주인공 백치 ‘미시킨 공작’이 다시 고향인 러시아로 돌아오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그는 돌아오는 기찻길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인 ‘로고진’과 말을 트게 되고 그가 ‘대단한’ 미모와 ‘대단한’ 성격의 나스타시야라는 여성에게 푹 빠져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후에 미시킨과 로고진 그리고 나스타시야는 삼각관계에 이르게 되고 결국은 파국에 이르게 되는데. 이렇게 쓰고 보니 단순한 치정의 플롯처럼 느껴지지만 이 책은 1200페이지인 바. 치정만으로는 채울 수 없다. 러시아 소설에서 나라의 정세는 각 개인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바(하긴 어딘들) 혼돈에 휩싸인 인물들의 한탄, 때로는 독백이 주옥처럼 펼쳐진다. 1200페이지의 역사소설인 동시에 ‘고’ 자극 치정극이면서, 또한 ‘캐릭터, 어떻게 쓸 것인가’와 같은 실용서의 역할도 하는 바, 꼭 구매하실 것을 다시 한번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백치’에서 내가 가장 사랑했던 인물은 백치였다. 그는 그 세상 물정 잘 모르는 순진함과 어떤 사람이건 믿어버리는 대책 없음으로 사랑을 받았고, 내게 남아있는 것 중 가장 쓸만한 것도 그것과 비슷했다. 더 정확히는, 기분이 좋아서 착해진 나, 사랑에 빠져 나사가 빠진 나, 한껏 미화시킨 나와 닮았었다. 내게는 간질도 없었고, 격랑의 러시아에 살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나이와 성별도 달랐지만 나는 그와 내가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게 위안이 됐다. 그가 책 속 주인공들에게 이해받고, 맹목적인 사랑을 받을 때 나 역시 두둥실 떠올랐다. 백치란 얼마나 편리한가. 아무것도 모르면 그만이니. 다음은 로고진이, 백치(레프 니콜라예비치, 미시킨 공작)에게 고백처럼 토해내는 말이다. 자신이 몸과 마음을 바쳐 사랑한 여자가 사실은 이 백치를 사랑한다는 걸 알게 된 이후다.


자네가 내 앞에 없으면 레프 니콜라예비치, 나는 그 즉시로 자네에게 악의를 느끼네. 자네를 보지 않았던 3개월 동안 나는 매 순간 자네에게 증오심을 품고 있었어. 자네를 끌고 와서 독살이라도 시키고 싶은 심정이었네! 알겠나? 그런데 자네와 15분도 채 같이 앉아 있지 않았는데 증오심은 사라져 버리고 자네가 예전처럼 사랑스러워. 나하고 잠깐만 있어 주게…


 그쵸, 맞죠? 백치가 최고죠? 그리고 거의 15년 만에 백치를 다시 읽었다. 이 글을 쓰기 위해서다. 그때의 나를 다시 떠올리기 위해서다. 그리고 나는 로고진과 나스타시야를 좋아하게 되었다. 로고진은 세속적인 인간이고 자존감도 낮고, 결국은 폭력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사랑을 파멸로 이끈 사람이지만.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나는 이 여자를 갖고 싶다. 나는 이 새끼를 싫어하면서도 좋아한다. 로고진은 안다. 그리고 그걸 다 표현한다. 그게 정말 좋았다. 그리고 나스타시아. 문제적인 여인.


 모든 것은 그녀를 둘러싼 많은 남자들의 욕망과 돈과 복잡한 사연들이 결국 그녀가 누구와 결혼하는가의 문제로 결판이 날 한 연회장에서 시작된다. 그날 미시킨 공작은 이 연회에 초대되지 않았지만, 불현듯 나타나 나스타시아에게 청혼을 한다. 이들에게 당신을 넘기지 말라, 나는 당신의 본모습이 보인다. 이 순간 그녀는 이 백치에게 빠져버린 것이다. 착한 남자의 진가를 알아본 나쁜 여자란, 희귀한 법. 하지만 그녀는 곧 마음을 바꾼다. 그녀는 거액의 지참금과 함께 무작정 찾아온 로고진에게 도망가자고 말한다. 너와 결혼하겠다고. 그리고 당황하는 공작을 달래듯 이렇게 말한다.


공작, 이렇게 되는 편이 차라리 나을 거예요. 결혼해 봤자 머지않아 당신은 나를 깔볼 테고, 그렇게 되면 행복이고 뭐고 없게 돼요! 맹세하지 마세요, 나는 믿지 않을 테니까요! 결국은 부질없는 짓일 텐데요, 뭘! 차라리, 좋은 마음으로 헤어집시다. 안 그러면 나는 공상가니까 득이 될 게 없을 거예요! 사실 나도 당신을 머릿속에서 그려 봤어요. 당신이 맞아요. 내가 저 사람의 시골집에서 5년 동안 홀로 외롭게 살고 있을 때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 당신에 대한 꿈을 꾸기도 했지요. 정직하고 착하고 다소 어리석은 듯한 사람이 문득 나타나더니 <나스타시야, 당신은 죄가 없어요. 나는 당신을 존경해요!>라고 하더군요. 나는 그러한 공상을 하다가 머리가 돌아 버릴 지경이었어요. 그러고 있으면 바로 저 사람이 찾아와서 1년에 두 달쯤 머물며 나를 수치스럽게 하고, 화나게 하고, 구역질 나게 하고, 추잡하게 하곤 떠나 버리는 거였어요. 그래서 나는 천 번이나 연못에 빠져 죽으려고 했는데, 삶에 무슨 미련이 있는지 죽어 버리질 못했어요. 자… 로고진, 이제 준비가 되었나요?


 이 대목을 읽으며 마음이 아팠다. 내 옆에 두면 망가질지 모르니, 소중한 걸 아예 곁에 두지 않겠다는 마음. 드높은 자존심과, 한없이 낮은 자존감을 가지면 저런 판단을 할 것 같다. 그녀는 희대의 악녀, 혹은 죽여서라도 갖고 싶은 여자가 아니라 가여운 여자였다. 상담을 좀 받았더라면 어땠을까. 조금만 덜 예뻤다면 어땠을까.


그리고 백치는, 여전히 사랑스러웠지만 나와는 더 이상 닮지 않았었다. 나는 그 책을 읽은 시기로부터 조금 오래 산 것 같았고, 스스로를 소설 속 주인공과 동일시하며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시기는 딱 정해져 있으니, 나는 그걸 다 써 버렸다. 더 이상 까맣고 따뜻한 개를 껴안고, 추위를 견디며 읽은 ‘백치’가 아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는 초여름에 초등학교 고학년인 아들의 귀여운 방해공작을 받으며, 대학로에서 두 번째 ‘백치’를 읽었다. 나는 더 이상 유배 중이 아니고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하게 행복하다. 이게 잘된 일인지 좀 고민해 봐야겠다. 바꿀 생각은 없지만.


이쁘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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