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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oudie Jul 21. 2019

표현은 안 하지만 나도 다 알고 있어요

무뚝뚝한 딸의 변명


우리 집의 서열을 굳이 따지자면,

엄마 >>> 아빠 = 나 = 동생 

정도 되는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와는 항상 애증의 관계였다. 많이 혼나고 싸웠지만 그래도 내가 재잘재잘 떠들게 되는 상대.


반면 아빠는 한없이 자상한 사람이자 내 편. 그럼에도 무뚝뚝하게만 대하게 되는 존재.


초등학 1학년 때였나 당시 친구들 사이에서는 학종이 따먹기가 유행이었다. 뭐든 하면 이겨내야만 속이 시원한 나는 학종이를 많이 따냈지만 그래도 학종이가 더 많아져서 친구들에게 더 자랑하고 싶 나머지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매일 같이 학종이를 사달라고 졸라댔다. 엄마는 당연히 사주지 않았고, 나는 그 상황이 서러워 펑펑 울었던 것 같다. 며칠 후 아빠는 나에게 조용히 다가오더니 조금 이따가 엄마 모르게 방 문 뒤를 보라고 일러주었다. 아빠, 엄마가 출근하고 난 뒤 나는 재빨리 아빠가 일러준 장소로 달려갔다. 거기에는 내가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새 학종이가 놓여있었다. 지금 와서 퇴근 후 다 큰 아저씨가 문방구에 들러 학종이를 샀을 생각을 하니 한편으로는 웃음이 나고 한편으로는 마음이 찡하다.


고등학교 때 역시 내가 용돈을 더 달라고 하면 엄마는 무서운 얼굴로 안된다고 하기 일쑤였고, 그러면 아빠는 또 나에게 몰래 찾아와 용돈을 쥐어주곤 했다.


그렇게 대학교를 가고 1년간 해외로 교환학생을 떠나게 되었다. 아빠, 엄마와 헤어지는 공항에서 나는 처음으로 아빠의 눈물을 보았다. 처음 보는 아빠의 눈물에 놀라 나는 울지 않으려고 꾹 참고 돌아서 비행기 안에서야 눈물을 찔끔찔끔 짰다.


20대가 되고 나니 자연스레 집에 늦게 오는 날이 잦아졌다. 그런 나에게 아빠는 항상 11시만 되면 전화를 걸어왔다.

"어디니?"

"가고 있어."

"지금 시간이 몇 시인 줄 알아?"

"11시. 나는 학교도 집에서 멀어서 11시까지 오려면 9시 반에 자리에서 일어나야 돼! 다들 더 놀다 가는데 왜 나만 맨날 놀지도 못하고 나와야 되는 거야!"


싸울 일이 없던 아빠와 나는 성인이 된 후 통금 문제로 매일 같이 싸웠다. 11시만 되면 알람처럼 울려대는 전화 속에서 더 놀고 싶은 나는 통금을 지키면서도 아빠에게 매일 심통이 나 있었다.


하루는 친구들과 술을 먹고 난 뒤 통금보다 훨씬 늦게 집에 들어갔다. 당시 시간이 늦어 알고 지내던 남자애가 나를 데려다주었는데 그 모습을 우연히 본 아빠는 4층(우리 집)에서 뛰어내려와 호통을 치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를 때렸다. 다음 날 나는 방에서 나가지도 않고 아빠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빠는 내 방으로 찾아와 많이 아팠느냐고, 아빠도 마음이 아팠다고, 아빠가 너무 미안하다고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라고 말하며 날 안아주었다. 혹시나 딸이 비뚤어질까 봐 놀란 마음에 그랬을 것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아빠는 유난히도 딸 자랑을 많이 하는 아빠였다. 회사 행사에도,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에도 심지어 회사 회식에도 나를 불러 주변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하는 걸 즐겼고, 그때마다 "나 닮아서 예쁘지? 허허허"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도 모자라 아빠는 출장 중 내 회사 근처를 지나가게 되자 또다시 나를 불러내 같이 출장 나온 사람들에게 인사를 시키고야 마는 팔불출 아빠였다.


몇 달 전 엄마와 크게 다투고 울면서 밖으로 나온 나를 아빠는 따라 나와 왜 그러느냐고 네가 엄마를 이해해야 되지 않겠느냐며 속상해했다.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 데 아빠한테 말을 하려 하면 할수록 더 눈물이 날 것 같아 마음과는 다르게 "그냥 나 좀 가만히 내버려 "라고 쏘아붙였다. 그러자 아빠는 나를 두고 어디론가 갔다. 그렇게 마음을 추스르고 지하철이 도착해 타려는데 지하철 창문에 비친 아빠 모습이 보였다. 아빠는 내가 화를 내니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뒤에서 나를 계속 보고 있던 것이다. 나는 참 나쁜 딸이다.


매일 아침 아빠는 할 줄 아는 요리도 없으면서 계란 프라이를 해주고, 과일을 꺼내 주고, 우유를 따라주곤 한다.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 나에게 화내고 쏘아대는 엄마에겐 이것저것 수다도 잘 떨면서 "아이고 우리 딸~" 하면서 다가오는 아빠에게는 무뚝뚝해진다.


오늘 아침, 주말이라고 느지막이 일어나서 안방에 들어가 보니 계속되는 무더운 날씨로 인해 딸들은 다 선풍기 하나씩 끼고 자는 데 혼자서 열심히 휴대용 선풍기를 쐬고 있는 아빠를 발견했다. 아니 선풍기가 비싼 것도 아니고 왜 어디서 얻어온 휴대용 선풍기를 열심히 충전해가며 그걸로 더위를 식히고 있는 건지 갑자기 너무 속상해져 나는 DC 모터에 초절전에 저소음에 리모컨까지 딸려있다는 뭔진 모르지만 이것저것 좋다는 기능이 다 들어있는 선풍기를 주문했다. 선풍기를 주문해놓고도 나는 모른 척 TV를 보며 자꾸 장난을 치는 아빠에게 더우니 제발 그러지 말라고 퉁명스레 말한다. 마음은 그런 게 아닌데 자꾸만 반대로 행동하게 되니 나도 참 못난 딸이다. 그나저나 선풍기는 언제쯤 오려나 배송 조회를 쓱 눌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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