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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oudie Apr 03. 2019

비망록

그를 잊지 않기 위한 나의 기록

4살까지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 댁에서 컸다. 지금의 식습관이 형성된 데에는 그들의 영향이 매우 크다.


밥을 먹을 때면 할아버지는 우선 물을 한잔 시원하게 마시게 했다. 어린 내가 꼭꼭 씹어 먹을 수 있게 자주 밥을 물에 말아 주었고 김치도 맵지 않게 물에 씻어서 잘라주었고 그것도 모자라 그 위에 케첩까지 뿌려주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여전히 매운 것을 잘 못 먹고 밥 먹기 전에 무조건 물을 마셔야 하고 창피하지만 김치를 작게 작게 잘라먹고 모든 음식을 케첩과 함께 먹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기억하는 우리 할아버지는 말이 별로 없지만 한 번씩 던지는 말이 너무 재미있던 유머러스한 분이고 외출할 땐 꼭 모자와 조끼 등을 그때그때 옷에 맞게 갖춰 입는 걸 좋아하는 멋쟁이 었고 정리 정돈을 중시하여 옷장을 열면 항상 옷들이 각을 잡고 줄을 지어 있었다. 내가 옷을 사거나 가방을 사거나 매니큐어를 새로 칠하고 갈 때면 항상 할아버지는 이건 뭐냐며 알아봐 주시곤 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빵을 드시는 모습. 빵, 특히 팥이 들어간 빵을 좋아하여 매주 할아버지 댁에 갈 때마다 우리는 빵을 샀다. 그럴 때면 할아버지는 오늘은 뭘  사 왔나 구경하시면서 밥을 먹고 난 뒤에도 빵을 몇 개씩 드셨다. 그렇게 좋아하는 빵도 당이 심해지신 이후에는 사갈 수가 없었다. 얼마 전 아주아주 오랜만에 빵을 사 가지고 갔던 일은 아주아주 잘한 일이다.


나이가 들면서 할아버지는 귀가 많이 안 좋아졌다. 그러다 보니 의사소통이 힘들어졌고 자연스레 나는 할아버지에게 말을 잘 걸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가도 가끔은 작은 목소리에도 잘 대답해주실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우리는 할아버지가 불리할 때만 안 들린다고 하는 건 아닌지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할아버지는 참전 유공자셨고 그 사실을 매우 자랑스러워하셨다. 대부분의 유공자 할아버지들이 그렇듯 유공자 관련 배지와 모자를 매우 아끼고 즐겨 착용하셨다. 할아버지는 평소에는 별 말이 없으시다가도 한 번 화가 나면 아무도 말릴 수가 없었다. 그 시절 그런 고통을 겪은 사람이기에 그의 이해 안 되는 행동들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무엇이든 기록하는 분이었다. 일기장의 제목은 비망록이었는데 그 제목이 나는 참 좋았다. 자신의 이력도 정리하여 우리에게 주셨고 이사할 무렵 필요한 것들을 모두 적어 정리하셨고 이사 이후에도 제일 먼저 챙기신 건 본인 책상이었다. 여전히 할아버지 책상 위에는 종종 쓰시던 일기장과 매달 내던 공과금 내역들이 적혀있다. 2019년 1월 25일 공과금 납부, 2월 25일 공과금 납부. 3월부터는 적혀있지 않다.


나 역시 할아버지를 잊지 않기 위해 글을 쓴다.

쓰다 보니 후회되는 일은 많지만 내가 할아버지를 아주 아주 많이 사랑했던 것 같다. 2019년 3월 29일 그가 떠났지만 여전히 빵을 들고 방문하면 반겨주실 것 같아 아직 실감이 나질 않는다.


입관 당시 마지막 한마디를 하라고 하는데 하지 못했다.

할아버지 좋은 곳에서 편히 쉬세요. 그곳에서는 당 때문에 먹지 못한 좋아하는 빵도 많이 드시고 북에 두고 와 평생을 그리워했던 가족들도 만나고 숨이 차고 걸음이 느려져 가지 못했던 강화도에도 가시고 행복하게만 지내시다가 할머니가 가시는 날 반갑게 맞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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